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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303화 (303/424)

303화 영기를 깨우다

아시테르는 이후 비체에게 어비스 던전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들었다.

유미르가 쏟아지는 마수들을 막기 위해 홀로 아포칼립스 문에 들어갔던 일, 그리고 약해진 봉인마법진을 강화하기 위해 비체가 자신의 근원을 불어넣었다는 것.

때문에 비체의 몸이 야위고 얼굴은 수척해져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그런 선택을…….”

“유미르는 당장 네게 달려가고 싶어 했다. 레티나의 반지가 색을 잃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 하면서도… 책임을 다하기 위해 끝내 그런 선택을 한 게다.”

“…네.”

“아버지가 원망스러우냐?”

“아니요. 원망스럽기는요… 가장 괴로운 사람은 아버지였을 텐데… 제가 곁에 있어드리지 못해서 오히려 죄송한 마음이에요.”

아시테르가 멀리 보이는 아포칼립스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굳게 닫힌 아포칼립스 문은 미동조차 없었다.

다른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버지답네요. 역시나 멋진 아버지라니까요.”

“나는… 유미르가 저 건너편에서 살아 있을 거라 믿는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아버지는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래… 너도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로구나.”

비체가 한쪽에 놓아둔 술을 따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술병을 들어 아시테르에게도 권했다.

“오랜만에 이 할애비랑 술이라도 한 잔 할 테냐?”

“좋아요.”

아시테르는 잔을 들어 순순히 비체가 따라 주는 술을 마셨다.

비체는 아시테르뿐만 아니라 곁에 있는 린과 세아츠리스에게도 술을 권했다.

“참, 재미난 조합이로구나. 우리 아시테르 옆에 이런 귀한 사람들이라니…….”

“네?”

“너는 마녀로구나. 거기다 마녀여왕의 힘이 깃들어 있어. 여왕의 총애를 받는 모양이지?”

“그걸 어떻게…….”

“마녀랑은 특별한 인연으로 이어져 있어서 말이다.”

비체가 세아츠리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기 마녀여왕으로 지목될만한 재목이었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깊이가 남다르다.

그리고 또 하나 특이한 존재는 바로 린이었다.

“좋은 마력을 타고났구나.”

“아, 네에…….”

“다른 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마력이라… 그것은 아마 네 심성에 따라 좋은 방향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겠지.”

비체의 말에 린이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말하지 않은 것을 비체는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고맙구나. 그 귀중한 힘을 좋은 곳에 사용해 주어서.”

“네…….”

린이 고개를 푹 숙이며 답했다.

마치 꽁꽁 감춰 뒀던 비밀을 간파 당한 기분이었다.

비체가 돌연 아시테르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악……!”

“요 녀석이… 이렇게나 좋은 사람들을 두고 그런 미련한 짓들을 했던 게냐?”

말투는 가시가 돋친 것 같아도 배어 있는 목소리엔 정이 뚝뚝 묻어나 있다.

이것만 보아도 린과 세아츠리스는 비체가 아시테르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아시테르를 보는 비체의 시선은 따스하고 온화했다.

애지중지하는 금지옥엽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죄송해요. 반성하고 있어요 할아버지.”

“당연히 그래야지. 그보다… 너는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느냐?”

“우선은…….”

아시테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힘을 되찾으면 하고 싶은 것…….

우선 복수를 하고 싶었다.

제 9기사단과 어머니의 복수를…….

그 다음에는…….

아시테르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가자 비체가 다시 한번 딱밤을 날렸다.

“생각이 많구나 요놈.”

“네… 아직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고 있나 봐요.”

“아레나를 죽인 놈들은… 누군지 알고 있는 거냐?”

“네.”

“어머니의 복수를 꾀할 생각이냐?”

“…….”

아시테르가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비체가 무거운 얼굴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을 읽은 아시테르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제게 가족과도 같은 사람들을 잃었어요. 그들 손에… 지금은 제게 마수들보다도 더 원망스러운 사람들입니다…….”

“흐음… 복수는 복수를 낳는 법이다. 알고 있느냐?”

“네. 알고 있어요…….”

“그 굴레는 결코 쉽게 깨어지지 않는 종류의 것이고.”

아시테르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비체가 피식 웃었다.

“제 부모를 죽인 자를 용서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다만 한 가지 네게 해주고 싶은 말은… 복수 같은 원념에 스스로가 먹히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네… 헤아려 주셔서 감사해요.”

“녀석아. 나는 신과 같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이 할애비 또한 너와 같은 마음이다. 처음 아시레나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땐, 당장이라도 어비스 던전을 나가 아레나를 죽인 자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비체가 아시테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시테르는 비체가 말하지 않아도 그가 삼킨 뒷말을 헤아릴 수 있었다.

“나는 지금부터 네가 갖고 있는 발도르의 힘을 깨워줄 것이다. 그 힘은 온전히 너의 것이고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지 선택하는 것 또한 온전히 너의 몫이다.”

“네.”

“너는 창공의 신에게 선택받은 아이. 너의 모든 선택이 조금 돌아가게 되더라도 결국 옳은 길로 나아가는 길임을 바랄 뿐이다.”

비체의 시선이 린과 세아츠리스에게로 향했다.

마치 두 사람에게도 아시테르가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하는 듯 했다.

비체의 시선을 읽은 린과 세아츠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구나.”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한 비체가 미소를 보였다.

이어 그가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시작해보자꾸나. 너의 진정한 힘을 일깨우는 게다.”

비체는 곧바로 아시테르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영기를 깨울 준비를 했다.

유미르와 다르게 아시테르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영기와 함께 해 왔다.

그러니 본능적으로 영기와도 친숙한 상태였다.

다만 영기는 마력과 다르게 주인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마력을 억지로 밀어내는 대신 자신을 봉인시키며 공존을 택했다.

그 봉인된 영기를 다시 끌어올리려는 것이다.

그 시작은 명상에서부터였다.

마력에 익숙한 몸이 이제는 영기를 느껴야 했다.

익숙한 감각을 버리고 새로운 감각을 익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실행해 왔던 것을 새삼 의식하고 인식하는 것이었다.

“서서히 네 몸 안의 영기를 끌어올려 주마. 그것을 섬세하게 느껴보도록 해라.”

아시테르가 앉아 있는 곳은 비체가 만든 진 위였다.

비체가 아시테르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가져갔다.

그의 손에서 영기가 흘러나왔다.

비체의 영기가 아시테르의 몸에 흘러들어오니 아시테르의 몸 안에 있던 영기도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웅크려 있던 몸을 조금씩 움직이듯.

말라붙었던 대지에 균열이 일 듯.

아시테르의 몸 안에 잠들어 있던 영기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비체의 영기에 반응하기 시작한 영기가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바깥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몸 속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에 아시테르도 몸을 움찔하기 시작했다.

마력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몸 안에 흐르는 영기를 느끼며 아시테르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천천히 소량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한 영기가 아시테르의 몸에 조금씩 스며들 듯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번져나가는 영기를 느끼며 아시테르가 미소를 보였다.

시원하면서도 청량한 기분.

부족했던 무언가가 메워지는 기분이었다.

비어있던 곳이 조금씩 들어차기 시작하니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비체와 아시테르를 바라보던 세아츠리스도 덩달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행이 잘 이루어지고 있나 봐요.”

“정말 다행이에요. 그럼 아시테르는 다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걸까요?”

린이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아직도 화염을 두르고 있던 아시테르의 모습을 잊지 못했다.

그가 있는 곳은 곧 화염이 넘실거리며 춤을 췄다.

전장을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면서도 아시테르는 홀로 거침없이 움직였다.

그가 지나가는 곳은 곧 불길로 변했으며 아시테르가 나타나는 곳엔 불꽃이 소낙비가 되어 내렸다.

그런 광경들을 눈앞에서 목격했다보니 쉽게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기억이 되었다.

하지만 세아츠리스는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마 어려울 거에요. 마력과 영기는 다르다고 해요.”

“아… 마력을 대신해 사용할 수 있는 기운이 아닌가보군요…….”

“네. 비슷하면서도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할아버님께서 말씀해 주시더군요.”

“할아버님……?”

“아시테르 오빠에게 할아버지인 분이시니… 저희에게도 할아버님이 아닐까요?”

세아츠리스가 뭐가 문제냐는 듯 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만 린은 무언가 쑥쓰러워 얼굴을 붉혔다.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닌데 벌써 그렇게 부르는 것은…….”

“언니는 싫으면 그만 둬요. 저는 편하게 부를 생각이니까요.”

“싫다곤 안했어요.”

입술을 샐쭉 내민 린을 보며 세아츠리스가 웃었다.

가만 보면 귀여운 매력도 있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비체와 아시테르는 계속해서 영기를 일깨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생각보다 엄청난 집중을 요하기 때문에 비체는 입 한번 열지 않고 호흡을 길게 가져갔다.

그가 이끄는 대로 영기가 흐르며 아시테르의 몸을 일깨웠다.

슈와아아──!!

아시테르의 전신에서 녹색으로 된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녹색 액체는 곧 산화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몸 안에 있는 독소들을 영기가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 아시테르의 몸 내부에 있는 상처들을 영기가 감싸 안기 시작했다.

“……!”

곧이어 영기가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웅크렸던 몸을 일으키듯, 강하게 밀려오는 영기의 기운에 아시테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집중해라. 진짜는 이제부터다.”

비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아시테르는 함부로 답할 수 없었다.

입을 여는 순간 이 강렬한 기운이 폭발하듯 바깥으로 터져나갈 것 같았다.

영기가 본격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하니 온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끄으읍……!”

아시테르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통을 참아냈다.

그가 괴로워하기 시작하자 린과 세아츠리스도 동시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시테르의 두 팔이 경련을 일으켰다.

린이 안절부절하며 그를 지켜봤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참아요. 우리가 개입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셨잖아요.”

“나도 알아요… 그런데…….”

아시테르가 저토록 신음을 흘리며 괴로워하고 있으니, 린도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마음이야 당장 곁으로 달려가 그의 고통을 없애 주고 싶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움직이질 않던 영기를 일깨우다보니 그 고통이 극심할 거란 비체의 말이 떠올랐다.

그 고통을 감내하고 견뎌야 낡은 그릇이 곧 새로운 그릇으로 바뀔 거란 말이 있었다.

비체는 그것을 탈피라 말했다.

슈와아아아아아아─!!!!!!!

아시테르의 전신에서 곧 엄청난 기운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비체의 머리칼이 강한 바람에 나부꼈다.

옷이 거칠게 펄럭임에도 그는 부동의 자세로 아시테르의 몸을 만졌다.

영기가 거쳐야 하는 길을 그가 계속해서 짚어 주었다.

창공의 신이 불어넣어 준 기운이었다.

그렇다보니 이제껏 비체가 봐왔던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기운이었다.

“허어…….”

모든 길을 다 짚어 주었을 때 비체가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아시테르의 몸에서 흘러나온 독소 때문에 코끝을 찌르는 냄새도 고약했다.

하지만 이제 괜찮다.

아시테르의 몸 안에 영기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털썩.

모든 것이 끝나자 아시테르도 힘없이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녀석… 고생했다. 푹 쉬거라.”

비체가 쓰러진 아시테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바닥에 누운 아시테르의 표정은 전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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