278화 마음의 거리 (1)
“큰일났습니다 가주님!!!”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야?”
크리울로스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그런지 크리울로스의 이마에도 주름이 가득 자리해 있었다.
백발이 성해진 그가 달려온 기사에게 물을 한 잔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보다, 섬광 마법기사단과 몇몇 귀족들이 배신했습니다.”
“흐음… 배신이라니… 그들이 사우스 왕국으로 향했다는 말인가?”
“그… 그렇습니다…….”
마치 미리 짐작이라도 했던 것처럼 말하는 크리울로스를 보며 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리울로스가 혀를 찼다.
“결국 그리 되었구만…….”
과거에 몇몇 사람들이 크리울로스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크리울로스에게 이스트 왕국에 대한 불만을 얘기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크리울로스가 자신들의 얘기에 동조해 줄 줄 알았던 것이다.
왕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건만, 프로메테 가문은 현재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떠났다.
그럼에도 크리울로스는 프로메테 가문에 대해 그다지 걱정하진 않았다.
프로메테 가문은 뿌리가 깊었다.
깊은 만큼 쉽게 무너지거나 부러지지 않는다.
곧 새롭게 몸을 일으킬 인재들도 많았다.
그 선두에는 테오도라가 있었다.
아직 테오도라는 트라이포스에 있었지만, 그 녀석이 다시 돌아온다면 프로메테는 얼마든지 제 2의 전성기를 맞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아레나도 가문에 머물며 많은 것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크리울로스가 던전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해도 그녀는 고집스럽게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크흠…….”
기침을 한 크리울로스가 입을 가렸다.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핏물.
언젠가부터 기침을 할 때마다 핏물이 함께 세어나왔다.
크리울로스는 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손을 뒤로 감추었다.
그때 기사가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씀드릴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말하게.”
“사우스 왕국이 현재 제 9기사단을 쫓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왕실기사단을? 설마…….”
“맞습니다… 모두 죽이기 위함입니다.”
“크흠… 그렇다면 곧바로 왕성을 찾아가 그들을 구할 지원 병력들을 추려달라 말해야겠구만… 아니면 벌써 움직이고 있는가?”
크리울로스의 물음에 기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도 확인하지 않고 곧장 찾아온 건가? 어지간히도 급했나보군 자네…….”
“그도 그럴 것이… 제 9기사단에는….”
뒤편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아들과 알렌시아가 같이 있어요.”
아레나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크리울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게 무슨 말이냐? 왕실기사단에 어째서 우리 손자가 있다는 거냐?”
“아시테르는 9기사단의 부단장이기도 하니까요.”
“그 아이가?”
“네. 거기다 마르체니 공주와도 친분이 두터워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다녀오겠다고 말했었어요.”
“허어… 이것 참…….”
크리울로스가 혀를 차며 인상을 굳혔다.
설마하니 그곳에 아시테르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아레나가 기사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제 9기사단을 추적하고 있는 병력의 규모는 어떻게 되나요? 그래도 제 아들이 함께 있으니 쉽게는 안 당해 줄 거예요. 거기다 알렌시아 양까지 함께 있다고 했으니…….”
“그게… 현재 제 9기사단을 쫓고 있는 병력은 하트 군대와 클로버 군대, 다이아 군대, 스페이드 군대입니다…….”
기사의 말에 아레나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놀란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요…? 그 말은 결국 사우스 왕국 전 병력이 아시테르를 쫓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어요. 정확한 사실인가요?”
“예… 아시테르님께선 최근 사우스 왕국과의 전쟁에서 큰 공훈을 쌓으셨습니다. 덕분에 언노운 마법기사단도 사우스 왕국에서 요주의 기사단으로 자리잡혔습니다. 이는 일섬 마법기사단도 마찬가지. 새롭게 떠오른 두 명의 신예가 함께 있다 보니… 사우스 왕국에서도 확실하게 두 사람을 붙잡기 위해 전 병력을 동원한 것 같습니다.”
기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레나가 몸을 돌렸다.
크리울로스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 그런 아레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는 것이냐?”
“네.”
“그래… 이 아비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도와주겠다.”
“감사해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차라리 가문의 사병들을 데려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죄송하지만 그럴 순 없어요. 저 혼자 다녀올게요.”
“그래… 알겠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거라.”
“걱정마세요 아버지.”
아레나가 크리울로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크리울로스는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레나는 자신의 아들을 구하러 가는 것이었다.
이는 크리울로스도 부모였기 때문에 아레나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그 또한 아레나가 그런 위험에 처해 있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구하려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레나 또한 크리울로스의 딸이었다.
손자를 구하기 위해 떠나가고 있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아비의 심정이 크리울로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왕성으로 가겠다. 준비하라.”
“알겠습니다.”
* * *
바위에 걸터앉은 아시테르가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그의 전신이 피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여기저기 흐르는 핏물들을 보며 아시테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과연 사우스 왕국의 트럼프는 강했다.
그가 전력으로 부딪혔음에도 제이스쿠스와 롤스로체카를 쓰러트리지 못했다.
곁에 있는 알렌시아도 결국 크게 부상을 입고 말았다.
제 9기사단이 완전히 이곳을 벗어난 것을 깨닫자마자 아시테르는 알렌시아와 함께 자리를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적들도 두 사람을 쉽게 보내 줄 생각따윈 없었다.
특히나 롤스로체카의 마법이 문제였다.
그의 마법이 영향을 미치는 한, 아시테르와 알렌시아가 어디로 숨더라도 위치가 금방 발각되고 말았다.
거기다 상황은 더욱 최악으로 흘러 마침내 클로버 군대까지 합류하고 말았다.
아시테르와 알렌시아 이 두 사람을 잡기 위해 무려 세 개의 군대가 투입된 것이다.
어디를 가도 적들의 눈이 있었고 어느 곳에 머물러도 적들의 마법이 닿았다.
그렇게 어디로 쫓기는 지도 모른체 아시테르는 알렌시아를 데리고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늘 자리하고 있던 풍부한 마력도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몸은 한계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알렌시아도 진즉에 한계에 다다라 이제는 가벼운 마법조차 캐스팅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적들에게 쫓겨 이렇게 죽는 구나 싶었을 때, 아시테르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벼랑 끝에 다다른 그들의 앞에 희망처럼 나타난 던전 게이트.
그것을 보자마자 아시테르는 망설임 없이 알렌시아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섰다.
뭐가 되었든 일단은 저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 뛰어드는 이 던전이 어떤 던전인지는 사실 중요치 않았다.
안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던 지금 당장은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렇게 아시테르는 알렌시아와 함께 던전 게이트로 뛰어들었고 이를 본 롤스로체카가 놓치지 않겠다며 함께 뛰어들었다.
제이스쿠스의 수하들도 함께 던전 게이트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그들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다행이 다른 곳으로 떨어진 모양이야…….”
게이트로 들어갈 때 알렌시아를 꼬옥 안고 있었기에 서로는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아시테르가 옆에 잠들어 있는 알렌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이번에 엄청난 무리를 가했다.
살아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시테르는 알렌시아와 평생을 함께 하기로 다짐했다.
아시테르가 알렌시아의 손을 꼬옥 말아쥐었다.
이 작고 하얀 손에서 그런 파괴력 있는 마법들이 시작된다.
“일섬 마법기사단이라…….”
그녀가 이끌고 있는 일섬 마법기사단.
그러고보니 아시테르는 일섬 마법기사단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못하고 있었다.
사우스 왕국에서 알렌시아가 이것에 대해 서운하다는 말을 토로해도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섭섭하고 서운하게 생각했던 것들도 자신은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 것들이었으니까.
그러니 이제는 돌아가면 알렌시아에게 좀 더 집중하고 싶었다.
어차피 언노운 마법기사단은 자신이 아니더라도 에스파가 잘 운용해줄 것이다.
에스파의 말을 듣지 않을 단원들도 아니었다.
카이드가 조금 다루기 힘든 스타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녀석조차 에스파는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갑자기 그 녀석들 얼굴이 그리워지네…….”
이렇게 떨어져 있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요 며칠간 살아남기 위한 생각들로 가득해 있다보니, 이렇게 가만히 앉아 언노운 마법기사단을 떠올려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동료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떠올려보며 아시테르가 피식 웃었다.
에스파는 지금쯤 개성 있는 단원들과 함께 임무를 치르느라 제법 골머리좀 썩고 있을 것이다.
라빈은 여전히 에스파와 투닥거리고 있을 테고.
그 옆에서 자비토는 은근하게 질투하고 있을 것이다.
에스파를 나무라는 라빈을 보며 에이브릴은 또 한 마디 하고 있을 테고 세아츠리스는 관심 없다는 얼굴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을 테지.
가이우스는 새로 익힌 취미로 딸의 얼굴을 조각하고 있고 크로마제는 그런 가이우스를 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을 테다.
반키라스도 그런 크로마제를 한심하게 바라보면서도 은근히 가이우스의 조각에 관심을 갖고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엔류아와 데미리우스는 둘이 나란히 앉아 세상에 대해 속삭이고 있을 것이다.
한번에 그려지는 단원들의 모습.
그 장면 속에 자신이 나타나면 모두의 시선이 이리로 집중된다.
환하게 웃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았다.
아시테르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으음…….”
그때 알렌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에서 깬 그녀가 아시테르를 올려다보았다.
“깼어?”
“여기는…….”
“던전 안이야.”
“아아, 그러고 보니 우리 던전 게이트 안으로 뛰어들었지…….”
“천운이었어. 갑자기 우리 근처에 던전 게이트가 생겨나다니…….”
“진짜 다행이었네…….”
알렌시아는 자신의 손을 꼬옥 붙잡고 있는 아시테르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시테르는 알렌시아를 지키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다.
아직 그녀는 제이스쿠스의 상대가 아니었다.
제이스쿠스의 압도적인 마법 실력에 위기도 몇 번씩이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시테르가 화염을 두르고 나타나 알렌시아를 위기에서 구해 주었다.
그때서야 알렌시아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어렴풋이도 느끼긴 했었지만 아시테르는 이미 알렌시아가 닿을 수 없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의 마법 실력은 감히 말하건데 테르세우스와 견줄 수 있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방식으로 수련을 거듭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시테르는 이미 거대한 등을 갖고 있었다.
군단장이었던 테르세우스에게서나 볼 수 있었던 그 거대한 등을.
그때 느꼈던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자 갑자기 알렌시아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질투일까 아니면 부러움일까, 그것도 아니면 순수하게 축하하는 마음일까.
그러면서도 자신이 만약 저런 실력을 갖게 됐었더라면…….
그랬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저런 생각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아시테르가 몸을 아끼지 않고 자신을 구해 주었음에도 불구 알렌시아는 자신이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기도 했다.
그때 입술에 보드라운 감촉이 전해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아시테르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