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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282화 (282/424)

282화 친구

제 9기사단이 전멸했다는 소식은 일파만파 빠르게 퍼졌다.

덕분에 사우스 왕국의 국민들도 작금의 상황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사우스 왕국과 이스트 왕국이 화친을 맺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이런 일이 터지니 정세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 사이 제법 국경 안쪽까지 들어왔던 들장미 마법기사단과 아레나에게도 이 사실이 전해졌다.

“정말로… 9기사단이 전멸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알아본 정보에 의하면 제 9기사단은 적들이 아닌 섬광 마법기사단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우리를 배신한 건가.”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듯합니다. 섬광 마법기사단과 관련된 가문들 모두 홀연히 자취를 감췄습니다.”

“가족들이 해코지 붙잡힐까봐 미리 피신시켰나 보군…….”

아그리나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아레나가 우뚝 서서 사우스 왕국 왕성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9기사단에 대한 소식은 아레나에게도 전해졌다.

그녀는 지금 많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어.”

아레나가 아그리나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아그리나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레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현재, 제 9기사단원들의 목을 갖고 섬광 마법기사단이 사우스 왕국 수도로 입성했다는 소식이 계속해서 전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제 9기사단이 전멸했다는 소식이 사실이라면 들장미 마법기사단도 슬슬 다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그들을 찾기 위해 너무 깊숙하게 들어가게 되면 되레 들장미 마법기사단도 위험해지고 만다.

아그리나가 아레나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아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혼자서도 괜찮으니까 너희들은 돌아가도 돼.”

“진정해 아레나. 지금 상황에서는…….”

“미안하지만 아그리나. 아들의 목숨이 걸린 상황이야… 쉽게 진정이 되질 않아.”

아그리나도 조금은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아레나의 저런 표정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불안함과 초조함을 넘어 아레나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두 눈동자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아레나…….”

“아그리나 단장님!”

그때 먼발치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그녀는 곧장 아그리나 앞에 섰다.

“발견했습니다!”

“뭘 발견했다는 말이냐?”

‘발견’이라는 단어에 가장 먼저 아레나가 반응했다.

그러나 이어서 흘러나온 말은 아레나가 기대했던 말이 아니었다.

“섬광 마법기사단에게 당한 제 9기사단입니다.”

“설마… 그 장소를 찾았다는 말이냐?”

“네! 이 근처를 조사하다가 발견했습니다.”

“크흠… 일단 가보자.”

아그리나가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뒤를 이어 들장미 마법기사단이 따랐다.

아레나 역시도 그들과 함께 움직였다.

기사가 말한 장소는 이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장소였다.

도착한 아그리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시체들의 목이 모두 잘려있다.

거기다 심각하게 훼손되어 알아보기 힘든 시체들도 있었다.

그나마 몇몇 시체들이 입고 있는 갑옷덕분에 왕실기사단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시체는…….”

게벨과 인연이 있는 마법기사 한 명이 한쪽에 앉아 말끝을 흐렸다.

다른 이들과 다른 갑옷을 입고 있는 시체가 있었다.

이들의 대장인 게벨이었다.

그의 몸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목이 잘린 몸뚱이를 보며 아그리나가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처참하군…….”

한때나마 같은 동료였던 자들이 행한 것이 과연 맞나 싶을 정도로 참혹했다.

뜯겨나가고 잘려나간 팔과 다리가 이리저리 뒹굴었다.

“어떻게 할까요…….”

“수습해서 가기엔… 오히려 가족들의 마음에 더 큰 상처만 안겨 줄 것 같구나…….”

“그럼 이곳에서…….”

“그래. 보내 주도록 하자.”

아그리나가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심각하게 훼손된 시체들을 수급해 봤자 였다.

거기다 들장미 마법기사단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 바로 달려온 터라 수급해서 가져갈 장비도 따로 없었다.

그때 아레나가 손을 들어올렸다.

“아레나?”

“내가 할게.”

아레나의 마법이 대지로 퍼졌다.

푸른 불길에 휩싸이는 들판을 바라보며 들장미 마법기사단의 단원들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붉은 불길은 봤어도 푸르게 물든 불길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이건…….”

이전과는 훨씬 달라진 아레나의 마법.

푸른 불길은 모든 것을 따뜻하게 감싸듯 싸늘한 시체들에 온기를 더해 주었다.

불타는 시체들을 바라보며 아레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롤스로체카…….”

그때 그녀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으로 자신의 몸을 숨기고 있던 왕실마도사 한 명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온몸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그가 아레나를 향해 말했다.

“누군가는… 이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아서… 비겁하지만 몸을… 숨겼습니다…….”

왕실마도사의 목소리에 아그리나도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아레나가 황급히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말해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정말로 섬광 마법기사단이 너희들을 배신한 것이냐?”

아그리나의 물음에 왕실마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질끈 깨무는 그의 얼굴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붉게 충혈된 그의 눈가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들은… 속았습니다… 놈들은 우리들을… 단장님을… 모두 죽이고 떠났습니다..”

“정말로 섬광 마법기사단이…….”

“그 개새끼들은…!! 사우스 왕국에 자신들을 팔아넘긴… 놈들입니다!”

사내가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말을 꺼낼수록 그의 숨이 거칠어지는 것이 보였다.

치료 마도사가 다가와 힐링을 걸어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자생의 능력을 잃고 죽어 가는 이에게 치료 마법이 들어먹을 리 없었다.

가만히 그의 얘기를 듣고 있던 아레나가 입을 열었다.

“롤스로체카는 무슨 얘기에요……?”

“롤스로체카와… 제이스쿠스가 우리 부단장님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사내의 말에 아레나가 두 눈을 부릅떴다.

참으로 질긴 악연이었다.

“롤스로체카… 그 작자가 결국 또……!”

아레나의 두 눈에 분노가 서리기 시작했다.

자신과 유미르로도 모자라 이번엔 아시테르까지.

적으로 만나 끝까지 적으로 남게 되는 질긴 인연.

아레나는 결국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몸을 일으킨 그녀가 사우스 왕국쪽을 바라보았다.

“아레나?”

“나는 나의 아들을 구하러 가겠어.”

“하지만 아레나…….”

“내 아들이 롤스로체카와 제이스쿠스를 상대하고 있다잖아. 그 두 놈이 어떤 놈들인지 잊었어?”

“…알겠다. 같이 가지.”

아그리나도 아레나의 곁에 섰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사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아그리나 단장님 옆에 계신 분은…….”

“전 홍련의 마법기사단 단장이셨던 아레나님이십니다.”

“아아… 아시테르의 어머님이시군요…”

아시테르의 이름이 나오자 반사적으로 반응한 아레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사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아드님 덕분에 저희들은 울고 웃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몇 번이나 저희들의 목숨을 구해 주었는데도… 아시테르는 마지막까지 저희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사내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그래도 치유 마법 덕분인지 몸을 조금은 움직일 수 있었다.

그가 아레나를 향해 예를 차렸다.

“모두를 대신해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단원들 모두 밑에서 기다릴 테니… 혹 아시테르를 만나시거든… 조금 천천히… 아니, 아주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라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보고 싶은 마음쯤 얼마든지 참고 나중을 기약해도 되니까요.”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쓰러졌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생기를 되찾은 그가 남긴 말이었다.

숨을 거둔 그를 보며 아레나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이전에도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아레나와 유미르 모두 부단히도 노력했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가도, 이 삶을 아무리 질펀하게 살아도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것이 바로 죽음이었다.

죽음은 바로 곁에서 벌어지던, 멀리서 벌어지던 도무지 적응이란 게 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아레나가 조심히 그의 몸을 뉘여 주었다.

“이 사람을 잘 부탁합니다.”

다른 기사단원에게 그 말을 남겨두고 그녀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그리나도 그 곁에 섰다.

“너는 다시 돌아가야 하잖아.”

“쯧… 너는 그럼 뭐 아니냐?”

“나랑 너랑은 다르지.”

“다를 게 뭐 있냐.”

아그리나의 말에 아레나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아그리나가 웃었다.

“똑같이 동료들을 잃고 똑같이 곁에서 죽음을 지켜봐 왔다. 거기다 너를 두 번이나 잃고 싶지 않다. 아레나.”

“뭐야… 너 이런 오글거리는 말도 할 줄 알았어?”

“시끄러. 원래 세월이 흐르면 사람도 조금은 변하게 마련인 거야.”

“죽을 지도 몰라.”

“우습게보지 마라.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 전장에 나섰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후후 고맙네.”

아그리나가 뒤편을 돌아보았다.

“들장미 마법기사단은 들어라.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돌아가도 좋다. 여기서부터 나는 들장미 마법기사단의 단장이 아닌 크실리아 아그리나로 움직인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단장님!”

“갑자기 그게…….”

당황스러워 하는 그들의 반응에 아그리나가 웃어 버렸다.

“지금부터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을 던져 버리겠다는 얘기다. 나를 비난하고자 한다면 그래도 좋다. 무책임한 자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해도 좋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나는 이 녀석의 친구로 남아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내 평생의 후회를 두 번이나 할 것 같아서 말이다.”

아그리나가 옆에 있는 아레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과거 아레나와 유미르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그녀 또한 후회하고 있었다.

어째서 더 빠르게 도우러가지 못했을까.

어째서 그들과 계속 함께하지 않았을까.

남몰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유미르를 잃은 것도 가슴이 아팠지만, 평생 라이벌처럼 붙어 다니며 친구로 지낸 아레나를 떠나보낸 것도 그녀에겐 큰 슬픔이었다.

세상에 마음 터놓고 지낼 수 있었던 유일한 친구.

그러한 친구의 존재는 인생에서 생각보다 큰 비중을 차지했다.

가족들에게조차 마음속의 말을 터놓지 못했던 그녀에게 유일한 소통창구였던 것이다. 아레나란 존재가.

그것을 그녀의 죽음 뒤에서야 깨달았다.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것만 같은 기분.

그 기분을 또다시 느끼고 싶진 않았다.

“후우… 그렇다면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갑자기 선임 마법기사 중 한 명이 로브를 벗으며 말했다.

오랫동안 아그리나를 따라왔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이십 년 만에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단장님이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을.”

“뭐?”

“늘 우리들을 위해, 가문을 위해 노력하시고 개인적인 선택은 단 한 번도 한 적 없으시질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역사적인 선택을 오늘에서야 하시니… 어떻게 안 따를 수 있겠습니까?”

“나를 따라오겠다는 말이냐?”

“당연한 말씀을. 애초에 저는 들장미 마법기사단이라는 허울뿐인 이름을 동경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동경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죽음이 뒤따른다고 해도 당신을 따를 겁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단원들도 연이어 들장미 마법기사단의 로브를 벗어던졌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여기 있는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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