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세상밖으로
비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홀로 봉인진에 올라섰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그는 곧 깊은 영면에 빠져들었다.
마치 봉인진과 하나가 된 것처럼, 비체의 몸에 빛으로 된 줄들이 이어졌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시테르가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평온한 표정으로 봉인진과 하나된 비체를 보며 아시테르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꼭 다시 돌아올게요 할아버지… 그때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시테르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늘 존재 했던 아포칼립스 문의 틈새.
그 틈새가 점점 메워지고 있었다.
비체의 생명력으로 그 틈새를 메운 것이다.
이제 당분간은 틈새 사이로 마수들이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내게 말해 준 시간은 3년. 그 3년의 시간을 허투루 보내선 안 돼.”
아시테르가 마음을 다잡으며 몸을 돌렸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린과 세아츠리스가 아시테르를 보며 웃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도울게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오빠.”
“다들 고마워.”
아시테르를 따라 린과 세아츠리스도 움직였다.
3개월이 넘는 시간을 어비스 던전에서 보낸 탓에 세아츠리스는 잠시 마녀숲으로 돌아가 있기로 했다.
마녀숲에도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마녀들이 그녀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제가 다시 찾아갈게요.”
“알겠어.”
“그동안 잘 지내고 있어야 해요?”
“당연하지. 이제 다시 그런 못난 모습으로 돌아가진 않아.”
“좋아요. 잘 해낼 거라고 믿어요. 일단은 웨스트 왕국에서 자리부터 잡으려는 것. 맞죠?”
“응. 그렇게 시작하려고.”
아시테르의 곁에는 린이 있었다.
그녀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옆에 있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요.”
“언니가 옆에 있다면 안심이죠. 일단 저는 잠시 돌아가 볼게요.”
세아츠리스는 짧은 인사 후 마녀숲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떠나고 아시테르와 린은 다시 웨스트 왕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린은 그 곁에 서서 새삼 아시테르를 올려다보았다.
지난날들이 마냥 꿈 같기도 했다.
어렵게 아시테르를 찾아 그와 함께 던전에서 머물렀던 그 시간들.
아시테르가 어렸을 때부터 자라온 곳이라 신기하기도 했고 괜히 정이 가기도 한 장소였다.
누군가 들었다면 습하고 음침하기까지 한 어비스 던전이 뭐가 좋냐고 물었겠지만, 린에게는 아시테르의 유년 시절이 자리한 정감 있는 장소가 되었다.
아시테르가 홀로 수련을 하고 있을 때면 비체가 문득 다가와 어렸을 때 아시테르가 어땠는지를 말해 주었다.
워낙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 아시테르였기에 비체를 통해 호기심을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아시테르의 어머니였던 아레나와 아버지인 유미르의 얘기들도 들을 수 있었다.
피워진 모닥불 앞에 앉아 술잔을 들고 있노라면 비체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 것처럼 다양한 얘기들을 해주었다.
자신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면 아시테르도 쑥쓰러워 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것도 추억이었는지 딱히 비체를 말리진 않았다.
중간 중간 린과 세아츠리스도 자신들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비밀 얘기를 하듯 많은 얘기들을 나누니, 그동안의 정분이 더더욱 두터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 느낌은 린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아시테르도 이전과 달리 린을 대하는데 훨씬 편해져 있었다.
“우선 제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뭐라고 했죠?”
“아!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선 웨스트 왕국에서도 당신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해요. 원한다면 제가 추천인이 되어 시험을 치르지 않고 곧바로 요직에 앉을 수 있겠지만…….”
린이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아시테르는 그런 방법은 원하지 않을 터였다.
역시나 아시테르는 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도움을 받을 수는 없어요.”
“마냥 도와주는 것도 아닌데…….”
“네?”
“당신이 요직에 앉으면 저를 도와줄 거잖아요?”
“그건 그렇죠……?”
“그럼 내가 내 인재를 채용하는 셈이니까. 아주 마냥 도와주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후후 그것도 그렇네요. 하지만 린 당신이 앉혔다는 꼬리표가 붙겠죠. 그것보다는 정당하게 시험을 치러서 곧바로 위로 올라가 보일게요.”
아시테르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린이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어차피 제가 당신을 요직에 앉히지 않더라도 아시테르 당신의 힘이라면 충분히 높은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을 거예요. 어쩌면 로얄나이츠의 인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웨스트 왕국 최강의 10인이라던 그 로얄나이츠 말하는 거죠?”
“네. 왕국 내 최고의 강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최정예 기사단이에요.”
“금방 로얄나이츠의 일원이 되어 보일게요.”
아시테르가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는 힘이 실려 있어 린도 믿음이 갔다.
두 사람은 그 길로 곧장 웨스트 왕국으로 향했다.
아시테르는 떠나기 전 잠시 이스트 왕국쪽을 바라보았다.
동료들이 떠오르긴 했지만 일단은 웨스트 왕국에서 자리를 잡는 것이 먼저였다.
그 뒤에 그들을 불러도 늦지 않다.
아시테르가 생각하기에 언노운 마법기사단원들이라면 어디에 있던 자신이 부르면 달려와 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누군가 아시테르와 린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아시테르가 놀란 눈을 보였다.
“가이우스?”
“이곳에 계셨군요.”
“어떻게 여기에…….”
“세아츠리스가 말해 주었습니다.”“세아츠리스가요……?”
“예.”
가이우스가 아시테르의 앞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개 숙인 그가 아시테르를 향해 말했다.
“살아계셔서 다행입니다.”
“네… 미안해요. 걱정을 끼쳐서…….”
“그런 말씀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이렇게 돌아와 주셨음에 감사할 뿐.”
아시테르가 가이우스의 어깨를 만지자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는 제가 늘 곁에서 모시겠습니다.”
“에?”
“주군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는 반복지 않겠습니다.”
아주 굳은 결심을 한 모양이다.
아시테르가 무어라 말해도 조금도 물러설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오랜만에 만나도 그렇게 딱딱한 말투라니… 하여간…….”
다른 쪽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역시 익숙한 목소리였다.
“너도 온 거야?”
“당연한 말을. 나는 조금 다른 의미로 오긴 했지만.”
“카이드. 주군께 실례가 되는 말을 하려는 거라면 그만 멈춰라.”
“시끄러. 당신도 당신 할 일이 있듯, 나도 나만의 생각이 있는 거야.”
카이드가 자신의 창을 어깨에 걸쳤다.
그의 시선이 아시테르를 훑었다.
“정말로 마력을 모두 잃은 모양이네?”
“보다시피.”
아시테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러자 카이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빈껍데기에 불과할 뿐이잖아?”
“그럴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옆에는 저렇게나 아름다운 미인이 있고?”
“아, 여기는 린이라고 해.”
아시테르가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린을 소개했다.
린도 얼떨결에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카이드가 혀를 차며 고개를 까딱였다.
“뭐, 됐어. 왜 그렇게 지저분한 몰골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지저분한 얼굴로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여자를 꼬셨는지 뭐 그런 것들은 묻지 않을게. 하지만 한 가지 확인은 해야겠단 말이지.”
카이드가 창을 들어 아시테르에게 겨누었다.
“알지? 내가 원래 있던 곳이 어딘지.”
“잘 알고 있지.”
“그래. 그럼 긴 말할 필요도 없겠네.”
후우우우우웅──!!
카이드의 전신에서 기운이 폭발하듯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방대한 양의 마기가 흘러나오자 카이드의 옷이 거칠게 펄럭였다.
가이우스가 그런 카이드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카이드.”
“비켜 당신은. 원래 이렇게 확인하는 게 우리들의 방식이야.”
카이드의 창에서 칠흑빛 마기가 흘러나왔다.
이를 본 가이우스도 마력을 흘려보냈다.
“그만해라 카이드.”
“당신이 날 막아 보게?”
카이드가 가이우스의 뒤편에 있는 아시테르를 보며 말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뒤에 있을 거야? 마력만 잃은 줄 알았더니 자신감도 같이 잃었나 보지?”
카이드의 도발에 가이우스가 먼저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아시테르가 가이우스를 지나 앞으로 나갔다.
이에 카이드가 웃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카이드가 창을 꼬나쥐었다.
그리곤 자세를 고쳐 잡았다.
“너무 실망스러워 하진 마. 나 원래 이런 놈인 거 잘 알잖아.”
“…….”
“그럼 간다?”
카이드가 창에 엄청난 마기를 실었다.
창끝에 모인 마기가 소용돌이치듯 움직였다.
휘리리리링──!!
회전하는 창이 아시테르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그럼에도 아시테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가이우스가 그런 아시테르를 보호하려 했다.
린 또한 놀라긴 마찬가지.
아시테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아 잠자코 있었는데, 저건 너무나도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이대로 두다간 아시테르가 일격에 목숨을 잃을지 몰랐다.
후콰아아아앙──!!
카이드가 내지를 창끝이 거짓말처럼 아시테르의 앞에서 멈추었다.
휘몰아치던 마기도 아시테르를 피해 그 뒤편을 휩쓸고 지나갔다.
창을 들고 있던 카이드가 아시테르를 보며 웃었다.
“안 피해?”
“피할 이유가 없잖아.”
“어째서?”
“단순히 겁만 주려고 내지른 창을 뭣하러 피해.”
“아하하하하하──!! 티났어?”
“살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일격이었으니까.”
“후후후 만약 살의가 담겨 있었다면? 그 검으로 날 죽이려 들었으려나?”
카이드가 아시테르의 허리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시테르도 피식 웃었다.
“뭐야. 눈치채고 있었어?”
“어떻게 몰라? 못 보던 사이에 더 괴물이 되어서 나타났는데.”
“신기하네… 영기를 느낄 줄 안다니.”
“그 정신 나갈 것 같은 기운의 이름이 영기야? 하이고 참…….”
카이드가 창을 거두었다.
애초에 아시테르가 모든 걸 잃었다고 해도 그를 죽이거나 하진 않았을 거다.
다만 지금처럼 시험은 해보았을 터다.
자신이 따를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따르진 않더라도 친구로서 곁에 둘 수 있을지 아닌지.
“뭐… 부질없는 짓이었네.”
카이드가 창을 어깨에 걸쳤다.
가이우스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카이드를 노려보았다.
“아니아니 미안해. 나도 당신만큼이나 아시테르 대장을 좋아해!”
“닥쳐라 카이드.”
“좋아! 닥칠게!”
카이드가 자신의 입을 막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 문득 정말 궁금해지긴 했다.
아시테르의 몸속에 꿈틀대고 있는 저 기운의 정체가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아시테르가 이전만큼이나, 아니 이전보다 더욱 강해진 것은 알 수 있었다.
아시테르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저 엄청난 기운을 카이드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느끼고 있었으니까.
다만 가이우스는 여전히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카이드의 생각을 눈치챈 것인지 아시테르가 웃으며 말했다.
“궁금해?”
“솔직히 무진장 궁금한데…….”
“나도 마침 궁금했는데.”
“뭐가?”
“그동안은 마수들과만 싸웠었거든. 어때? 내 첫 대련 상대가 되어 주겠어?”
아시테르가 카이드를 보며 물었다.
사실 아시테르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이 전력을 다해 힘을 시험해 볼 수 있을만한 상대는 카이드밖에 없었다.
언노운 마법기사단 내에서도 공공연하게 2인자로 취급받던 카이드였다.
거기다 카이드는 순수하게 전투를 즐기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격인 사람은 카이드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이드가 기다렸다는 듯 창을 고쳐 잡았다.
“얼마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