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조커 헤리퍼
아레나와 들장미 마법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사우스 왕국의 병력들이 나타났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들장미 마법기사단이 앞으로 날아들었다.
그들의 마법에 사우스 왕국군도 속수무책으로 당해 버리고 말았다.
아그리나와 함께 오랫동안 전장을 누벼온 마법기사들이었다.
그 실력들이 결코 가볍지 않다.
그들을 바라보며 아레나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들장미 마법기사단이 이렇게 강했었나?”
“당연한 말을.”
“믿음직하네.”
아레나의 마법이 펼쳐졌다.
푸른 불길이 주변 일대를 휩쓸었다.
그녀의 마법에 당한 사우스 왕국 기사들이 고통스런 비명을 토해 냈다.
푸른 불길을 막아내려 마법을 펼쳐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 사이에 더더욱 성장하신 것 같습니다 아레나님은…….”
“그때도 강했는데 지금은 뭐… 일선에 나선다면 왕국 최강의 마도사가 아닐까 싶구나.”
아그리나도 아레나의 마법을 보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봐 왔던 마법들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단순히 불길이 푸르게 변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마법과는 사뭇 다른 기운이 그녀를 감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사이 아레나는 두 개의 기사단을 격파해 버렸다.
“아시테르, 어디에 있는 것이냐.”
아레나는 아시테르가 어딘가 살아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아시테르가 도망쳤을 만한 곳으로 이동 경로를 바꿨다.
들장미 마법기사단 역시 그녀와 함께 움직였다.
덕분에 사우스 왕국 기사들에게도 이 정보는 빠르게 퍼졌다.
“전 홍련의 단장인 아레나와 아그리나 단장이 함께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겁도 없는 놈들… 감히 우리 왕국의 영토에서……!”
“내가 가겠네.”
잠자코 있던 제이스쿠스가 손을 들었다.
그가 나선다는 말에 다른 이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너무 공을 독차지하려 하심은 아닙니까?”
“후후후후후, 그렇다면 자네들에게 양보하도록 하지. 갈 사람이 있나?”
제이스쿠스가 주변의 사람들을 살폈다.
네이트워나 아일리시는 트럼프가 된지 얼마 안된 이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그리나와 아레나가 어떤 실력을 지니고 있는 줄 모른다.
두 사람이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누군가 슬쩍 손을 들어올렸다.
“내가 먼저 가도록 하지.”
조용히 나선 것은 헤리퍼였다.
사우스 왕국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군단, 조커 군단을 이끌고 있는 인물이었다.
헤리퍼가 나선다는 말에 다른 이들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숨겨진 트럼프 중 한 명으로 조커인 카드였다.
헤리퍼가 들장미 마법기사단을 몰살시키고 그들과 함께 있는 아레나까지 끝낸다면, 그것만큼이나 이스트 왕국의 사기를 깎아먹는 방법은 없다.
헤리퍼가 자신 있는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제이스쿠스, 자네와 롤스로체카가 어째서 과거의 영광들을 두려워하고 조심스러워 하는지 모르겠다만… 그때는 내가 일선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으로 하지.”
“흐흐흐흐, 헤리퍼. 그들을 만만하게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쯧… 이미 테르세우스가 죽은 것만으로도 이스트 왕국은 영광을 잃었다. 테르세우스 말고는 그저 벌레 같은 놈들일 뿐이야. 그러니 기대하고 있으시게.”
헤리퍼가 두 눈을 빛내며 몸을 일으켰다.
곧장 아레나와 들장미 마법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그가 나선 줄도 모르고 아레나와 들장미 마법기사단은 제법 깊숙한 곳까지 와 버리고 말았다.
그동안 이들을 막아섰던 사우스 왕국 기사들은 그야말로 대패 행진 중이었다.
아무도 들장미 마법기사단과 아레나를 막아설 순 없었다.
이들을 보며 사우스 왕국 기사들도 자괴감에 빠지고 있는 중이었다.
“너무 강해…….”
눈앞에 펼쳐진 불바다를 보며 사내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시간을 벌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살아서 벗어나느냐, 벗어나지 못해서 죽느냐의 문제였다.
아레나만 해도 이미 엄청난데 들장미 마법기사단 또한 그 실력이 뛰어났다.
벌써 이들에게만 수천 명의 기사들이 당하고 말았다.
“이럴 수가 있나…….”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사우스 왕국의 피해는 더더욱 커질 것이다.
그때 아레나가 크게 외쳤다.
“나의 아들! 아시테르를 보내라! 그렇게만 한다면 순순히 물러나 주겠다!”
아레나의 외침이 전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녀가 이렇게 대놓고 화려한 전투를 벌이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영리한 아시테르라면 어떻게 해서든 이 소식을 듣고 이쪽으로 합류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벌써 5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 사실이 짐짓 아레나로 하여금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시테르가 살아 있다면 분명 당장 이곳으로 왔을 텐데…….
어째서 아직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단 말인가.
그럼에도 아레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전투를 치르며 계속해서 아시테르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의 아들을 내어 놓지 않으면 마주치는 사우스 왕국군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일종의 경고였다.
다른 때도 아니고 아들의 목숨이 걸린 일에 자비나 자애를 보여줄 아레나가 아니었다.
그녀는 막아서는 적들을 철저히 부숴 버렸다.
덕분에 들장미 마법기사단까지도 은근한 흥분을 하고 있었다.
마치 테르세우스와 함께 싸우는 기분이었다.
압도적인 힘을 가졌던 군단장 테르세우스.
그와 함께라면 언제나 전쟁은 승리로 끝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느낌을 지금 아레나에게서 받고 있었다.
“그나저나… 지금까지도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아시테르와 아레나는 적들의 손에 붙잡혀 있는 걸까요?”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
아그리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는 적진의 한복판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들의 일로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지…….”
“애초에 사우스 왕국은 우리들과 화친을 맺을 생각이 없었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놈들의 간계가 끊이질 않고 있었잖아.”
“거기다 왕실마법기사단이 전멸을 당했다. 이건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야.”
“그래. 이미 전쟁은 놈들이 선포한 거나 다름없다고.”
들장미 마법기사단원들도 대부분 분노하고 있었다.
여기엔 이곳으로 와 목격한 광경들도 한 몫 했다.
사우스 왕국의 귀족들은 이스트 왕국 사람들을 포로로 붙잡아와 노예로 부려먹고 있었다.
그들 모두 사우스 왕국 사람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자들이었다.
누군가는 자업자득이라며 그들을 비난할지 모르나, 아레나와 같은 마법기사들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우리 왕국이 사우스 왕국의 손에 넘어가면… 그거야말로 살아 있는 지옥의 시작이 될지 모른다.”
“그걸 모르고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하는 건지…….”
“그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귀족들이 사라졌으면 하는 거겠지.”
“원래 사람은 감정이 상하면 먼 것보다 가까운 것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법이니까.”
“하기사 가족들이 당하고 본인도 당하면… 멀리 있는 그것들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당장 내 기분부터 풀어 버리고 싶지…….”
잠깐의 여유로 단원들이 저마다의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아레나가 눈을 떴다.
“내 아들이 지금까지도 이곳에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면, 정말로 사우스 왕국의 손에 붙잡힌 걸지도 모르겠어.”
“아니면…….”
아그리나가 말 끝을 흐렸다.
요즘 들어 자꾸 아시테르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함께 있던 알렌시아도 사우스 왕국의 손에 당했다는 소문이었다.
그런 소문까지 돌고 있으니 자연스레 아그리나도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아시테르가 죽은 것은 아닌지…….
“아레나… 만약, 만약 네 아들이 이미 죽은 거라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럼 내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사우스 왕국을 멸망시킬 거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아그리나가 놀라 물었다.
그러자 아레나 역시도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
아그리나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존재가 느껴졌다.
“이건…….”
“드디어 본격적으로 움직인 모양이로군.”
방대한 마력의 파동에 놀라 몸을 일으킨 들장미 마법기사단이 곧바로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이 정도라면 분명 트럼프 중 한 명이 움직인 것이 틀림없다.
“드디어 나타난 모양이네.”
아레나는 손님이 다가오는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이는 칠흑빛 로브를 걸친 초로인이었다.
깊은 안광을 내비친 초로인이 아레나를 바라보았다.
“네년이 바로 그년이로구나.”
“당신은 누구죠?”
“나는 헤리퍼라고 한다.”
“헤리퍼?”
“내 이름을 들어본 적은 없을 거다. 워낙 대놓고 나서길 싫어하는 성격이라.”
“그런데 지금은 왜 이 자리에 있는 겁니까?”
“그야… 네년이 우리 왕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있질 않느냐. 그러니 가르쳐 주러 왔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저는 계속해서 얘기해 왔습니다. 제 아들만 돌려보내 준다면 조용히 물러나겠다고요.”
“쯧… 이미 그 많은 일들을 저지르고, 조용히 물러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제 아들. 아시테르는 어디에 있나요?”
아레나의 물음에 헤리퍼가 크게 웃었다.
그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죽었다.”
“거짓말 치지 말아요.”
“정말이다. 죽었다.”
“제 아들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없어요.”
“후후후. 그 놈을 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병력이 움직였는 줄은 아느냐? 거기다 제이스쿠스와 롤스로체카가 놈과 싸웠다. 아무리 강한 자라고 해도 초위급 최고 경지에 이른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
헤리퍼의 말에 아레나가 잠시 침묵을 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잔뜩 굳은 것을 확인한 헤리퍼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너무 그런 얼굴을 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지금부터 내 친히 너도 네 아들 곁으로 보내 줄 테니.”
“감히…….”
아레나의 양손에 푸른 화염이 만들어졌다.
그것을 확인한 헤리퍼가 지팡이를 내리찍었다.
그가 조커 군단이라 불리는 이유.
헤리퍼가 이끄는 군단은 평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건 그가 마법을 써야만 군단의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두두두두두둑─!
대지를 뚫고 언데드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확인한 아그리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언데드? 네크로맨서인가…….”
그런데 땅을 뚫고 나오는 언데드들의 등급이 상당했다.
저급한 스켈레톤이나 구울 같은 놈들은 잘 보이질 않았다.
언데드 하운드나 듀라한, 심지어 데스나이트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을 모두 소환한 헤리퍼가 크게 광소했다.
“이 몸은 일인군단이라 불리는 마도사!! 정식으로 소개하마. 나는 사우스 왕국의 조커라 불리는 헤리퍼라 한다.”
콰가가가가가각!!!
심연의 어둠에서 새하얀 뼈가 튀어나왔다.
그대한 날개형상을 한 뼈가 움직이자 칠흑빛 마기가 퍼졌다.
“저건……?!”
“이럴 수가… 인간이 저런 걸 소환하는 게 가능했던 겁니까……?”
“본 드래곤…….”
심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새하얀 뼈만 남은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은 온몸에 마기를 두른 채로 크게 포효했다.
언데드화되긴 했지만, 드래곤은 드래곤이었다.
놈의 피어에 순간 들장미 마법기사단의 단원들도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사우스 왕국에 저런 마도사가 있었다니…….”
“네크로맨서와의 싸움…….”
들장미 마법기사단이 각오를 달리 할 때, 아레나가 먼저 움직였다.
화르르르륵──!
푸른 화염이 들불처럼 번져나가 다가오는 언데드들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