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조력자
얘기를 다 듣고 난 뒤 린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아시테르가 마력을 잃은 데에 그러한 사연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결국… 그분은 당신을…….”
“알렌시아가 원하는 남자가 더 이상 아니게 되어 버린 거겠죠. 그래서 그녀는 떠난 겁니다.”
“너무해요… 고작 마력을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알렌시아가 절 좋아하는 데엔 그게 크게 작용했나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렌시아를 원망하거나 하진 않아요.”
“어째서요…? 저라면 그 여자분이 너무나 원망스러울 것 같은데…….”
“마력을 갖고 마법기사단장이 되었던 것 또한 저의 모습이었으니까요. 알렌시아는 다만 그런 제 모습을 사랑했던 것 뿐이에요.”
“그치만 그건 당신 자체를 바라봐 준 것은 아니잖아요? 정말 당신을 사랑했다면…….”
린이 말끝을 흐렸다.
정말 알렌시아가 아시테르를 사랑했다면 자신을 위해 마력을 모두 잃으면서까지 애써 준 아시테르를 버리지 않았을 거란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다른 사정이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더군다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이었다.
그녀에게도 적용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니 린은 각자의 사랑 방식이 다른 것이고 알렌시아의 사랑은 딱 거기까지인 것이라 생각했다.
해서 뒷말은 아시테르를 위해 생략했다.
지금 누구보다 슬픈 것은 아시테르인데 그런 말까지 해서 그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싶진 않았다.
씁쓸한 미소를 짓는 아시테르를 보며 린은 바보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때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건가요?”
“네.”
아시테르는 고민도 없이 답을 내놓았다.
살짝 가슴이 아파오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을 좋아하나봐요.”
“예……?”
“저는 그 여자분께 감사해야겠네요.”
“왜요……?”
“그분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저한테 당신이 왔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
“아…….”
“덕분에 제게도 기회가 왔네요.”
린이 웃으며 술잔을 들이켰다.
술잔에 비춘 그녀의 입술이 오늘따라 더 붉게 느껴졌다.
희고 고운 손은 고생이란 것은 전혀 모를 것처럼 아름다웠다.
가녀린 린의 손이 술잔을 놓을 때까지 아시테르는 순간 넋을 놓고 그녀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손에 뭐가 묻었나요?”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아시테르가 고개를 돌려 바깥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달빛은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강하게 내리쬐는 빛은 시간이 묻어 있지 않은 채고 물결에 스쳐지나갔다.
린의 거처에는 강물이 흘러 저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의 무언가도 함께 씻겨져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강물에 시간마저도 함께 흘러내려 가는데 비치는 달빛만은 여전히 그 자리였다.
마치 린과 같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시테르가 술잔을 들고 웃었다.
“그렇게 웃는 건 반칙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린이 아시테르를 보며 따라 웃었다.
창가를 통해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차가우면서 시원한 물기가 묻은 강가의 바람.
그 바람 안에 향기로운 내음이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린에게서 나는 향기였다.
아시테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린이 괜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아시테르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혹시 제가 이곳에서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
“이제와서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이에요?”
“혹시 모르잖아요… 혼자 생각하고 싶은데 제가 여기 와서 눈치 없이 떠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이 곁에 있어 줘서 저는 오히려 좋은 생각들을 하고 있어요.”
“좋은 생각들이요?”
“네. 무용한 것들이 좋다는 생각?”
“그건 무슨 말이에요?”
“산과 들, 바람과 강가 이런 것들이 좋다는 말이에요. 당신만큼이나 아름다워요.”
아시테르의 말에 린이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훅 들어오는 말에 볼이 화끈해졌다.
이건 술기운 때문이 아니었다.
린이 눈매를 게슴츠레 뜨며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그는 무언가를 노리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느낀 것을 말해준 것이다.
“하여간…….”
“…왜 그래요?”
“아니에요. 모르면 됐어요. 아닌가… 모르면 안 되는 건가? 아무튼…….”
괜히 샐쭉해진 린이 술잔을 또 한잔 들이켰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그녀에게 안주를 건넸다.
“그렇게 혼자 자꾸 마시면 금방 취해요. 이거라도 먹으면서 드세요.”
“영광인줄 알아요. 저랑 이렇게 독대해서 술도 마시고…….”
“그럼요. 저는 복 받은 사람이에요.”
아시테르의 부드러운 웃음.
이 웃음을 전에도 본 적이 있다.
자연스레 린의 시선에 유미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버님은 괜찮으실까요? 당신만큼이나 괴로우실 텐데…….”
“아버지도…….”
그렇지 않아도 아시테르 역시 유미르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 달빛을 볼 때마다 유미르의 얼굴이 떠오르긴 했다.
하지만 어비스 던전으로 찾아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어비스 던전은 언제 어디서 마수가 나타날지 모른다.
그런 위험한 곳을 마력도 없이 찾아가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게이트를 타고 들어간다 해도 유미르와 비체를 바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만약 만난다고 해도 그들에게 무슨 얘기를 꺼내야 할지 막막하기도 했다.
그래서 찾아가지 못했다.
“아버지를 뵈러 가야겠어요…….”
하지만 지금 누구보다 괴로운 사람은 바로 유미르였을 것이다.
아들은 행방불명에 아내는 죽음을 맞이했으니…….
그동안 너무 자신만 생각하느라 무심했다는 생각이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거라고 하던데…
아버지의 곁을 지켜 주었어야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갔어야 했다.
그런 생각들이 들때쯤 린이 아시테르의 손을 잡아 주었다.
“좋아요. 그럼 함께 가 볼까요?”
“함께요……?”
“네! 같이 가요. 설마 혼자 갈 생각이었어요?”
린이 조금은 서운한 투로 말했다.
아시테르가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혼자 어떻게 해서든 가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랑 같이 가도 괜찮은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예……?”
린은 아시테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별궁에 아시테르와 레오니르 남매를 데려온 덕분에 소문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특히나 아시테르는 현재 수염도 안 깎은 그대로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그를 궁금해 했다.
현재 권력의 중심에 선 린 공주가 출신도, 어디 소속인지도 모를 의문의 사내를 데려왔으니 관심이 쏠릴만했다.
때문에 그냥 아시테르가 걸어가기만 해도 여러 사람들이 수군대기에 바빴다.
다행이 공주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함께 돌아 그 누구도 아시테르에게 함부로 대하진 못했다.
“공주라는 신분 때문에 많은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아…….”
“게다가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해도 많은 것들이 바뀌거나 하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시테르는 린을 보며 마르체니를 떠올렸다.
그녀는 이스트 왕국의 공주이면서도 힘이 없었다.
그녀의 힘이 되고자 제 9기사단이 노력하였으나 마르체니 공주는 여전히 왕권다툼에서는 한발짝 밀려나 있었다.
물론 마르체니 공주가 그런 쪽에 관심이 없는 것도 한 몫 했다.
어쨌든 힘이 없어 마르체니 공주는 왕권다툼의 여파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을 겪어야만 했다.
영토의 외곽으로 밀려나기도 했으며 별궁을 빼앗기기도 했다.
때로는 빈민가에 쫓겨나기도 했으며 원치 않는 혼인까지 강요당했다.
“그러고 보니 제 9기사단은…….”
아시테르가 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레나에 관한 소식은 우연히 들었는데 제 9기사단에 대한 소식은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그의 물음에 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도 아시테르가 제 9기사단과 어떤 인연으로 얽혀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선뜻 입을 열기가 망설여졌다.
그러나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이었다.
“그게… 사실은…….”
린은 결국 제 9기사단이 어떻게 전멸하게 되었는지 아시테르에게 자신이 아는 대로 소상히 전해주었다.
모든 얘기를 다 듣고 난 아시테르가 두 눈을 부릅떴다.
붉게 충혈된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입술을 파르르 떠는 그의 모습을 보며 린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아시테르…….”
“방금 그 얘기… 정말 사실인거죠…?”
“네….”
“그랬군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아시테르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허탈하게 웃었다.
“난 정말 뭘 하고 있었던 건지…….”
고작 사랑을 잃은 아픔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인가.
그게 아니면 그동안의 일들이 모두 거짓 같아 믿을 수 없어 현실을 도피한 것인가.
뭐가 어찌되었건 돌이켜보니 아주 한심한 행동이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다잡아야 한다.
“제 어머니에 9기사단까지… 사우스 왕국…….”
잠시 마음을 다잡은 아시테르가 린을 보며 말했다.
“어비스 던전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좋아요. 저도 준비할게요.”
“아뇨. 당신과 둘이 가기엔 너무나 위험해요. 저 혼자 다녀올게요.”
“그건 걱정 말아요. 저 말고 다른 분도 함께 부를 거예요.”
“예? 하지만 웨스트 왕국의 사람은…….”
“아시테르 당신도 잘 아는 사람이에요.”
린의 말에 아시테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웨스트 왕국 사람들 중 린 말고 아시테르가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다는 말일까.
이 궁금증은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풀렸다.
별궁에 머물고 있는 아시테르의 앞으로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오빠.”
린의 목소리가 청아하고 아름답다면, 이 목소리는 좀 더 고혹적이면서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목소리를 듣자마자 아시테르는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세아츠리스……?”
“오랜만이에요.”
긴 머리를 허리까지 풀어 놓은 세아츠리스가 아시테르를 보며 웃었다.
평소 표정이 없기로 유명한 세아츠리스도 오직 아시테르의 앞에서는 표정 부자가 되었다.
그녀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본 린도 내심 놀라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그녀였다.
헌데 아시테르의 앞에서는 인형이 아닌 사람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시테르가 반가움에 세아츠리스에게 다가갔다.
“세아츠리스! 네가 여긴 어떻게…….”
그가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세아츠리스가 아시테르를 끌어안아 주었다.
“아……?”
린이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건 반칙이 아닌가……?
자신과 다르게 180센티가 넘을 정도로 장신인 세아츠리스는 말 그대로 아시테르를 품에 끌어안았다.
아시테르의 품에 안기는 린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었다.
“고생 많았죠?”
세아츠리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고생은 무슨…….”
“그렇게 말하기엔 얼굴이 많이 수척한데요? 혹시 여기 공주님이 맛있는 것들을 안 내어 주던가요?”
세아츠리스가 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아시테르가 다시 한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린은 과분할 정도로 날 대해 주었어. 덕분에 컨디션도 많이 회복하고 기분도 한결 나아졌어.”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런데 너는 어떻게 여길 알고 온 거야?”
“아시테르 당신이 살아 있을 거라고 말해 준 분이 바로 세아츠리스님이었어요.”
“아…….”
“그래서 함께 좀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어요.”
세아츠리스와 린이 마주보며 웃었다.
이제보니 두 사람 사이에도 꽤나 친분이 생긴 모양이었다.
“얘기는 대충 들었어요. 어비스 던전으로 돌아갈 거라고요?”
“응. 아버지를 좀 뵈어야겠어.”
“알겠어요. 함께 가요.”
“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