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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296화 (296/424)

296화 이방인

포근한 감촉.

부드러운 이불.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 아찔한 부드러움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고급진 이불 사이로 아시테르가 팔을 움직이자 부드러운 다른 무언가가 만져졌다.

“……?”

놀란 아시테르가 눈을 떴다.

“일어났어요?”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이 아니었구나.

아시테르는 린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꿈인가 싶죠?”

린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요? 딱 표정에 그렇게 써 있었는데.”

“그게 보이나요……?”

“네.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사람이 앞에 있나 싶을 거예요 지금.”

“아…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두 번이나 말하면 입 아프니까. 이번에는 당신 얘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제 얘기요?”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는지… 그리고 어째서…….”

린이 아시테르의 손을 어루만져주며 물었다.

마력을 잃었는지라는 말은 함부로 나오질 않았다.

깊은 사연일테니 선뜻 물어보기가 망설여진 것이다.

아시테르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역시나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아닐까.

“일단은 좀 쉬어요. 그동안 고생 많았잖아요.”

“고생은 무슨… 한심하기 짝이 없었죠……”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아시테르가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금방이라도 슬픔이 흘러내릴 것만 같은 눈망울에 린은 그를 안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몸이 선뜻 움직여지진 않았다.

아시테르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린은 그가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아시테르도 린의 그런 배려를 잘 알았기에 따로 그녀를 불러세우진 않았다.

그렇게 린은 그의 곁을 며칠 동안이나 지켜주었다.

공주의 신분으로 굉장히 바쁠 텐데도 그녀는 내색없이 아시테르를 챙겨 주었다.

그녀가 갖고 온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아시테르가 조심스레 물었다.

“여기 이렇게 계속 있어도 괜찮아요……?”

“안될 것도 없죠?”

“저한테 이렇게 잘 해줘도…. 저는 해드릴게 없는데…….”

“내가 언제 그런 것 바란 적 있나요?”

“그래도…….”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컨디션부터 회복할 생각해요.”

린이 아시테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시테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당신이라는 사람이 좋아서 이렇게 해주는 거예요. 당신에게서 따로 무언가를 원하는 게 아니라구요.”

“아…….”

“당신이 마력을 모두 잃었다는 것. 저도 알고 있어요.”

“역시… 알고 있엇군요…….”

아시테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렇게 자신감을 잃은 아시테르의 모습도 처음이었다.

낯설지만 그럼에도 그가 한심해 보인다거나 우스워 보인다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안쓰러움과 함께 걱정스러운 마음들이 들었다.

“괜찮아요……?”

“저보다는… 아, 그러고보니 아버님은 어떻게…….”

“아버지는 말끔히 다 나으셨어요.”

린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사실 그녀의 아버지가 나은 것도 아레나와 유미르 덕분이었다.

두 사람이 린에게 고대의 보물을 주었기 때문에 그녀의 아버지도 병세를 딛고 일어설 수 있었다.

린은 아직도 아레나의 따뜻했던 품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안겼을 때 묘한 위로를 받았다.

그런 아레나가 사우스 왕국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녀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우스 왕국은 아레나를 파멸의 마녀라 부르며 매도했다.

그녀로 인해 수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다는 말을 전했다.

“세상 누구보다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일입니다. 초월급 마도사의 폭주는…….”

사우스 왕국 관련 인사가 했던 말이었다.

그는 마치 아레나가 정말 악마가 깃든 마녀라도 되는 양 말했지만, 린은 그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직접 봤던 아레나의 모습은 그런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다만 아레나가 무엇 때문에 사우스 왕국의 수많은 군사들을 몰살시켰는지는 린에게도 의문으로 남았다.

그렇게 조금 더 알아보다보니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아레나는 아들인 아시테르를 구하기 위해 사우스 왕국까지 갔던 것이고, 그 과정에서 아시테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분노한 아레나가 아들을 죽인 사우스 왕국군에게 복수를 가한 것이다.

아마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폭주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만큼 아시테르를 사랑했던 거겠지…….”

아레나가 얼마나 아시테르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에 관해 얘기할 때 누구보다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환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아시테르를 바라보던 린이 웃었다.

“당신이 왜 이렇게 잘 생겼나 했더니… 어머님을 닮았던 거로군요.”

“우리 어머니를… 봤어요?”

“네. 지난 번에 우연히.”

“어머니를 봤다니…….”

“아버님도 뵜어요. 웃는 모습이 아주 똑같던걸요?”

린의 말에 아시테르가 놀란 표정을 보였다.

린이 두 사람을 한번에 볼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우연이라도 유미르와 아레나가 린과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그녀가 이스트 왕국에 오는 것이 아니라면…….

“혹시 이스트 왕국에 왔던 적이 있나요?”

“그 이후로 딱 한 번 더 가본 적은 있어요. 그치만 두 분을 이스트 왕국에서 뵀던 건 아니에요.”

“그럼요?”

“어머님, 아버님께서 우연히 우리 왕국 영토를 지나치셨어요. 그때도 당신을 찾으러 가는 길이었는데… 아무튼 지나가는 길에 우리 왕국의 도시가 마수들에게 공격을 당했는데 두 분께서 그 도시를 구해주셨어요.”

“아…….”

유미르와 아레나 다운 행동이었다.

두 분이라면 국적이나 조직에 상관없이 마수들에게 위험이 처하면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것이 두 사람이 말하는 인류애 중 하나였으니까.

린이 눈동자를 굴리며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그러고보니… 저는 당신의 부모님께 도움만 받았네요…….”

“제가 한 건가요. 모두 어머니 아버지가 하신 일이지…….”

“그 덕이 당신에게 가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그런 두 분의 아들이잖아? 아시테르 당신은. 그러니 분명 더더욱 훌륭한 사람이 될 거에요.”

“후후후… 정말 그럴까요?”

“당연하죠! 그리고 마력 좀 잃으면 어때요? 꼭 전장에 앞장서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아요. 원한다면 제가 개인 교사를 붙여 줘서 다른 쪽으로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요!”

린이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진심어린 그녀의 말에 아시테르의 가슴도 순간 몽글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필요한 건 당신의 마음이에요.”

린의 말에 아시테르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을 마주하자 순간 린의 얼굴이 빨개졌다.

다급하게 손사레를 친 그녀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일어서고자 하는 당신의 마음이 필요하다는 얘기였어요…….”

“저는 그냥 고마워서 당신을 쳐다본 건데요…….”

“그럼 그런 표정은 함부로 짓지 말아요! 세상에 오해할라…….”

“오해요……?”

아시테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린은 그런 아시테르가 괘씸해 순간 시선을 돌렸다.

아무렇게나 자란 덥수룩한 수염에 외모도 제대로 가꿔지지 않았는데, 어째서 자신의 눈에는 이렇게나 잘생겨 보이는지 모르겠다.

특히나 저 눈빛과 미소에는 마음이 사르르 녹아 버리는 기분이었다.

웨스트 왕국에서 그토록 잘생겼다고 하는 귀족들을 많이도 만나 봤지만, 딱히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호감이 가는 사람도 막상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저 그런 사람들뿐이다.

그런 와중에 아시테르가 사실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린은 그런 소식이 들려온 이상 곧바로 인력을 투입해 아시테르를 찾았다.

그가 정말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라면…….

어딘가에 있어만 준다면…….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아시테르를 찾아다녔다.

살아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제가 얼마나 당신을 찾아다닌 줄은 알아요?”

“……?”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요.”

린이 아시테르의 손을 꼬옥 쥐며 말했다.

그녀의 보드랍고 새하얀 손을 보며 아시테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잠깐이나마 린 덕분에 웃고 있었지만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니 여전히 괴롭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생각이 레오니르쪽에 미쳤다.

“그러고 보니… 당신도 치유 마도사였잖아요……?”

“네. 그렇죠.”

“그럼 혹시 누구 한 명만 더 치유해 줄 수 있나요?”

“당신이 부탁하는 거라면 얼마든지요.”

린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 이런 오글거리는 말을 하는 자신이 조금 새롭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시테르의 앞에서 이런 말들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가 전사했다는 말이 들려왔을 때, 가장 후회했던 것 중 하나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했던 점이다.

죽고 나면 아무런 얘기도 할 수 없다.

하늘에 대고 아무리 외쳐본들 아시테르에게 그 진심이 전달되기나 할까.

그의 죽음에 큰 슬픔과 후회를 느끼고 나서부터 린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아시테르를 좋아했다.

자기도 모르게 연모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후회하기 싫었다.

아시테르가 조금 부담스러워 할지라도 자신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시테르가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이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이었다.

다른 여자들이라면 몰라도 자신은 그렇게 해줄 수 있다.

일국의 공주인 자신이라면 아시테르에게 부족함 없이 잘 해줄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아시테르의 마음이 과연 어떨지였다.

아직 혼란스럽고 힘든 와중에 자신의 감정만 밀어붙인다면 괜히 아시테르에게 미운털이 박히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그런 마음과는 상반되게 린의 표현은 이전보다 직설적이고 솔직했다.

이런 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시테르는 그저 다행이라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가 린을 데려간 장소는 한 빈민촌의 집이었다.

허름한 이 장소를 보며 린은 생각했다.

‘이곳에서 지냈었구나…….’

한쪽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술병이 놓아져 있었다.

아시테르를 처음 만난 날 보았던 술이었다.

린과 다시 만난 날 이후로도 아시테르는 매일같이 술을 기울였다.

린은 말없이 그의 곁을 지켜 주며 술을 한잔씩 따라줬을 뿐이다.

그녀가 있으니 아시테르의 몸이 상할 리는 없었다.

다만 아시테르가 취기를 원하는 것 같아 가만히 지켜봐 준 것이다.

판자집 앞에서 아시테르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안쪽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에 린이 화들짝 놀랐다.

“설마… 에이…….”

그동안 아시테르가 다른 여인과 함께 살았었고, 간신히 도망쳐 나온 아시테르를 그 여인이 구해주기라도 한 것이라면.

그래서 아시테르가 그녀에게 목숨의 은혜를 갚기 위해…….

린은 한순간에 많은 상상들을 했다.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앳돼 보이는 소녀였다.

“어…? 아저씨……?”

아시테르를 알아본 율리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시선이 뒤편으로 향했다.

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곳까지 린의 얼굴이 알려진 것은 아니라 율리아는 그녀가 공주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오랜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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