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아레나의 분노 (1)
헤리퍼가 쓰러졌다.
이를 목격한 사우스 왕국 군사들의 표정도 덩달아 굳어지고 말았다.
무려 일인군단이라 불리우는 헤리퍼였다.
그런데 겨우 한 개의 마법기사단을 당해 내지 못하고 전사해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름값을 못하는 약자였던 것은 아니다.
아군이 바라보더라도 헤리퍼는 그 이름값을 톡톡히 보여 주었다.
그가 만들어 낸 언데드 군단은 설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웅장함을 보여 주었으며, 언데드 군단의 진격은 지켜보는 이들마저 소름끼칠 정도로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허나 안타깝게도 상대가 너무나 강했다.
헤리퍼라는 인물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강자.
그녀를 바라보며 사우스 왕국의 기사들도 표정을 달리할 수 밖에 없었다.
“테르세우스가 죽었는데… 아직까지도 저런 마도사들이 있는 것인가…….”
“푸른 불꽃이라니…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마법입니다…”
“조금 전 불꽃으로 만들어진 새 봤어? 본 드래곤이랑 접전을 벌일 정도였다고…….”
전투의 의욕을 잃어간다.
지휘관들의 표정은 더욱더 암울했다.
하나를 해치우면 또다른 대단한 존재가 나타나 그 빈자리를 메운다.
“대체 이스트 왕국은 무슨 홍복이 있어서 저런 대단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온단 말이냐…….”
그때 뒤편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렇게 생각할 것 없다. 지금 사우스 왕국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
그는 바로 제이스쿠스와 롤스로체카였다.
아시테르를 따라갔던 롤스로체카가 돌아온 것이다.
두 사람을 보자마자 기사가 머리를 숙였다.
제이스쿠스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들장미 마법기사단과 아레나가 보였다.
“반가운 얼굴이 있군.”
“크음…….”
롤스로체카가 괜히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롤스로체카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정말로 놈들을 죽이고 온 거냐?”
“여자는 놓쳤고 남자는 죽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놈의 시체를 가져오지 않은 거냐?”
“마수들에게 당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마수들에게 먹힌 시체를 가져와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쯧… 어쨌든 믿겠다. 자네가 두 번이나 실수할 리는 없으니까.”
“당연한 말을.”
롤스로체카가 던전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던전에 들어가자마자 롤스로체카와 기사들은 마주하는 마수들을 모조리 쓰러트리며 아시테르와 알렌시아를 찾았다.
그러다 갑자기 던전 게이트가 열리는 것이 보였다.
게이트로 들어가면 던전에서 빠져나갈 순 있지만 아직 롤스로체카는 맡은 바 임무를 다 끝내지 못했다.
두 사람을 죽이거나 붙잡을 때까지 롤스로체카는 돌아갈 수 없었다.
다만 자리를 비운 틈에 두 사람이 던전 게이트를 통해 빠져나갈 수 있으니, 몇몇 병력들을 남겨놔 이곳을 지키게 했다.
그 후로 롤스로체카는 직속 수하들과 함께 두 사람을 찾아다녔다.
그들이 몸을 회복하기 전에 빠르게 승부를 내야 했다.
그러다 몇몇 수하들이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원인 모를 중독에 롤스로체카도 낭패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던전에서 설마 독에 당해 고생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헌데 문제는 롤스로체카도 중독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숨이 가빠지고 온 몸의 마디마디가 끊어질 것처럼 고통이 밀려왔다.
한두 사람 말고는 모두가 중독 증세로 고통스러워 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해도 롤스로체카는 두 사람을 잡기도 전에 독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답을 찾지 못하고 하루하루 죽어 가고 있을 때 그가 나타났다.
아시테르를 본 모두가 경계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독에 중독되어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든 이 때에 아시테르가 나타나다니..
모두가 꼼짝없이 죽는 줄로만 알았다.
멀쩡히 서 있는 수하들로는 아시테르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렇게 죽음의 공포가 눈앞에 드리우고 있을 때 아시테르가 그들에게 제안을 건넸다.
“제가 해독제를 가져다드릴게요. 대신…….”
알렌시아를 더 이상 자신들을 쫓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잠시 고민했던 롤스로체카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려 했다.
적들의 손에 목숨이 구해지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죽어가는 수하들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믿고 따라와준 직속 수하들.
오랜 기간동안 자신의 곁을 지켜온 자들이었다.
자신쯤이야 죽으면 그만이지만 이들은 아니다.
자신의 고집 때문에 모두가 죽게 둘 수 없었다.
결국 롤스로체카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했다.
아시테르는 그때서야 아시밀리온 꽃밭으로 가 꽃을 꺾어 왔다.
롤스로체카는 혹시 모르니 수하 한 명을 그에게 붙여 주었다.
처음 아시테르는 그를 말렸다.
자신과 함께 가면 모든 마력을 잃을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롤스로체카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시테르에게 손을 빌리기는 하지만 혹시나 그가 무슨 장난을 칠 수 있으니 기어코 수하 한 명을 붙여 보낸 것이다.
결과는 롤스로체카도 예상 못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수하는 정말로 모든 마력을 잃고 말았다.
평생 동안 쌓아 온 마력을…….
정확히는 더 이상 마력이 쌓이질 않았다.
기존 마나홀에 있던 마력이 모두 소진되면 그는 평범한 인간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때문에 롤스로체카는 두 눈을 부릅뜨고 아시테르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아시테르가 모든 마력을 잃고 자신들을 구해 준 것이라 볼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까지 한 거지?”
“살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요.”
“이봐… 우리들을 살리면 나중에 어떻게 될지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
“인간이라면… 적어도 은혜를 아는 인간이라면 저와 알렌시아를 쫓지 않겠단 약속 정도는 지키겠죠.”
아시테르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정말 평범한 인간이나 다름 없다.
몸을 회복한 롤스로체카는 고민에 빠졌다.
눈앞에 있는 아시테르는 그야말로 빈 껍데기나 다름 없었다.
모든 마력을 잃었고 살아갈 의지마저 잃어버린 눈빛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글쎄요.”
목소리에 슬픔이 묻어나 있다.
그러고보니 전부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알렌시아 단장은 어디가고 자네만 남은 거지?”
“알렌시아는 돌아갔어요. 이스트 왕국으로…….”
“그럴 리가. 던전 게이트는 나의 수하들이 지키고 있다.”
“이곳 던전의 게이트는 여러 개에요.”
그의 말에 롤스로체카도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롤스로체카가 다시 물었다.
“우리들이 약속을 안 지키면 어쩔 셈이냐?”
“그럼 어쩔 수 없죠.”
“죽음을 달게 받겠다는 말이냐?”
“네.”
아시테르가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눈동자를 본 롤스로체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놈은 알고 있다.
자신이 이놈을 죽이지 않을 것을.
제 아무리 롤스로체카라고 해도 자신과 수하들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을 무정하게 죽일 순 없었다.
이곳은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던전.
그러니 지켜보는 사람들도 없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일까?!
가장 중요한 자신이 알고 있질 않은가!
평생을 그 죄책감의 무게를 달고 살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롤스로체카도 제안을 했다.
“적이지만 자네는 훌륭했다. 나도 쫓으면서 알게 된 거지만… 자네, 도망치면서도 우리 왕국의 국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무척이나 애를 썼더구만.”
“…….”
“기사들과 병사들은 전투에 목숨을 걸고 나온다. 하지만 다른 평범한 국민들은 그렇지 않지. 자네가 정말 마음만 먹었더라면 우리 왕국민들을 학살하면서 도망칠 수도 있었을 거야. 아예 신경쓰지 않았더라면 민가가 있는 곳이나 중소도시들을 이용해 도주 계획을 짤 수 있었을 테지. 하지만 지켜보니 자네와 9기사단은 우리 국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도주로만을 택해 왔어. 그것이 참 마음에 걸렸네.”
“…그 사람들은 아무런 죄가 없으니까요.”
“후후후후 그래. 그게 자네와 우리들의 차이점이기도 하겠지. 어쨌든… 그들을 대신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겠네. 이어 우리들의 목숨을 구해줘서 정말 고맙네.”
롤스로체카가 아시테르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어 그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 왕국으로 오지 않겠나? 마력을 잃었으니… 더 이상 이스트 왕국에서는 환대받지 못할 걸세. 하지만 우리들은 달라.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 사람을 그에 걸맞는 위치에 올려 주지. 자네는 기민하고 영리한 두뇌를 가졌어. 그뿐만 아니라 검술도 할 줄 아니 우리들이 제공하는 마도 공학 무기만 잘 다루게 된다면…….”
“호의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아시테르가 단호하게 거절의 뜻을 밝혔다.
사실은 롤스로체카도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한 마디 더 남겨두고 싶었다.
“돌아가면… 자네가 설 자리는 정말 없을 거야. 이미 우리 왕국에서 공작을 시작했을 테니까. 어쩌면 자네는 이미 왕국의 배신자가 되어있을 지도 모르네.”
“그럴 리 없습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롤스로체카가 몸을 일으켰고, 다른 수하들도 그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들 모두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 준 아시테르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들에게 아시테르는 적이지만 분명 존경할만한 사내였다.
아마 그가 이런 무모한 제안을 한 것도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롤스로체카가 돌아서 홀로 앉아 있는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전과는 다르게 무언가가 빠져 있는 기분이었다.
그에게선 정말로 단 한줌의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생기마저 잃어 가는 기분.
“쯧… 어차피 이대로 둬도 이곳에서 죽겠군..”
롤스로체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시테르를 살려 두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이미 은혜를 갚았다는 생각이었다.
거기다 알렌시아를 더 이상 쫓지 않겠다는 약속도 지켜 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자신들의 궁극적 목표는 아시테르였다.
언노운 마법기사단의 단장.
그 대단한 존재를 세상속에서 지워 버리는 것만으로도 사우스 왕국은 커다란 이득을 보는 일이었다.
롤스로체카가 바라보기에 아시테르는 마력을 모두 잃은 폐인에 불과해졌다.
앞으로 그가 일선에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것도 아시테르의 자리가 이스트 왕국에 남아 있을 때의 얘기지만…….’
당시의 상상을 마친 롤스로체카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마 지금쯤이면 아시테르는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을 지도 모른다.
제이스쿠스에게는 아시테르가 마수에게 뜯겨 먹혔다고 말했지만, 이는 정말로 사실일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있었다.
제이스쿠스와 롤스로체카가 아레나의 앞에 섰다.
아레나도 두 사람을 알아보았다.
“오랜만이로군요.”
“어째 우리들은 늘 전장에서만 보는 것 같군.”
“그럴만한 사이잖아요?”
아레나의 차가운 시선이 롤스로체카에게로 향했다.
“제 아들은 어디에 있죠?”
“자네의 아들?”
“아시테르 말이에요.”
“아시테르가… 그대의 아들이었나?”
“설마 모르고 있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겠죠?”
“정말로 몰랐던 사실이다.”
롤스로체카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이스트 왕국에서도 잘 모르는 사실을 롤스로체카가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이는 제이스쿠스도 마찬가지.
제이스쿠스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이것 참 흥미롭구나.. 그렇다면 우리들이 너를 죽이는데 실패한 대신, 네 아들놈을 죽이는 데엔 성공한 셈인가?”
피식 웃는 제이스쿠스.
그를 바라보던 아레나의 전신에서 마력이 폭발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