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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295화 (295/424)

295화 빗속에 찾아온 손님

지독하게도 비는 내려왔다.

한번 우기가 찾아오면 쉬는 날이 거의 없다더니 정말이었다.

레오니르가 있던 마을을 떠나온 아시테르는 또다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 제법 풍광이 괜찮은 마을에 멈춰 섰다.

광장에서 술병을 들고 하염없이 마시고 있노라면, 제법 인심 있는 사람들이 근처를 지나며 돈을 떨어트리고 갔다.

덥수룩한 수염에 넝마가 되어 헤진 옷.

오랫동안 씻지 않은 몸.

누가봐도 거지꼴이었다.

그럼에도 아시테르는 상관없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 따위 중요치 않으니까.

그는 그저 현재를 마실 뿐이었다.

가만히 있으니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러다 우연히 듣게 되었다.

어머니인 아레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아시테르가 두 눈을 부릅뜨고 그 얘기를 한 사내를 붙잡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누가 죽어요……?”

“에잇 냄새나게! 지금 누구 팔을 잡는 거야?”

“그보다… 그보다 지금 한 말이 정말입니까? 아레나님이 죽었다고요……?”

“뭐야… 당신 이스트 왕국이랑 연관이 있는 사람이야? 소식이 조금 늦긴 했지만… 정말이야. 이제 이스트 왕국은 빛을 잃었어. 사우스 왕국의 손에 완전히 넘어갔다고.”

“아… 아아…….”

아시테르의 반응을 살핀 사내가 혀를 한 번 찼다.

보아하니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딱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본인 아들을 찾으려고 사우스 왕국까지 갔다고 하더라고. 근데 거기서 트럼프놈들에게 당해 죽었다지. 그나저나 정말 굉장했다던데… 오죽하면 사우스 왕국에서는 그 여자를 두고 ‘파멸의 마녀’라 부른다더군… 그 여자 한 명 때문에 수많은 군사들을 잃고 커다란 산까지 통째로 날려 버렸으니까.”

“…….”

“트럼프 중 한 명인 롤스로체카도 그 과정에서 전사했다더군.”

털썩.

아시테르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너무 놀라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술에 절어 사느라 그런 일이 벌어졌던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셨을 줄은…….

아시테르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 아으아…….”

무어라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머나먼 타지에서 들은 어머니의 부고.

심지어 늦어도 너무 늦어 버렸다.

“아…….”

바닥에 쓰러진 아시테르가 울부짖었다.

그가 갑자기 미친놈처럼 울기 시작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쉬쉬하며 자리를 떠나갔다.

그러건 말건 아시테르는 목이 쉴 때까지 울부짖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어머니……!”

자신을 찾기 위해 사우스 왕국까지 찾아왔다가 죽음을 맞이했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자신 때문에 아레나가 죽은 것만 같아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황급하게 술을 마셔 봤지만 별 도움도 되질 않았다.

취기 따윈 오르지도 않았다.

차갑게 내리는 소낙비에 술기운이 모두 씻겨져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대신 씻겨져 내려간 그 자리에 냉소적 슬픔이 자리했다.

커다란 슬픔이 자신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아시테르는 온몸으로 절규하고 또 절규했다.

심지어 비탄에 빠져 울부짖던 그가 혼절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몇날 며칠을 슬퍼하고 또 슬퍼했다.

사랑을 잃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커다란 슬픔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둑해진 하늘에선 아직까지도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힘없이 눈을 뜬 아시테르의 앞에 빗물을 잔뜩 맞은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가 곧 아시테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시테르는 멍한 눈으로 새하얀 손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시야가 흐릿해 여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그을린 손을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내밀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무거운 것인지, 팔을 내미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여인은 말없이 따스한 손길로 그런 아시테르의 손을 어루만져 주었다.

어째서 인진 모른다.

아시테르의 뺨을 타고 다시금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해져 몸이 절로 웅크려졌다.

견딜 수 없는 무언가가 또다시 아시테르를 괴롭혔다.

그것은 무겁고 어두웠으며, 저 깊은 심연에 자리했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떨고 있을 때, 따스한 온기가 몸을 덮었다.

저 깊은 심연까지 추락하던 그의 감정에 자그마한 온기가 닿았다.

모든 것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따뜻함.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느낌이었다.

아시테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토록 사방팔방 찾던 사람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 줄은 몰랐네요…….”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리고 아시테르는 그 목소리를 기억했다.

“린……?”

“늦어서 미안해요. 많이 외롭고 힘들었죠.”

린이 아시테르를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빗물을 잔뜩 맞은 그의 몸이 이토록 따스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마력이 아시테르의 몸에 스며들었다.

“아…….”

아시테르가 그대로 린의 몸에 얼굴을 파묻었다.

멈췄던 눈물이 다시금 흘러내렸다.

온몸으로 슬퍼하는 아시테르를 린은 말없이 토닥여 주었다.

부르르 몸을 떠는 그가 그저 안쓰러울 뿐이었다.

린은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그를 안아 주었을 뿐이다.

따로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안부를 묻지도, 좋은 말을 해주지도 않았다.

그저 안아 주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아시테르에겐 커다란 위안이자 위로였다.

한참을 울던 아시테르가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었다.

“여긴 어떻게…….”

“그게 중요한가요. 이렇게 만났다는 게 중요한 거지.”

린이 고운 손으로 아시테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못 보던 사이 얼굴이 많이도 상해있었다.

비릿한 빗물 냄새 사이로 알코올 향도 난다.

“못 보던 사이에 술도 많이 늘었나 봐요?”

“엄청 늘었죠…….”

“후후후, 의외네요.”

“뭐가요?”

“그냥요. 당신에게 이런 약한 모습도 있었구나 하고.”

린이 아시테르를 다시 한 번 안아 주었다.

넓은 광장에 겨우 두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아시테르는 린의 존재감에 이곳이 모두 채워진 것만 같았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따스한 온정인지 모르겠다.

일부러 사람들을 멀리해온 것도 있지만 자신의 감정에 빠져 다른 것들에 신경쓰지 않았던 탓도 있다.

“일단 일어날까요?”

린이 아시테르를 일으켜 세워 주려 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던 아시테르가 휘청거렸다.

린은 그가 잘 일어설 수 있도록 붙잡아주었다.

그녀의 마력으로 아시테르의 몸은 정상적인 상태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가 휘청거리는 것은 심적인 문제였다.

아직 마음이 몸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아시테르의 손을 붙잡은 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차고 넘쳤던 아시테르의 뜨거운 마력이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마치 텅 비어 버린 도자기처럼, 아시테르의 몸에는 단 한 줌의 마력도 존재하질 않았다.

‘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곧바로 물어보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아시테르가 마력을 모두 잃을 정도의 일이라니…….

헌데 그런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일단의 무리가 다가왔다.

칠흑빛 복장을 한 사내들이 아시테르와 린을 둘러싸고 섰다.

“뭐죠?”

린이 그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들 중 리더격으로 보이는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건 그쪽이 잘 알고 있을 텐데.”

민머리에 기괴한 색감을 얼굴에 새겨넣은 사내가 아시테르를 쳐다보며 말했다.

린도 아시테르를 돌아보았다.

“아는 사람들인가요?”

아시테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도 처음 보는 사내들이었다.

애초에 이곳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말조차 제대로 섞어본 적이 없다.

“후후후후, 그렇게 도망치면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나?”

“……!?”

그제서야 아시테르가 이전의 일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만테스 일행을 손봐 준 것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역시나였다.

“잘도 내 수하들을 건드렸더군.”

“만테스와 아는 자들인가……?”

“그래. 만테스는 제법 쓸모가 있어서 내 직속수하로 기르던 중이었다. 그런데 어떤 술주정뱅이가 그 녀석을 죽였다는 말을 듣고 내가 참을 수가 있어야지. 감히 우리 테사이드의 식구를 건드리다니… 제정신이냐?”

“그렇군… 이상하리만치 그 녀석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 했더니… 역시나 뒤에서 힘을 실어주고 있는 자들이 존재했었구나. 뭐, 대충 예상은 했었다. 언젠가 찾아올 것도 알고 있었고.”

다만 충격적인 소식에 잠시 머릿속에서 잊혀졌을 뿐이다.

이들이 자신을 찾을까봐 레오니르 가족에게서 떠나온 것도 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걱정하지마라. 나는 내 식구를 건드린 놈만 찾아서 물거든.”

사내가 아시테르를 보며 하얀 이를 드러내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린에게까지 미쳤다.

후드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얼굴은 순간 사내의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의 미모가 아니었다.

숨 막힐 듯한 아름다움에 사내가 순간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최상급… 아니 그 이상인가…? 하! 웬 거지놈 하나 죽이러 왔다가 뜻밖에 엄청난 수확을 가져가게 생겼구나.”

저 정도 여자라면 사창가에서도 엄청나게 비싸게 팔릴 터다.

아니, 사창가가 아니라 배부른 귀족들에게 안겨 주어도 괜찮다.

그가 혀를 할짝거리며 야심에 찬 시선을 보였다.

린이 그런 사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쨌든 당신과 좋은 걸로 얽힌 사이들은 아니란 얘기죠……?”

“네.”

“그럼 뭐 상관없겠네요.”

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며 검을 휘둘렀다.

콰앙!!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테사이드 조직원 중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자 놀란 사내가 두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분명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시테르와 린 딱 두 명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낯선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심지어 단칼에 자신의 수하를 죽여 버렸다.

“뭐냐. 어디서 나타난…….”

그 순간 그는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한 명이 아니었다.

수십 명의 사내들이 아시테르와 린을 위시한 채 시립해 있었다.

삼엄한 분위기의 사내들을 보며 테사이드의 대장, 크라이든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쪽에도 마력 좀 쓰는 녀석들이 있지만 눈앞에 있는 자들은 그런 수준들이 아니었다.

“어떻게 할까요. 공주님.”

“모두 처리하세요.”

“알겠습니다.”

린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그녀를 호위하는 쉐도우 호위단.

그들이 움직였다.

겨우 삼류, 잘 쳐줘야 이류 수준에 불과한 테사이드가 이들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쉐도우 호위단은 무자비하게 그들을 학살했다.

“감히 공주님께 불경을 범한 죄. 죽어라.”

크라이든의 앞에 선 쉐도우 호위단의 단원이 검을 휘둘렀다.

살려 달라 말할 틈도 없이 크라이든은 단칼에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쉐도우 호위단이 테사이드를 정리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모든 할 일을 마친 그들은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그사이 린은 아시테르를 데리고 근처 여관으로 향했다.

“일단 비부터 피해요.”

“…고마워요.”

쉐도우 호위단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긴 했지만, 테사이드의 조직원들 중 몇몇은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자들이었다.

저들과 아시테르가 싸웠다면 아마 이기지 못했을 터다.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결국 린이 아시테르의 목숨을 살린 셈이었다.

“고맙긴 뭘요. 당신이 저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잖아요?”

린이 그런 아시테르를 보며 환하게 웃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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