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두 여자
세 명의 남녀가 웨스트 왕국 외곽을 지나고 있었다.
두 명의 여성은 얼굴을 가렸고 오직 사내 혼자서만 얼굴을 드러낸 채 거리를 거닐었다.
사내는 앞장 서서 주변 많은 것들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어둠 속에 혼자 있는 것처럼 실컷 방황했건만 세상은 여전했다.
아름다운 경관들을 보며 사내가 감탄에 감탄을 더했다.
“우리 왕국도 이쁘지만 웨스트 왕국도 만만치 않네요.”
“그럼요. 우리 왕국도 날씨가 좋아서 수목이 울창한 곳이 많아요.”
“진짜… 새삼 느껴요.”
아시테르가 주변을 둘러보며 웃었다.
세아츠리스는 그 곁에 서서 슬쩍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자 꽃들이 살랑거리며 춤을 추듯 흔들렸다.
“그나저나… 오빠가 이렇게 되었는데도 혼자 떠나 버리다니… 용서 못하겠는데요.”
“괜찮아. 내가 혼자 던전에서 머물고 싶다고 말한 걸.”
“그래도 저였다면 오빠를 데리고 함께 갔을 거에요. 자기 목숨 살리겠다고 마력까지 잃은 사람한테… 다음에 만나면 가만 두지 않아요…….”
“너도 알렌시아와 친하게 지낼 정도로 좋아하지 않았어? 너무 그러지 말아.”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잘해 줬던 것 뿐이에요.”
세아츠리스가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그 말속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고 평소의 무감정한 말투가 아니었다.
“그랬구나.”
아시테르가 세아츠리스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녀는 자신이 마력을 잃은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오빠가 마력을 갖고 있었다면 제가 가장 먼저 찾았을 거에요.’
마력이 없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는 아시테르의 질문에 세아츠리스가 내놓은 답이었다.
이는 정말이었을 것이다.
아시테르만큼이나 마나와 마력에 민감한 존재가 바로 세아츠리스였으니까.
“감히…….”
그녀는 현재 알렌시아를 떠올리며 분노하고 있었다.
초췌해진 아시테르의 모습을 보고 있을 때면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렇게나 감정을 내비치는 세아츠리스는 또 처음이라 린은 여전히 적응 중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친구야.”
“사랑하고 있어요.”
“응?”
세아츠리스의 말에 아시테르가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세아츠리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몰랐어요?”
“응.. 전혀……?”
“그럼 이제부터 알아 두세요.”
세아츠리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 고혹적인 미소가 그녀의 자태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세아츠리스의 태도를 보며 린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런 린을 세아츠리스의 시선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았지만 일단은 그냥 두기로 했다.
세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근처 여관에 숙박하기로 했다.
사람들은 아시테르 일행이 안으로 들어서도 딱히 관심을 보이진 않았다.
후드로 얼굴을 가린 두 사람을 뒤로 하고 아시테르가 앞장서서 방을 잡았다.
“두 개 방을 주세요.”
“아니요. 하나면 충분해요.”
세아츠리스가 아시테르를 보며 말했다.
그러다 그녀가 린쪽을 돌아보았다.
“아니다, 방이 하나 더 있어야 할까요?”
“저도 괜찮아요. 하나면 충분하죠.”
“그럼 큰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그는 곧바로 5층으로 올라가 가장 큰 방으로 안내했다.
린이 여비를 넉넉하게 챙겨 온 덕분에 가장 큰 방을 잡고 여러 음식들을 시켜도 여유로웠다.
식사를 하는 동안 세 사람은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나누었다.
주로 아시테르와 린이 어떻게 만났는지, 또 아시테르와 세아츠리스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에 관한 얘기였다.
그러다 린과 세아츠리스가 만난 얘기도 함께 흘러나왔다.
그렇게 대화를 즐기던 도중 아시테르는 밤산책을 위해 밖으로 나섰다.
린이 그를 따라나서려 했지만 아시테르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며 훌쩍 나서 버렸다.
“어디 도망가거나 혼자 어비스 던전으로 가진 않을 테니까 안심해요. 그냥 밤공기 좀 마시며 밖을 거닐고 싶어서 그래요.”
“알겠어요. 대신 너무 늦진 말아요.”
“고마워요.”
아시테르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세아츠리스는 이미 아시테르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에 애초에 그를 따라나서겠다 말하지 않았다.
거기다 이미 그녀의 시야에 아시테르가 들어온 이상 두 번이나 그를 놓칠 일은 없었다.
“조심히 다녀와요 오빠.”
“그래. 두 사람 싸우지 말고 잘 얘기 나누고 있어.”
“우리가 애들인가요? 오빠 없다고 싸우게. 그렇죠?”
“그럼요.”
린과 세아츠리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세아츠리스를 보는 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린이 보기에도 세아츠리스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거기다 그녀는 마녀들 중에서도 뛰어나다는 콰트로 중 한 명이었다.
차기 마녀여왕으로도 거론되는 그녀가 곁에 있으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시테르가 바깥으로 나서자마자 세아츠리스가 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요.”
“제가 그렇게 보이던가요?”
“네. 저를 엄청 신경쓰는 것 같던걸요?”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나요. 당신은 아름답기도 하고 마법 실력 또한 뛰어난데. 그래서 부러워요.”
“제가 부럽다고요?”
세아츠리스가 조금은 놀란 투로 말했다.
그녀로서는 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 아시테르 앞에서도 당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잖아요. 거기다 지금은 당신의 마음도 솔직하게 곧바로 말하고… 그런 모습들이 너무나 부러워요.”
“저는 반대로 린님이 부러운 걸요.”
“어째서요……?”
린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아하니 진심으로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에 세아츠리스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아직 모르겠어요? 아시테르 오빠의 마음이 당신에게 향해 있잖아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오랫동안 오빠를 곁에서 지켜 봐와서 그런가… 그냥 알 수 있어요. 느낌이 그래요.”
“흐음…….”
“저도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그렇게 싫진 않아요.”
“그건 다행이네요. 혹시나 세아츠리스님께서 절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알다시피 저는…….”
“마녀숲과 웨스트 왕국 간에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죠.”
세아츠리스가 린이 삼킨 말을 막힘없이 꺼내 버렸다.
린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과거가 있었기에 린은 세아츠리스가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줄로만 알았다.
그녀가 자신을 원망한다고 해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제 부모를 살리고자 수많은 마녀들과 인간들의 목숨을 앗아간 셈이니까.
그러나 세아츠리스는 린을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만약 아시테르 오빠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저 또한 그랬을 거예요. 웨스트 왕국이든 사우스 왕국이든 가리지 않아요. 오빠를 구할 수 있는 약을 갖고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빼앗아 왔을 겁니다.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우리 또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아시테르와 비슷한 말을 하네요.”
세아츠리스가 말없이 웃었다.
그러자 린이 말을 이었다.
“그럼 아시테르가 처음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그때는 왜 가만히 있었나요..?”
“가만히 있었다니요? 사우스 왕국을 지도에서 영원히 지워 버리려 했는데.”
세아츠리스는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다.
“그… 그랬군요…….”
“거짓말 같아요?”
“아뇨 그렇진 않네요… 저라도 그러고 싶었을 것 같으니까..”
린의 말에 이번에는 세아츠리스가 표정을 달리 했다.
온실 속의 화초로 자라온 공주님은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막상 들으니 새삼 느껴졌다.
“그런데 세아츠리스… 그럼 지금도 사우스 왕국을…….”
“이제 상관없어요.”
“어째서요……?”
“아시테르 오빠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했고. 지금 곁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스트 왕국은 지금 사우스 왕국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들이 무슨 삶을 살고 있건 저와는 관계없는 일이에요.”
아시테르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냉정하게 선을 긋는 세아츠리스를 보며 린 또한 그녀가 평범한 사람이 아닌 마녀였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꽤 오랜 기간 이스트 왕국에 머물렀음에도 그녀의 관심에는 여전히 아시테르와 마녀들뿐이었다.
본래 마녀들과 인간들의 사이가 안 좋기도 했으니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아시테르 오빠의 동료들이 그들에게 핍박받는다면… 그때는 고려해 보겠지만, 감히 누가 그럴 수 있겠어요?”
세아츠리스가 아시테르의 동료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한때 언노운 마법기사단으로 명성을 떨치던 자들이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엄청난 실력자들이었기에 감히 그들을 건드릴 순 없었다.
그보다 사실 세아츠리스는 다른 부분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오빠가 많이 의기소침해 있는 것 같아 걱정이이에요.”
“그렇죠…? 아무래도 마력을 잃고 나서 자신감도 많이 잃은 것 같아요.”
린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둘은 이 주제로 한참동안이나 얘기를 나누었다.
아시테르가 자신감부터 찾길 바라는 마음에서부터였다.
그러다보니 린도, 세아츠리스도 서로가 아시테르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세아츠리스가 아쉽다는 투로 먼저 말을 꺼냈다.
“오빠 옆에는 알렌시아 그 여자가 아닌 언니가 있었어야 했는데.”
“언니… 요……?”
“불편한가요? 호칭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을 하곤 막힘없이 ‘언니’라는 호칭을 쓰니, 린도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자 세아츠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들 사이에선 마음에 들거나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언니라는 호칭을 쓴다던데.. 아닌가요?”
“네? 누가 그렇게 알려 주었어요……?”
“인간 세상에서 살던 마녀가…….”
“아… 쿡… 쿡쿡…….”
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제보니 세아츠리스는 언니라는 호칭을 전혀 다른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내심 기분은 좋았다.
조금 전 세아츠리스가 말한 언니의 뜻에 자신이 포함 된다는 얘기였으니까.
“아니요… 마음에 드네요. 그 언니라는 호칭. 앞으로 편하게 불러요.”
“그럴게요.”
“아무튼 고마워요. 제가 마음에 들었다거나… 친해지고 싶다는 얘기잖아요?”
“맞아요.”
세아츠리스가 린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제야 린도 마음속의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언니라면 양보할 수 있어요.”
“양보요? 어떤 것을…….”
“우리 마녀들은 인간들보다 더 오래 사는 것 알고 있죠?”
“네. 그건 저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아마 언니가 늙어서 생을 마감하더라도 저는 살아 있을 거예요.”
“그것도 지금 같은 모습으로 살아 있겠죠…….”
“맞아요. 그리고 그건 아마 아시테르 오빠도 마찬가지일거에요.”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아시테르는 마녀가 아닌데…….”
“그 비슷한 것을 물려받았거든요.”
세아츠리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시테르의 안에 마력이 아닌 다른 것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발도르 왕국의 힘이 아시테르의 안에 깃들어 있는 이상 그 또한 비체처럼 오랜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100년쯤은 양보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린은 세아츠리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니에요. 지금처럼 하면 된다는 얘기였어요.”
그리곤 좋은 생각이 있다며 세아츠리스가 린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전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린이 인상을 썼다.
“정말로 요즘 세상에 그런 상황이 찾아올까요?”
“그럼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듯이, 그런 자들도 세상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법이에요.”
“좋아요.. 그럼 정말 당신의 말대로 그런 상황이 찾아오면 그렇게 하도록 해볼게요. 저 또한 아시테르가 자신감을 회복했으면 좋겠으니까…….”
“일단 자신감부터 회복해야 머리가 맑아질 거예요. 그럼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되겠죠. 지금 아시테르 오빠 스스로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렇게 아시테르가 예전처럼 돌아왔을 때 다른 동료들도 아시테르의 곁으로 부를 생각이었다.
아무튼 두 여자의 꿍꿍이(?)도 모른 체 아시테르는 밤산책에서 돌아와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린과 세아츠리스라는 절세가인들이 곁에 있는데도 그는 피곤한지 금방 곯아떨어졌다.
잠든 그의 모습을 보던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한 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