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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288화 (288/424)

288화 레티나의 반지

쿠르르르르릉───!!

어비스 던전의 내부.

며칠 전부터 요란한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소리가 들릴 때면 아포칼립스의 문도 요동쳤다.

마치 흥분이라도 하는 듯 문 자체가 굉장한 떨림을 보였다.

그것을 지켜보던 비체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최근 들어서 아포칼립스의 틈새를 통해 나오는 마수들의 수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긴 한 모양이다.”

“최근에 강한 마수들이 대거 이쪽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아포칼립스 문도 상당한 마기를 흡수한 모양입니다.”

“차원의 틈새가 더욱 벌어진 것 같다.”

비체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곳에 있으면서 아포칼립스 문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들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놈이 마침내 준비하고 있는 건가.”

“놈이라고 하시면… 일전에 말씀하셨던…….”

“마수들의 총사령관이라 불리는 놈… 아드라말레이크가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아, 결국 아드라말레이크가…….”

“놈이 이 세계로 넘어오게 만들면 안 된다.”

“예…….”

“아드라말레이크가 끝이 아니야. 분명 놈의 뒤로 더욱 강한 놈들이 있다.”

“아드라말레이크 말고도 더 강한 마수들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연하지. 마수들의 왕이라 불리는 자가 있다. 나도 오래전에 한 번 들은 이름인데… 놈들은 그 자를 ‘위리놈’이라 부르더구나.”

“위리놈…….”

유미르가 위리놈의 이름을 곱씹었다.

비체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마수들의 정점에 있는 자다. 얼마나 강할지는 우리도 알 수 없어. 그러니 녀석이 절대로 이 세계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멸망을 피하지 못할 거다.”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군요…….”

유미르도 한층 심각한 얼굴로 비체의 말을 받았다.

그때 또다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의 틈새가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놈들이 온다.”

“준비하겠습니다.”

비체와 유미르가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비체의 손아귀에 환한 빛무리가 일었다.

채찍처럼 길게 늘어진 빛이 비체의 손에서 자유롭게 움직였다.

유미르는 검을 들어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기아아아아아아──!!!

슈와아아!!!!

강한 바람과 함께 마수들이 튀어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비체와 유미르가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빛의 채찍이 어지러이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고, 환한 달빛이 마수들의 한 가운데로 떨어졌다.

반인반수의 마수들이 유미르를 붙들기 위해 움직였다.

여유롭게 놈들의 공격을 피한 유미르가 검을 휘둘렀다.

달무리가 반월을 그리며 퍼져 나가자, 빛에 닿은 마수들의 몸이 반으로 잘려 나갔다.

채찍을 휘두르던 비체가 뒤편을 응시했다.

우두머리급 마수의 등장.

놈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전장의 분위기는 달라진다.

마기의 진동을 느끼며 비체가 가볍게 날아올랐다.

허공에 떠오른 그가 놈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파바바방──!!!

독수리의 발톱을 닮은 손이 채찍을 붙잡았다.

놈의 시선이 비체에게로 향했다.

한 차례 웃어 보인 녀석이 채찍을 찢어 버렸다.

“호오…….”

영기가 담긴 채찍을 간단하게 찢어 버리다니, 적어도 어줍짢은 녀석은 아니란 얘기였다.

생각을 달리한 비체가 팔을 뻗었다.

그러자 이번엔 빛무리의 형상이 검을 만들어 내었다.

비체가 반보 내딛자, 마치 공간이 접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단숨에 마수와의 거리를 좁혔다.

직선으로 뻗어나 간 검끝이 녀석의 목을 노렸다.

휘릭─!

가까스로 피한 마수가 눈을 부라리며 반격에 나섰다.

갈고리처럼 휜 발톱이 비체를 노렸다.

그 순간 접혀졌던 공간이 펴지는 것처럼 비체가 놈에게서 멀어졌다.

이에 두 눈을 부릅뜬 마수가 갈색 날개를 펼쳐 허공에 날아올랐다.

[잔재주를 부리는 구나 인간!]

아공간이 열리고 놈의 손에 창이 쥐어졌다.

무기를 다루는 마수.

지금까지 몇 있긴 했지만 우두머리급 마수가 그런 적은 없었다.

“무기를 다룰 줄 아는 거냐…….”

비체가 검을 고쳐 잡았다.

그의 시선이 잠깐 유미르쪽으로 향했다.

유미르도 이제는 엄청나게 강해져 수많은 마수들 사이에 둘러 싸여도 걱정이 없었다.

지금도 유미르는 일수에 수십 마리의 마수들을 죽이고 있었다.“안심하고 맡겨도 되겠군.”

그렇다면 비체가 빠르게 우두머리급 마수를 정리하고 도와주면 될 일.

그는 처음부터 전력으로 우두머리급 마수와 부딪혔다.

비체의 묵직한 일격에 마수가 크게 놀랐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수준의 공격이었다.

두 팔이 시큰해져 올 정도로 강렬한 공격.

연이어 이런 공격을 받아 냈다간 필패였다.

마수가 허공에 떠오르며 창을 내질렀다.

창끝에 서린 마기가 비체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이를 본 비체가 탄성을 터트렸다.

“이런 기술까지 쓸 줄 아는 것이냐……?!”

비체의 검이 마기를 갈랐다.

이어 섬전과도 같은 돌격으로 마수의 날개를 찢어 버렸다.

순식간에 허공을 점유할 수 있다는 이점이 사라져 버린 마수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 사이 지척으로 다가온 비체가 무심하게 검을 휘둘렀다.

[잠…….]

무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마수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호기롭게 마수들을 이끌고 온 우두머리급 치고는 상당히 허무한 최후였다.

허나 상대가 비체였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마수들을 상대해온 비체에게 신생 우두머리급 마수는 별다른 적수가 되질 못했다.

유미르도 다른 마수들을 일거에 정리해버렸다.

“후우…”

다행이 상대하기에 까다로운 마수들은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유미르가 순간 아찔한 위화감을 느꼈다.

무언가 마음을 찍어 누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뭐지……?!”

마수들은 모두 죽었다.

우두머리급 마수도 비체가 죽이는 것을 확인했다.

유미르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포칼립스의 문 틈새로 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잠잠했다.

다른 마수들이 튀어나올 준비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한 묵직함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뭐야…….”

키이이이잉──

그 순간 그의 손에서 기이한 소리가 났다.

그때서야 유미르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아… 아아…….”

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

레티나의 반지가 서서히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점차 붉은 색으로 변하던 반지의 색깔이 점점 검게 물들어갔다.

우두머리급 마수를 정리하고 다가온 비체가 그것을 보고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아레나에게 어떤 변고가 생긴 모양이구나…….”

그래도 아직 완전히 까맣게 색깔이 죽은 것이 아니라면 미약하게나마 아레나의 목숨이 붙어 있다는 소리였다.

자그마한 생명력이라도 있는 한 레티나의 반지는 절대로 까맣게 죽지 않는다.

그가 유미르에게 무엇을 말하려던 찰나, 레티나의 반지가 완전히 빛을 잃고 말았다.

찬란한 푸른빛을 늘 뿜어내고 있던 레티나의 반지가 까맣게 죽어 버렸다.

이를 본 유미르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 안 돼… 그럴 리가…….”

이것은 곧 아레나의 죽음을 의미했다.

유미르의 두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그의 시선이 비체에게로 향했다.

“비체님… 아니, 스승님! 이건…….”

“아레나가… 바깥에서 대지의 품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비체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굳은 표정의 비체를 바라보던 유미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리가요… 혹시 레티나의 반지가 잘못 빛을 내는 경우는 없습니까? 살아 있는데… 그… 그렇지! 레티나의 반지가 아레나의 손가락에서 빠져나왔을 수도 있잖아요?!”

“유미르… 지금까지 너는 이곳에서 수도 없이 많은 전투를 치렀다. 그만큼 격렬한 전투를 치르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레티나의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져나가는 경우가 있었느냐?”

없었다.

과거의 기억 모두를 떠올려봐도 레티나의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져나갔던 적은 없었다.

유미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혹시… 적들에게 붙잡히거나 전투 중에 팔을 잃었다면…….”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겠지. 하지만…….”

비체가 뒷말을 삼켰다.

바깥에 있는 이들 중 아레나를 그 정도까지 몰아갈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아레나는 어비스 던전 신수의 축복까지 받은 마도사였다.

유미르도 눈에 띌 정도로 강해졌지만 아레나 역시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의 마법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기에, 레티나 반지의 색깔이 죽은 것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래도 만약 그럴만한 존재가 있다면, 비체의 머릿속에 곧바로 떠오르는 단 한 명의 존재가 있었다.

“그 여인이 나섰다면…….”

마녀숲을 지키는 수호자이자 절대자.

그녀가 나섰다면 충분히 아레나를 그렇게까지 몰아갈 수 있다.

마녀여왕은 이미 마법의 정점에 선 인물이니까.

제 아무리 아레나라고 해도 그녀와 대척점에 섰다면 결코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나 전투를 벌인 지역이 마녀숲이라면 승산은 제로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녀와 아레나가 전투를 벌일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결국에는 마녀여왕도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아레나를…….

“스승님.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아레나가 어떻게 되었는지. 정말로 죽음을 맞이한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그래. 그렇게 하거라.”

비체가 곧바로 허락했다.

이미 유미르의 마음은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뒤숭숭한 채 집중도 못하는 그를 이곳에 데리고 있어봤자 위험하기만 하다.

거기다 만약 정말로 아레나가 잘못된 것이라면 자연스레 아시테르에 대한 걱정도 이어졌다.

“아시테르 녀석도… 걱정되는 구나.”

“예… 사실 아레나도 걱정이지만 아들 녀석도…….”

“다녀 오거라. 이쪽은 내가 맡으마.”

쿠우우우웅──!!

그때 커다란 굉음과 함께 아포칼립스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유미르와 비체의 두 눈이 커다랗게 떠진 것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말도 안 돼…….”

아포칼립스의 문은 오랫동안 봉인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발도르의 정수가 담긴 봉인진으로 그토록 오랜 세월을 막아 두었건만…….

“설마… 봉인진이 약해진 것인가…….”

근래 수많은 마수들이 날뛰면서 봉인진의 정기를 흩으려 놓기라도 한 것일까.

믿을 수 없는 일이 연달아 펼쳐지자 비체도 무거운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스승님……!!”

유미르가 아포칼립스 문 쪽을 가리켰다.

조금 열린 문의 틈사이로 마수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크롸아아아아─!!”

“꺄오오오오오오오오오”

“키이이이익!!! 키이이이이이이익!!!”

마수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을 보며 비체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평생을 바쳐 아포칼립스 문이 열리는 것을 막아왔건만, 결국 문이 열려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아직 문이 완전히 열린 것은 아니란 점이다.

아주 조그마한 틈.

딱 그 정도 틈이 보일 정도로 열렸을 뿐이다.

그때 유미르가 크게 소리쳤다.

“스승님!! 제가 놈들을 막고 있겠습니다! 그 틈에 봉인진을 강화시켜 주십시오!”

“뭣…?! 하지만 유미르 너는…….”

“가족들 일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 일도 그만큼이나 중요한 일 아니겠습니까.”

유미르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붉게 충혈된 그의 눈동자가 마수들을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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