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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298화 (298/424)

298화 술 기운

아시테르가 린을 따라온 지도 벌써 한달이 흘렀다.

그동안 아시테르는 많은 것들을 회복할 수 있었다.

다만 마력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린이 아시테르를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기능이 멈춰 버린 마나홀은 다시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억지로 마력을 주입해 본다해도 그것을 붙잡아둘 마나홀이 기능을 못하니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이었다.

“이제 괜찮아요.”

아시테르가 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린은 포기가 되질 않았다.

아시테르가 마력을 소중히 여겼던 만큼 그녀도 아시테르에게 마력을 꼭 되찾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동안 아시테르와 린을 따라왔던 레오니르 남매는 별궁에서 따로 수업을 받고 있었다.

네 사람은 린의 정체가 사실은 공주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반쯤 기절한 상태였다.

“그… 그동안 결례를 범해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그들이 린을 보며 일제히 사과할 때 린은 괜찮다며 웃어 주었다.

그동안 몰래 돌아다닌 지역이 하도 많았기 때문에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한테 실컷 장난친 사람도 있었는 걸.”

린이 뒤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시테르는 린의 정체를 알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레오니르가 아시테르에게 다가와 옆구리를 찔렀다.

“아저씨… 무려 공주님이라고요…! 왜 그렇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거에요?”

“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데…?”

아시테르의 반응에 레오니르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그럼 지금까지 린의 정체를 알고도 그런 편한 행동들을 보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웨스트 왕국에서 공주 린의 존재가 어떠한가?!

국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인물인데다 최근 국왕의 병세까지 고치면서 나날이 그 위상을 더해가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린을 앞에 두고도 저렇게 태연자약할 수 있다니…….

“진짜 여러 의미로 대단하네요…….”

“그치. 나랑 알고 지낸다는 것부터가 이미 대단하다는 것 아닐까?”

린이 레오니르의 말을 받으며 말했다.

아무튼 그날 이후로 레오니르 사남매는 린의 배려 아래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레오니르는 아시테르에게 집중적으로 검술을 배웠으며, 드레베스는 원하는 대로 격투술을 배웠다.

율리아는 그런 쪽보다는 가사일쪽에 관심이 많아 요리나 다른 것들을 가르쳐 주었고 루에테는 약속한대로 마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린이 나서서 도와주니 모든 일은 일사천리였다.

딱 하나, 아시테르와 관련한 것 말고는 말이다.

“당신은 하고 싶은 것 없어요?”

“있다면… 도와줄 생각인가요?”

“물론이죠. 얼마든지 말해봐요.”

“저는… 복수를 하고 싶어요.”

아시테르의 말에 린이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복수라면 역시…….”

“네. 사우스 왕국에게요…….”

“그치만 아시테르… 이스트 왕국은 이미 당신을 버렸어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시테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역시나 아시테르는 모르고 있었다.

그가 없는 동안 이스트 왕국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었는지를…….

결국 린이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간단하게 얘기해 주었다.

아시테르가 사우스 왕국군에게 쫓기다 실종된 이후 아레나도 사우스 왕국에서 전사하고 만다.

여기까지는 아시테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알렌시아가 던전에서 살아 돌아오고 나서부터 조금씩 정세는 바뀌기 시작했다.

섬광 마법기사단의 배신 이후, 이스트 왕국의 몇몇 귀족들이 불만을 품고 사우스 왕국편에 붙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신분제의 약화였다.

왕권을 강화시키며 신분제를 폐지하려던 왕은 귀족들에게 오히려 역풍을 맞고 만다.

노예제도를 없애고 평민과 천민들에게도 기회를 주자는 취지였으나,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빼앗길 것에만 집중했다.

거기다 마법기사단의 단원들도 이제는 평민 출신과 천민 출신들이 많아지면서 그 위세가 다했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발할라 사건 때부터 국가에 망운이 들었다 생각한 몇몇 귀족들은 기회는 이때다 싶어 사우스 왕국에 붙었다.

사우스 왕국은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들을 기용하는 곳이었다.

그것을 굳게 믿은 귀족들이 하나둘 이스트 왕국을 등지고 떠나 버린 것이다.

자리를 굳게 지킨 몇몇 마법기사단은 마지막까지 사우스 왕국과 싸울 뜻을 밝혔으나, 국왕이 이를 저지했다.

미래가 뻔히 보이는 싸움에 괜히 그들을 희생시키지 않고 싶어서였다.

뜻을 관철하는 것은 좋지만 백성들의 생명을 아껴야 하는 것도 왕의 책임이었다.

무엇보다 이스트 왕국은 너무나 지쳐 있었다.

빈번하게 발생하던 전투들에 이어 발할라의 반란, 초대형 마수가 출현해 테르세우스를 비롯한 많은 마법기사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거기다 연이어 터진 전쟁 때문에 이스트 왕국의 국력은 상당히 쇠약해져 있었다.

그러니 더 이상 버티려고만 들다간 완전히 이스트 왕국의 뿌리를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우직한 나무는 강한 바람에 부러지지만, 들판의 억새는 강한 바람에 흔들리지. 결국 뿌리까지 뽑히지 않는다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국왕은 가신들에게 이러한 말을 전했다.

그날 모두가 울음을 참았다.

군단장 히스링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테르세우스가 원하던 세상을 지키지 못한 것에 커다란 죄책감을 느꼈다.

강한 충성심과 우직하기까지한 그였기에 히스링은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칩거에 들어갔다.

바깥과의 연락을 모두 끊은 그였기에 사우스 왕국도 아직까지 히스링 군단장을 꺼내오지 못했다.

거두어들이지 못하면 말려 버리는 것이 그들의 선택.

사우스 왕국은 이스트 왕국의 5대 가문 중 세 곳의 힘을 빼앗았다.

남은 두 곳은 사우스 왕국의 편에 섰기에 그 힘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었다.

완전히 힘을 잃어버린 가문들에는 프로메테 가문, 오르페 가문, 크실리아 가문이 있었다.

모두 이스트 왕국에 대한 엄청난 사랑을 갖고 있는 가문들이었다.

반면 오스카 가문과 레프레시아 가문은 의외로 사우스 왕국과 함께 하는 것을 택했다.

레프레시아 가문은 그렇다쳐도 오스카 가문의 선택은 모두에게도 의외였다.

다만 오스카 가문의 칸은 뜻이 달라 아직까지도 가문과 함께 하고 있지 않다는 후문이었다.

섬광 마법기사단의 단장인 알렌시아와 그녀의 가문도 사우스 왕국과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덕분에 체르도네 가문도 이스트 왕국 내에서 실권을 잡을 수 있는 위치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가문은 칸과 알렌시아를 이어주기로 결정했다.

칸이야 오래 전부터 알렌시아를 마음에 품고 있었기에 이번만큼은 가문의 뜻대로 두었다.

체르도네 가문도 쌍수를 들고 오스카 가문의 뜻을 받아들였다.

능력이 어찌 되었건 아시테르는 천민의 핏줄이 섞인 데다 그의 가문이라 할 수 있는 프로메테 가문도 완전히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헌데 5대 가문 중 태양처럼 떠오르고 있는 오스카 가문을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 알렌시아의 말도 한 몫 했다.

“이제 그는 더이상 마법기사단의 단장이 될 수 없을 거예요.”

능력마저 잃어버린 이상 그들의 눈에 아시테르가 찰리 없었다.

결국 칸과 알렌시아의 혼인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아시테르가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돈 것이 바로 그때쯔음이었다.

더불어 몇몇 귀족들과 왕족들이 아시테르를 낮잡아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능력은 과대 포장된 것이며, 아시테르 또한 사우스 왕국과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거란 음모론도 나왔다.

본래 다른 이들에 관해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진실의 여부따윈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귀족들의 말을 주워담아 다른 사람들에게도 함부로 퍼다 날랐다.

덕분에 시민들도 아시테르를 두고 오해가 쌓여가고 있었다.

사우스 왕국에 붙어 어딘가에서 그들을 위해 일을 하고 있을 거라는 자도 있었고, 이스트 왕국을 버리고 달아난 것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쨌든 이런저런 소문이 떠도는 이후로 프로메테 가문에 대한 이미지도 더더욱 안 좋아져만 갔다.

아시테르가 프로메테 가문과 연고가 있다는 것은 이미 모두 알려진 사실.

아카데미에서부터 아시테르가 프로메테 가문에게 몰래 도움을 받았을 거라 추측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는 반은 사실이었지만 반은 사실이 아닌 얘기였다.

하지만 그게 무엇 중요하랴.

그들은 그저 아시테르의 명성을 낮추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흠집만 내도 알아서 그 흡집은 몸을 부풀려 아시테르의 명성을 격추시킨다.

이러한 이유들과 함께 이스트 왕국의 왕족들과 귀족들은 애써 아시테르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는 다르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당신을 찾으려 한 거죠.”

린이 아시테르를 보며 웃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고 있으면 푸근하다.

그리고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아시테르가 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정말 고마워요… 제가 한심하게 지내는 동안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줄은 몰랐군요…….”

“한심하게 지내다니요… 저라면 그 슬픔을 온전히 다 견뎌내지 못했을 거에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에요. 이렇게 당신이 나타나 곁을 지켜 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더더욱 망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아시테르의 말에 린이 얼굴을 슬쩍 붉혔다.

대체 알고하는 말인지 아니면 모르고 하는 말인지…….

저런 능청스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다 린이 문득 아시테르를 돌아보았다.

“그런 상황인데도 복수를 하겠다는 말이에요?”

“복수는…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저를 위해서지…….”

“흐음… 어머님에 관한 복수인가요……?”

“네. 어머님을 죽인 그들을…….”

“과연 어머님께서 당신이 그러길 바라실까요……?”

린의 말에 아시테르가 할말을 잃고 말았다.

정말 아레나는 자신이 복수를 해주길 바랄까.

복수는 또다시 많은 피를 부를 터였다.

린도 그것을 잘 알았기에 아시테르에게 다시 한 번 환기시킨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아시테르가 복수를 계속해야 한다면 도와줄 생각은 있었다.

쉽진 않겠지만…….

아시테르가 다시 술을 찾았다.

날은 이미 어둑해져 있고 술이 당겼다.

그가 술병을 찾자 린이 말없이 안주를 가져다 주었다.

아시테르를 술병을 따 말없이 술을 마셨고 린은 그 옆을 지켜주었다.

아시테르는 밤하늘에 떠오른 달을 봤다.

어둑하면서도 그을린 것 같은 구름들이 떠있다.

그 사이로 자신의 존재감을 어떻게든 드러내려는 달빛.

그것을 보자 아시테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보니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가만히 앉아 있던 린이 갑자기 술을 마셨다.

그녀가 이렇게 술을 들이켜는 모습은 처음이라 아시테르도 놀라 린을 바라보았다.

술을 쭈욱 들이켠 린이 손으로 입가를 훔쳤다.

린의 맑은 눈동자가 아시테르를 향해 있었다.

“답답해서… 제가 먼저 물어봐야겠어요.”

“무엇을요……?”

“그날 있었던 이야기. 어째서 당신이 모든 마력을 잃었는지를…”

“아…….”

“혹시 사우스 왕국군에 붙잡혔었던 건가요? 그래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 결국 마나홀까지 파괴된 건가요? 그게 아니라면…….”

린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제보니 술이 안 받는 편이었다.

아시테르가 빤히 자신을 바라보니 린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냥은 물어볼 용기가 안나서… 술기운을 조금 빌렸어요…….”

그 모습이 귀여웠다.

그녀를 바라보던 아시테르가 웃었다.

술을 한 잔 들이킨 그가 술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얘기해 줄게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제가 왜 마력을 잃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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