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환기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아시테르와 린, 세아츠리스는 길을 나섰다.
그들이 머무르는 것을 유심히 본 몇몇 사내들이 함께 움직였다.
세 사람이 숲길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아까 봤지? 그렇게 큰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는 것.”
“게다가 나는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저 여자들의 얼굴도 봤다.”
“어땠는데?”
“말도 안 나올 정도로 아름답다…….”
“크흐흐 돈도 많은데다 예쁘기까지? 두목이 좋아하겠어.”
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몇몇 사내들이 곧 쉬쉬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아주 간단했다.
산적단의 두목이 있는 거처였다.
한편 그런 줄도 모르고 아시테르는 별 생각 없이 숲길을 걷고 있었다.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되었군요.”
세아츠리스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낮게 말했다.
린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눈치를 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을까요?”
“그럼요. 괜찮을 거에요. 여차하면 우리들이 나서도 되니까. 하지만 잊지말아요 린 언니. 지금은 아시테르 오빠의 자신감을 높여 주는 시기에요.”
“물론이에요.”
그때 누군가가 숲길에 나타나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야… 이게 무슨 그림이야?”
가장 앞에 있던 거구의 사내가 거드름을 피우며 하얀 이를 드러내었다.
위협적으로 보이기 위해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
다른 이들의 복장도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휘황찬란한 보석들을 몸에 두른 이들도 있었고, 동물이나 마수들의 가죽으로 옷을 만든 이도 있었다.
개중에는 얼굴이나 팔의 상처들을 자랑스럽게 보이는 자들도 있다.
이들의 정체는 따로 묻지 않아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아시테르가 옅은 미소를 보였다.
세상은 정말 그대로였다.
오랜만에 산적들을 만나니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다만 이번에는 이전과 다르게 마냥 편안한 마음은 아니었다.
“흐음… 돈은 그다지 없어 보이는데…….”
거구의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척 보면 귀티가 나야하는데 전혀 그래보이진 않았다.
눈앞에 있는 사내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데다 머리는 아무렇게나 뻗쳐 있다.
척 봐도 씻고 다니는 녀석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헌데 자세히 보니 입고 있는 옷은 또 제법 고급진 원단의 옷이었다.
뒤에 있는 이들도 제대로 보이진 않아도 고급져 보이는 옷들을 입고 있었다.
수하들이 아주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제 다른 것을 확인해 볼 차례였다.
“거기 너희들.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걸 벗어 봐라.”
후드를 깊게 눌러 쓴 그들을 향해 거구의 사내가 말했다.
그러나 세아츠리스와 린은 요지부동이었다.
두 사람이 움직이질 않자 거구의 사내가 수하들에게 손짓했다.
그들은 과감하게 린과 세아츠리스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아시테르는 당연히 세아츠리스의 마법이 그들을 저지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세아츠리스는 순순히 그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두었다.
이는 린도 마찬가지.
후드를 벗기자 두 사람의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헙?!”
“와…….”
“……!!!”
여기저기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린과 세아츠리스는 분위기는 다르지만, 두 사람 다 엄청난 미인이었다.
마녀들은 본래부터 얼굴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는데, 세아츠리스는 그런 마녀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미모를 갖고 있었다.
이는 린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그녀는 특이하게도 매력적인 흑발을 갖고 있었다.
찰랑거리는 그녀의 머리칼과 기다란 속눈썹.
붉게 물들어 있는 입술과 아름다운 눈동자.
린의 청초한 미모에 모두가 시선을 떼질 못했다.
세아츠리스의 성숙하면서도 고혹적으로 아름다운 외모로 시선을 훔치니, 순간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모르겠을 정도였다.
거구의 사내가 입가에 침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내 짝이 생기는 날인가보다.”
그가 마침내 줄줄 흐르는 침을 닦아내며 말했다.
음심으로 가득한 시선이 세아츠리스의 몸을 훑었다.
이어 거구의 사내가 린을 바라보았다.
거구의 사내가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이를 보며 린도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세아츠리스의 허리를 슬쩍 잡았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당연하죠. 아시테르 오빠의 자신감을 회복시켜주는 프로젝트에요.”
“흐음… 이런 일로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을지…….”
“다행이 상대 중에는 마력을 갖고 있는 이가 두 명 밖에 없어요. 그마저도 희미해서… 뭐, 저 정도면 아시테르 오빠 혼자서도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을 거예요.”
“그래도…….”
“뭐가 걱정이에요? 아시테르 오빠가 다치면 린 언니가 치료해 주면 되잖아요?”
“그건 그렇죠… 하지만 제가 고통까지 못 느끼게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린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세아츠리스가 미소를 보였다.
“아시테르 오빠를 너무 낮춰 보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까지 약한 사람이 아니에요.”
세아츠리스는 아시테르를 가장 가까이서 봐왔기에 알 수 있었다.
그는 마법이 아니더라도 수준급의 검술 실력을 지니고 갖고 있었다.
아시테르의 검술 실력이라면 이 정도 산적들쯤은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세아츠리스?”
마침 아시테르가 세아츠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아츠리스와 린이 순순히 산적들에게 손을 내주었다.
그러자 산적들이 그녀들의 손을 묶었다.
이를 본 아시테르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보다시피 손이 묶여서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요.”
“저도…….”
“아니 그니까… 지금 이게 뭐하는…….”
“구.해.주.세.요. 아시테르 오빠.”
누가 봐도 어색한 말투였다.
평생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없으니, 세아츠리스 본인조차 스스로도 어색할 정도였다.
린도 순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시테르가 슬쩍 눈앞의 산적들을 바라보았다.
숫자는 대략 열다섯 명 정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금방이지만 지금은 모든 마력을 잃은 상태.
세아츠리스와 린이 저런 행동을 보인다는 것은 결국 어떤 이유가 있어서일터다.
‘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말자.’
아시테르가 호흡을 골랐다.
어떤 일이든 시작하기 전에 호흡부터 고르는 것은 그의 습관이었다.
오랜만에 호흡을 가다듬으니 공기가 폐부를 지나 몸 곳곳에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코끝으로 스며드는 공기가 익숙했다.
전운이 감도는 무거우면서도 진득한 공기.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가 전신의 감각을 새로이 느끼는 순간, 눈앞에 있던 산적이 먼저 움직였다.
사내는 린과 세아츠리스처럼 아시테르가 순순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별다른 경계심 없이 손을 내뻗고 있었다.
아시테르가 번개처럼 움직여 그의 손을 흘리고 몸을 돌렸다.
“어라……?”
순간 사내의 몸이 붕 떴다.
이어 그의 시선에 세상이 빙글 돌았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사내가 바닥을 굴렀다.
스릉─
아시테르의 손이 그의 허리춤에 있던 검을 빼앗았다.
날이 무뎌져 있긴 했지만 그런대로 쓸만한 검이었다.
그가 무심히 검을 휘둘러 보았다.
오랜만에 검을 잡았어도 손아귀에 착 감긴다.
레오니르를 가르칠 때도 검을 들어 시범을 보인 적은 없었다.
괜히 검을 들면 옛날 생각들이 날 것 같아서였다.
“아… 그래서…….”
이제야 린과 세아츠리스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자신이 과거를 딛고 일어서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쓸데 없는 걱정을 시켰네. 두 사람에게.”
아시테르가 검을 사선으로 들어올렸다.
햇빛을 받은 검날이 번뜩였다.
그러고 보니 옛생각이 났다.
비체에게 검술을 배우고 아버지인 유미르와 함께 검을 익히던 시절이.
아시테르가 검을 들어 기수식을 취했다.
산적들이 그의 행동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아시테르의 움직임에 웃음이 뚝 끊겨 버리고 말았다.
스걱.
아시테르의 검이 눈앞에 있는 사내를 베어 버렸다.
“이게!!”
“죽어라!!!”
검을 든 두 명의 산적이 일시에 달려들었다.
아시테르는 짧은 보폭으로 이동하며 산적들의 검을 피해 냈다.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그의 팔이 움직였다.
스각!! 촤르르륵!!
검끝에 핏물이 묻었다.
아시테르는 멈추지 않고 몸을 회전시키며 검끝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슈라라락─!!
채재재쟁───!!
상대방의 검으로 다른 곳에서 날아오는 적들의 검을 막았다.
묘기 같은 검솜씨에 산적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린도 아시테르의 검술을 보며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역시…….”
세아츠리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시테르를 보며 웃었다.
혹시나 아시테르가 마력을 잃고 의기소침해져 있어 많은 것들에 자신감을 잃었으면 어쩌나 했는데…….
이제보니 괜한 기우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시테르는 화려한 검술을 선보이며 산적들을 차례차례 쓰러트렸다.
“성격도 여전하고.”
쓰러진 산적들 모두 고통에 신음할 뿐, 목숨을 잃은 자는 없었다.
최소한의 검격으로 적들을 제압한 것이다.
신들린 듯한 아시테르의 검술 솜씨에 산적들의 대장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순식간에 열 명이나 되는 수하들이 쓰러졌다.
남은 수하는 네 명.
자신을 포함하면 총 다섯 명이었다.
그의 시선이 아시테르를 넘어 뒤쪽의 여인들에게로 향했다.
그냥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까짓거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모두 덤벼들어라!!”
이번엔 산적들의 대장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그래도 힘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괴력같은 힘으로 대장의 자리까지 올라갔으니까.
때문에 그는 다른 이들보다 더 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으라차─!”
검이 아시테르를 향해 수직으로 내리쳐졌다.
콰앙!!!
아시테르는 그 자리에 서서 사내의 검을 받아내었다.
안타깝게도 아시테르 역시 숱한 수련으로 몸을 단련해 온 인물이었다.
그는 산적 대장의 검을 받아내며 눈을 번뜩였다.
아시테르의 눈동자를 확인한 산적 대장은 그때서야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느꼈다.
파캉!!
검을 쳐낸 아시테르가 한순간에 거리를 좁혔다.
쏜살같이 파고든 그의 검이 일자로 뻗어나갔다.
“헙?!”
휘릭─!
그래도 대장의 자리까지 허투루 올라간 것은 아닌지, 산적들의 대장이 아시테르의 검격을 처음으로 피해 냈다.
그 틈에 다른 수하들이 아시테르를 향해 덤벼들었다.
“어딜.”
세아츠리스가 마력을 사용하자 대지에서 가시덤불이 올라와 그들을 붙잡았다.
마법이 서포트 해준 것을 확인한 아시테르가 미소를 보였다.
푸슉!
그 순간 어떻게든 기어 들어온 검이 아시테르의 어깨를 베었다.
“……!”
뜨거운 고통이 어깻죽지에서부터 퍼졌다.
아시테르는 고통에 움츠러들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핏물이 튀고 사내가 자신의 팔을 움켜쥐며 뒤로 자빠졌다.
아시테르가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방심했다.
전에는 감이 더욱 날카롭고 예민하게 살아 있어서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 사이 무뎌진 모양이다.
그때 따스한 기운이 그의 어깨를 감쌌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린의 마법인 걸 알 수 있었다.
아시테르의 시선이 눈앞에 있는 산적 대장에게로 꽂혔다.
“더 해볼 겁니까?”
“크… 크흐음…….”
산적 대장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하들이 모두 쓰러져 있었다.
아직 거처에 더 많은 수하들이 있었지만, 그들까지 데려왔다고 한들 결과가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마법사까지 껴있었을 줄이야…….”
그의 시선이 뒤편에 있는 세아츠리스에게로 꽂혔다.
산적 대장은 결국 수하들을 이끌고 산채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아시테르도 굳이 그들의 목숨을 취하려는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두었다.
그보다는 서둘러 어비스 던전으로 가야겠다는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