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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289화 (289/424)

289화 유미르의 결단

비체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작금의 상황에 망설일 틈은 없다.

하지만 그는 유미르의 마음을 십분 헤아리고 있었다.

지금 누구보다 이 던전을 뛰쳐나가고 싶은 사람은 유미르일 터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 남는 것을 택했다.

“유미르…….”

비체에게 유미르는 제자이기도 했지만, 어느 때는 아들 같은 녀석이기도 했다.

그런 유미르였기에 그의 마음이 지금 얼마만큼이나 썩어 들어가고 있을지, 비체도 짐작하고 있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비체가 발걸음을 좀 더 빨리 했다.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봉인진을 강화한다면 유미르도 잠시 바깥으로 다녀올 수 있을 터다.

그는 곧바로 봉인진을 컨트롤 할 수 있는 곳에 앉았다.

비체가 작정하고 영기를 풀어내기 시작하니 대지에 그려진 봉인진이 웅혼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작동하기 시작한 봉인진 때문에 아포칼립스의 문이 괴로운 신음을 토해 내듯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삐져나오는 마수들은 어떻게 해서든 바깥으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유미르였다.

콰라라라랑!!!

분노를 가득 담은 달빛이 대기를 갈랐다.

유미르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엄청난 검기가 마수들을 찢어발겼다.

달빛에 닿은 마수들의 몸이 말 그대로 바스라지고 있었다.

유미르는 검을 쥔 채로 눈앞에 보이는 마수들을 모두 죽였다.

이렇게 조금이라도 분노를 덜어낼 수 있다면, 슬픔을 덜어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러고 싶었다.

심지어 눈앞에 있는 것들은 인류를 위협할 마수들이었다.

놈들을 죽이는데 거리낄 것도 없다.

닥치는 대로 휘두르는 유미르의 검에 마수들의 시체가 점점 산을 이루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자신들을 제압하는 유미르를 보며 뛰쳐나오던 마수들도 주춤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것은 한낱 인간이 아닌, 분노를 담은 죽음의 신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려 하면 모두가 죽는다.

지금까지 예외는 없었다.

단 한 마리의 마수도 유미르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너희들이 안 온다면 내가 가도록 하마.”

검을 고쳐 잡은 유미르가 발걸음을 내딛었다.

허공에 달빛이 맺혔다.

보름달처럼 떠오른 달빛이 마수들을 향해 떨어졌다.

슈콰아아앙──!

파라라라라라랑──!!!!

엄청난 폭발과 함께 마수들의 시체가 비산했다.

유미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뒤쪽에 있는 마수들까지 노렸다.

어차피 아포칼립스 문 밖으로 발을 내딛은 마수들은 모두 죽여야 했다.

마수들의 숫자를 줄여 놔야 봉인진도 더더욱 힘을 받을 것이다.

그때 커다란 손이 닫히고 있는 아포칼립스의 문을 붙잡았다.

족히 20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대한 몸체.

산양의 얼굴을 한 마수가 유미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간.]

유미르를 내려다본 마수가 웃었다.

녀석의 황동색 눈동자가 다른 곳으로 향했다.

[발도르의 잔재…….]

아포칼립스의 문을 붙잡고 늘어지는 종족.

놈들 때문에 수천 년 동안 마수들은 이곳으로 넘어오지 못했다.

마수의 두 눈동자가 금세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죽인다.]

녀석이 커다란 울음을 토해 냈다.

그때 놈의 시선 앞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두 눈에 살기를 가득 담은 사내가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달빛과 마기가 부딪혔다.

산양 마수는 당연히 인간이 저만치 멀리 떨어져 나갈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무너졌다.

공격을 버텨 낸 유미르가 곧바로 공격을 이어갔다.

콰라라랑!!!

달빛의 힘이 산양을 찍어눌렀다.

그제서야 산양 마수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째서 네게 디에야의 힘이 깃들어 있는 것이냐.]

달빛의 여신.

그녀의 힘이 눈앞에 인간에게 깃들어 있었다.

그 증거로 쏟아져 내리는 빛이 인간의 힘을 증강시켜 주고 있었다.

산양 마수가 커다란 울음을 토해냈다.

디에야의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알려야 한다…! 상부에 보고해야 해……!]

산양 마수가 뒤편에 있는 마수들을 돌아보았다.

그를 따르는 수하들이었다.

산야 마수의 뜻을 받은 마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디에야의 힘이 개입한 이상 마수들도 생각을 달리 해야 한다.

[과연 그랬군… 하이드라님이 당한 이유가 있었어…….]

처음 하이드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해 들었을 땐 믿을 수가 없었다.

하이드라는 늪지의 마신으로 불리는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마수들에게도 하이드라는 공포 그 자체.

갖고 있는 힘도 어마무시했지만, 하이드라를 죽이는 조건도 상당히 까다로왔다.

그런 하이드라가 인간 세계에 나가 죽음을 당했다.

이 소식은 마수들을 충격에 빠트릴만 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이해가 되었다.

디에야의 힘을 갖고 있는 인간이 있었다면…….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눈앞에 있는 인간은 디에야의 힘을 다루는데 아주 능숙했다.

고대의 힘이 눈앞에서 펼쳐지니 산양 마수도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처음부터 그의 역할은 문이 닫히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

그가 술식을 펼치기도 전에 죽음부터 맞이할 판이었다.

[예상밖이로군…….]

산양 마수의 수하들이 유미르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놈들은 유미르에게 일초지적도 되지 않았다.

가볍게 휘두르는 듯한 검술에 모두 쓸려버리고 있었다.

산양 마수가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계속해서 두드린 끝에 간신히 문을 연 아포칼립스 문이었다.

심지어 언제 열릴지 몰라 자신을 포함한 군단장급 마수들이 연이어 대기를 타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야 마침내 아포칼립스의 문이 열렸다.

작은 틈새만 벌어져도 상관없었다.

굳게 닫혀 있는 것과 작은 틈새가 벌어졌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니까.

그 작은 틈새를 크게 벌리면 될 일이었다.

군단장급 마수들이 들어가고 총사령관인 아드라말레이크가 이곳에 현신한다면 아포칼립스의 문은 완전히 개방될 것이다.

마수들의 노림수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일에 차질이 생겨 버리고 말았다.

바로 유미르의 존재 때문.

유미르 때문에 마수들은 다시 안으로 돌아가게 될 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산양 마수가 거친 울음을 토해 내며 문을 붙잡았다.

녀석은 유미르를 상대하는 것보다 아포칼립스의 문을 개방하는데 주력하기로 택했다.

어차피 자신이 전력을 다해도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목숨을 바치는 대신 맡은 바 임무를 다 해내는 것이 중요했다.

산양 마수가 술식을 펼치려 하자 유미르가 이를 눈치챘다.

녀석의 주위로 마기가 어지러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유미르가 놈을 막기 위해 도약했다.

슈콰아아앙─!!!

검에서 쏘아져나간 달빛이 반월을 그렸다.

마수들이 산양 마수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였다.

“지독한 놈들……!”

이를 악 문 유미르가 눈을 번뜩였다.

마수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유미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다.

그 사이 산양 마수의 술식이 점점 완성되어져 가고 있었다.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는 일.

유미르가 영기를 모아 일수에 날렸다.

콰가가가가가가강──!!!

노도처럼 몰아친 영기가 마수들을 일거에 쓸어버렸다.

그들을 뚫고 유미르가 뛰어올랐다.

녀석이 노리는 것은 산양 마수.

자신을 향해 뛰어드는 유미르를 산양 마수도 보고 있었다.

술식의 완성이 조금 밖에 안 남았다.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상황.

하지만 유미르의 검이 한발 더 빨랐다.

찬란한 빛을 머금은 검날이 산양 마수의 마법진을 파괴했다.

그것을 본 산양 마수가 대노했다.

기에에에에에에에에──!!!

기이한 울음이 울려 퍼졌다.

다 왔는데.

술식이 파괴되어 버린 순간 봉인진에 힘이 붙었다.

봉인진을 억누르고 있던 힘이 풀려 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뒤편에서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 느낌은…….]

잡아라.

산양 마수의 머릿속에 그런 메시지가 들려왔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산양 마수가 두 팔을 뻗어 유미르를 붙잡으려 했다.

점점 아포칼립스의 문이 닫히며 마수들도 덩달아 몰리고 있었다.

그때 강한 마기가 뻗어 나와 아포칼립스의 문을 멈춰 세웠다.

단순한 마기의 양으로만 봉인진의 힘에 맞선 것이다.

“쿨럭!”

봉인진에 힘을 더하던 비체가 핏물을 토해 냈다.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마기의 흐름이었다.

진득하니 퍼지는 마기가 사방에 뻗어 나왔다.

“아드라말레이크……!”

비체도 이 힘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마수들의 총사령관.

그들을 이끄는 자.

그 존재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니, 장확히는 자신보다 유미르를 지켜보고 있었다.

“네놈만큼은 절대로 이곳으로 건너와선 안 된다.”

입술을 질끈 깨문 비체가 영기와 함께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봉인진이 웅장한 빛을 내뿜으며 그 힘을 더했다.

기이이익──

가드드드득!!!!

멈춰 있던 아포칼립스의 문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점 닫히는 아포칼립스 문을 보며 마수들이 절규했다.

얼마 만에 이쪽 세상의 빛을 보았는데, 다시 아포칼립스 문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때 산양 마수가 쓰러졌다.

유미르의 검에 당해 버리고만 것이다.

놈의 목을 끊어 낸 유미르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도 느끼고 있었다.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오던 엄청난 마기.

그 마기의 주인이 자신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자신 있으면 와보라는 도발이었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내뱉던 유미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비체가 봉인진 중앙에 앉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유미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스승님…….”

비체도 봉인진을 통해 이 마기의 주인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 바깥으로 나가려는 마수들을 유미르가 본능적으로 베어 버렸다.

안에서부터 마수들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거기다 산양 마수처럼 상당히 강한 존재들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유미르는 결단을 내리고 말았다.

그가 아포칼립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빌어먹을 놈들… 어째서 그토록 우리 세계를 노리는 것이냐. 너희들의 세계면 충분하잖아……!”

두 눈을 부릅뜬 유미르가 검을 들어올렸다.

그 사이 군단장급 마수 두 마리가 유미르의 앞에 섰다.

저들까지 아포칼립스 문을 나와 어비스 던전을 거닌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 다가올 수 있었다.

유미르가 검을 굳세게 말아 쥐었다.

그러자 순간 따뜻한 기운이 그의 몸을 감싸 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건…….”

달빛의 여신, 디에야를 만났을 때 처음 느꼈던 기운이었다.

그제서야 유미르가 피식 웃었다.

“제 생각을 알고 함께 해주기로 하신 겁니까.”

디에야의 힘을 받고나서도 늘 머릿속 어딘가에 그녀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아레나의 일로 유미르가 잔뜩 분노했을 때 평소와 다르게 달빛의 힘도 상당히 거칠어져 있었다.

아마 디에야가 유미르의 감정에 공감해 주었던 듯 보였다.

그녀가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유미르가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한 차례 웃어 보인 유미르가 검을 들고 아포칼립스 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과감하게 안으로 들어오는 유미르를 보며 마수들이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유미르의 휘황찬란한 검술에 마수들이 혼비백산 흩어지고 말았다.

검끝에 닿으면 모두가 죽는다.

유미르는 달빛을 몸에 두르고 아포칼립스 문 앞을 지켜 섰다.

키야아아아앙──!!

눈앞에 커다란 선을 그은 유미르가 마수들을 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절대로 이 선을 넘지 못할 것이다.”

그 사이 뒤편에 있는 아포칼립스의 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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