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마음의 거리 (3)
좋은 꿈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단란하게 사는 꿈.
전쟁의 위협도 없고 마수들의 위협도 없는 세상이었다.
달덩이 같은 아들딸들과 손을 잡고 함께 산책을 하는 모습.
그 옆에서 웃고 있는 남편.
그런데 그 남편의 얼굴이 흐릿하다.
그를 알아보기 위해 눈매를 좁혀 봤지만 소용없었다.
누구냐고 물어보려 해도 좀처럼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붙잡혀 있는 것처럼, 몸도 움직이질 않았다.
남편이 다가와 손을 내밀고 아이들이 빨리 오라고 손짓한다.
그럼에도 알렌시아는 움직일 수 없었다.
“아… 아아…….”
알 수 없는 당혹감과 슬픔, 긴장이 자리할 때 그녀가 눈을 떴다.
어둠이 내려앉은 천장에 붉으스름한 잔빛이 남아 있다.
“여기는…….”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난다.
아시테르와 함께 던전으로 도망쳤던 기억.
마수들을 쓰러트리며 앞으로 나아갈 때 그녀의 몸 상태가 돌연 나빠지며 결국 주저앉고 말았었다.
“아시테르……?”
알렌시아가 주변의 아시테르부터 찾았다.
다행이 아시테르는 불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제 보니 그는 주변의 식물들로 간이침대를 만들고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알렌시아의 인기척이 들리자 아시테르도 덩달아 눈을 떴다.
아무래도 던전 안에 있다 보니, 습관적으로 깊은 잠에는 빠져들지 않았다.
잠을 자면서도 신경이 곤두세워져 있는 느낌이라 아시테르도 알렌시아가 부스럭댈 때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일어났어?”
“여기는…….”
“아직 던전이야.”
“바깥으로 갈 입구를 찾지 못한 거야?”
아시테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좀 괜찮아?”
“응. 상당히 개운해졌어.”
알렌시아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무겁던 몸이 지금은 상당히 가벼웠다.
기분도 개운해 며칠 푹 쉬다 일어난 기분이었다.
“몸 상태가 너무 좋은데?”
“다행이다.”
아시테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렌시아가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면과는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는 바위 위쪽이었다.
“이제 다시 출발해 볼까?”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 될까?”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자.”
알렌시아가 불가에 있는 아시테르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시테르. 네가 날 구해 준 거지?”
“응?”
“나 독에 중독되어 있었잖아. 어렴풋이 네가 하는 말 들었어.”
“아아 맞아… 중독 증상이 있었어.”
“그래서 네가 해독약을 구해다 준 거구나…! 근데 던전에서 오래 살면 독에 대해서도 공부하게 되는 건가?”
“후후후, 그건 아냐. 할아버지는 독에 관해서도 흥미가 있으셨던 것 같긴 하지만.”
알렌시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시테르가 고개를 돌려 잠시 알렌시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아냐.”
“그런데… 어쩐지 얼굴이 더 수척해진 것 같다? 그동안 나 지킨다고 못 쉬어서 그런 거야?”
알렌시아의 물음에 아시테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사실 할 말이 있어 알렌시아.”
“뭔데? 말해봐.”
“네가 중독되었던 독은 프시케의 독이라는 거야.”
“프시케의 독?”
“응. 점점 온몸이 굳어가는 지독한 독… 가만히 두면 금세 몸의 내부까지 굳어져서 죽어버리고 말아.”
“정말 끔찍한 독이었네…….”
알렌시아가 아시테르의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자신을 구해준 것에 대한 애정표현이었다.
“덕분에 살았어 아시테르.”
아시테르가 말없이 웃었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더 남아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서 끝이 아니야.”
“그럼?”
“프시케의 독을 치료할 수 있는 건 ‘아시말리온’이라는 이름의 꽃뿐이야.”
아시테르가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파란색 꽃잎이 인상적인 꽃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저 꽃이 있는 곳에 들어가면 독가루가 몸에 쌓이게 되거든.”
“독가루…? 뭐야? 그럼 너도 중독되었다는 소리야? 그럼 어떻게 해야 돼? 내가 뭘 해주면 돼? 나 이제 몸도 많이 좋아져서 해독초가 있다면 금방 구해 올게.”
알렌시아의 말에 아시테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시말리온 꽃의 독가루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당장 아버지인 유미르부터 시도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비체의 말로는 그런 것은 없다고 했다.
아시말리온 꽃 자체가 마계의 꽃이라고 불리운다.
그만큼 지독한 꽃이라는 얘기였다.
“안타깝지만 소용없어.”
“그… 그럼 뭐야? 나를 살리려고 네가 대신 독에 중독되기라도 했다는 거야…? 그렇게까지 하면 어떻게 해!”
알렌시아가 화를 내듯 말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일단 그녀부터 진정시켰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아시말리온 꽃의 독가루는 몸에 직접적인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니까. 다만… 몸에 마력이 쌓이는 것을 방해해.”
“그게 무슨 말이야? 마력이 몸에 쌓이는 것을 방해한다니…? 그 말은 그럼 앞으로 너의 몸에는 마력이 쌓이질 않는다는 얘기야?”
아시테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알렌시아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부터 뭔가 이상하긴 했다.
아시테르는 자신의 마력이 흘러나가는 것을 컨트롤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서 평소 아무런 마력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데 지금은 그에게서 아무런 마력도 느껴지질 않았다.
“정말로… 아무런 마력이 느껴지질 않아……?”
알렌시아가 아시테르의 손바닥을 펼쳤다.
아시테르는 더 이상 작은 불꽃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온몸에 흘러넘치던 마력이 모두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텅빈 껍데기로 홀로 남겨진 기분.
그럼에도 상관없었다.
알렌시아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마력 따위는 어찌되든 좋았으니까.
거기다 아시말리온 꽃밭에서 만났던 마수가 바로 이 던전의 주인이었던 모양이다.
녀석이 죽고 나서 던전을 나갈 수 있는 게이트가 열렸다.
그 게이트가 어떻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게이트란 걸 알아차릴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알렌시아의 표정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아시테르도 덩달아 신경쓰일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미안… 지금 잠시 혼란스러워서…….”
“혼란스러울 게 뭐가 있어……?”
“그냥… 갑자기 네가 마력을 모두 잃었다고 하니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뿐이야. 그러니까 너무 신경쓰지 말아.”
“아시테르 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한 거야?”
“왜냐니……?”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시테르에게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숨을 쉬는 것처럼.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화장실로 가는 것처럼.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자고, 그런 것과 똑같은 느낌이었다.
단 일 초의 고민도 없이 선택한 일이었다.
당시 아시테르의 머릿속에는 알렌시아를 빨리 구해야겠다는 생각밖엔 없었다.
그런데 알렌시아의 생각은 아시테르의 마음과는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그동안 그렇게나 노력했잖아…? 근데 그걸 나 때문에 다 포기해……?”
“당연한 것 아니야…? 나는 그런 것보다 네가 더 소중해.”
“그건 고마운데… 나는…….”
알렌시아는 다음에 하려던 말을 흐렸다.
이렇게까지 아시테르가 모든 것을 희생하며 자신을 구해 주길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가뜩이나 아시테르에 대한 마음이 흔들리고 스스로의 마음이 어떤지 돌아보던 시기에…….
물론 아시테르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은 너무나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것에 더해 아시테르가 너무도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을 것만 같은데 지금은 아니었다.
이상하게 머릿속이 차가워지고 냉정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깨달을 수 있었다.
아시테르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더 이상 예전 같질 않다는 것을.
그런데 너무나 큰 은혜를 입어 버렸다.
알렌시아의 두 눈에서 돌연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아직 어디 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대체 왜 그랬어 왜…….”
“무슨 일인데… 나한테 얘기를 해줘.”
“너무 큰 은혜를 입어 버렸잖아… 차라리 날 죽게 내버려 두지…….”
알렌시아의 말에 아시테르가 정색했다.
“그런 말이 어딨어 알렌시아. 그런 말 하지 마.”
“하지만…….”
“너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정말이야.”
“어떻게 그래…? 네가 내 목숨을 구해 줬는데…!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는데…….”
눈물 짓는 그녀를 바라보며 아시테르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사실 사우스 왕국에서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알렌시아의 태도가 예전과는 사뭇 달라졌다는 것을.
하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꽤 길었다보니 서로 서먹하고 어색한 부분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거기다 그녀가 힘든 시기를 보낼 동안 곁에 있어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컸다.
그래도 아시테르의 마음속에는 알렌시아 한 명 밖에 없었다.
그 마음은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변화는 자신이 아닌 알렌시아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아시테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정말 괜찮아. 그러니까 마음속에 있는 말이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 줘.”
“아시테르 나는… 솔직히 말해서 너와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수 있을 거란 장담을 못하겠어…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네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해… 프로메테 가문의 사람도 아닌 네가… 마력마저 잃어버린 상태라면… 과연 우리 가문에서 너를 인정해 줄까?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사람이야… 나란 여자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이 중요해……?”
아시테르의 말에 알렌시아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중요해… 나는 내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평생을 노력해 왔어. 다른 가문들에 꿀리지 않게, 그들에게 굽히지 않도록 힘을 갖고자 했어. 내가 널 좋아했던 이유도… 그래 아마 너의 뛰어난 마법 실력과 그 당당함에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너를 동경하면서질투도 하고 존경도 했어… 그런데 이제는…….”
알렌시아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토록 거대하고 커 보였던 아시테르가 어째서인지 지금은 한없이 작고 초라해 보였다.
그의 외관이 달라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알렌시아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뿐이었다.
겨우 그 한순간에 이렇게까지 달라 보일 수 있다니…….
알렌시아조차 스스로에게 놀라며 자신에게 환멸을 느낄 정도였다.
“미안해 아시테르… 내게 실망했지… 근데 나는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봐…….”
아시테르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오히려 솔직하게 얘기해 줘서 고마워 알렌시아.”
그의 웃음이 희미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
그 복잡한 심정을 가득 담은 표정을 보며 다급해진 알렌시아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치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내 목숨을 구해준 것까지 외면하겠다는 말은 아니야! 네가 평생 부족하지 않게 지낼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 다른 사람들한테서도…….”
“미안하지만 알렌시아… 나는 네가 없는 것만으로 이미 부족한 삶이야… 그건 다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것 같아…….”
“아…….”
“결국 우리는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얘기지……?”
“친구로는 지낼 수 있지만 함께 미래를 그려나가기엔 어려울 것 같아… 나는 너처럼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을 포기할 자신이 없어… 지금 이 순간에 이런 말을 꺼내서 정말 미안해 아시테르… 하지만 갑자기 생각했던 것은 아니야. 정말로…….”
“우리가 오랜 기간 만나 왔잖아. 오래 만난 사람들은 절대로 갑자기 헤어지지 않아. 그러니까 너의 마음도 이해해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