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적응 (1)
“하지만 공주님. 카일리어님은…….”
“먼 길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너무 피곤하네요. 그냥 돌려보내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오시라고 일러두겠습니다.”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세요.”
“예?! 하지만 공주님……!”
그러나 린의 뜻은 완강했다.
이에 결국 펠렉슨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녀는 그길로 아시테르와 함께 거처로 돌아갔다.
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펠렉슨이 혀를 찼다.
“총명하던 공주님께서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설마 그동안 마녀들과 교류하다 저주라도 걸리신 건 아니겠지……?”
펠렉슨은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 카일리어에게로 갔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카일리어가 펠렉슨의 말을 듣고 기분 나쁜 표정을 드러냈다.
“나 카일리어가 이곳에 직접 찾아왔는데… 공주님께서 그냥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단 말이냐?”
“네 그렇습니다… 지금은 피곤하니 다음에 오시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으니 피곤할만 하겠군…….”
그러나 말과 달리 그는 불쾌한 기색을 계속 내비추고 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던 카일리어가 펠렉슨을 바라보았다.
“요즘 공주님의 상태가 이상하지 않나?”
“무엇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잘 생각해보게. 나를 대하는데 굉장히 소홀해지신 것도 모자라, 별궁에만 계시면서 바깥으로 출입이 상당히 줄어들었어. 거기다 안에 계실 때는 그 외지인만 본다며?”
“네. 그렇긴 합니다.”
“설마 그런 허접한 사내에게 공주님이 마음을 빼앗겼다 하는 뭐… 그런 구질구질한 스토리는 아니겠지?”
펠렉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주님께서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지금은 그저, 그 사내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시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두 명을 더 데려왔다며?”
“네…….”
“그자들도 웨스트 왕국 사람들이 아닌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공주님께서 데려오신 분들에 대해 따로 물어보질 않아서…….”
“쯧… 공주님은 대체 뭘 하시려는 건지… 일단은 알겠다. 나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지.”
카일리어가 몸을 일으켜 다시 본가로 향했다.
돌아가는 그를 보며 펠렉슨이 착잡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 린이 펠렉슨과 이루어진다면 왕권을 가져오는데도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다.
펠렉슨과 그의 가문도 그러한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린과 잘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린이 굴러 들어온 복을 자꾸만 밀어내려 하고 있다.
그것도 볼품없는 거지 때문에…….
“휴우… 그런데 저 고집을 누가 꺾겠나…….”
국왕인 헤렌달도 린의 고집만은 쉽게 꺾을 수 없었다.
겉으로는 부드럽고 유해 보여도 은근히 속은 옹골찬 구석이 있었다.
때문에 린은 하고자 하는 것들은 꼭 해내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그래도 펠렉슨은 이번만큼은 린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조금만 두고 보겠습니다. 아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릴 거라… 이 말입니다.”
펠레슨의 시선이 린이 머무는 거처로 향해 있었다.
* * *
린은 길게 기다릴 필요 없이 아시테르를 곧바로 기사 시험에 데려갔다.
무엇을 하던 일단은 아시테르가 이곳의 기사나 마도사가 되는 것이 중요했다.
아시테르를 따라 카이드와 가이우스도 시험에 등록하기로 했다.
결과는 물론 합격이었다.
가볍게 합격한 세 사람은 몸풀기도 안 됐다며 곧바로 개인 수련장으로 향했다.
요즘 아시테르와 겨루는데 푹 빠진 카이드는 아시테르를 볼 때마다 창을 들고 나섰다.
가이우스도 아시테르를 지키기 위해 더욱 강해질 필요가 있다며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 세 사람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것이 린의 일상이었다.
“세 분께 임무가 떨어졌습니다.”
“그래? 우리 왕국에서 하는 첫 임무지?”
“네. 그렇습니다.”
“임무는 어떤 건데?”
“고블린 떼를 사냥하는 겁니다.”
“고블린 떼를 사냥하는 거라니… 후훗.”
그 말을 듣고 린이 웃었다.
어비스 던전에서 더욱 사납고 무서운 마수들도 아무렇지 않게 때려잡는 아시테르였다.
아시테르 뿐만 아니라 카이드와 가이우스도 이미 그러한 실력자들이었다.
그런 세사람을 겨우 고블린 사냥에 보내다니…….
인력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었다.
하지만 상당히 재밌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린도 재밌는 생각을 해냈다.
“내가 말한 것도 처리해 주었어?”
“예? 예… 다행이 오래전에 공주님께서 ‘실비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셨기에…….”
“아, 맞아 그 신분이 있었지. 좋아 그럼 나는 실비아로서 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겠다.”
“헌데 지금 같은 상황에 꼭 이런 행동들을 할 필요가 있으십니까……?”
“응? 나는 지금 이게 무엇보다도 재밌는 걸?”
“이럴 시간에 다른 귀족들을 만나며 그들과 교류를 쌓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강한 군대를 얻을 수 있고 힘을 얻을 수 있는 겁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민생을 돌아보며…….”
“글쎄… 그것들보다 지금 이게 더욱 가치가 있는 일 같은데. 그런 거라면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다 잘해 주고 있잖아?”
“하지만 언제까지 그들에게만 맡길 수는 없질 않습니까.”
펠렉슨의 말에도 린은 대답 대신 미소만 보일 뿐이었다.
사실 그녀가 아예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꾸준히 린에게 보고를 올렸고 린은 그것들을 읽어보며 결정을 내려 주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린에게 보고를 올리는 사람들은 각 분야에서 뛰어난 자들이었다.
린이 모든 것을 알 수 없기에 그녀는 각 분야에 뛰어난 사람들을 곁에 두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할 일은 두 가지였다.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하는 것.
그리고 그들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신뢰할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것.
그런 과정들을 모두 마쳤기 때문에 린은 안심하고 그들에게 일을 맡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 또한 린이 자신들을 믿어 주고 있기에 그 믿음에 보답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다른 왕족들이나 귀족들은 그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자들만 요직에 앉히려 들었다.
그러다보니 그들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에 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을 위해 얼마나 정성을 바치는지만 따졌다.
뿐만 아니라 해당 사람의 배경도 꽤 중요했다.
결국 다른 왕족들과 귀족들에게 수하란 하나의 악세사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모든 인물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린처럼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의사 결정만 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다.
린은 그들의 생각을 존중해 주었지만 다른 이들은 자신의 입맛대로 사람들을 움직였다.
이 점이 가장 큰 다른 점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펠렉슨은 이러한 린의 방식에도 불만을 표했었다.
혹시나 그들이 린을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누누이 전해 왔다.
그럴 경우 상처와 피해를 입는 것은 린이었다.
그러나 린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을 곁에 둔 내 눈이 잘못되었다는 뜻이니까… 오롯이 내가 감당할 몫이에요.”
린이 이런 말을 남기는 통에 펠렉슨은 이번에도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어쨌든 린은 당분간 아시테르 일행과 함께 움직일 생각이었다.
철없이 구는 10대가 아님에도 이런 일탈을 꾀하니 그녀에게도 즐거움이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우리들끼리만 가도 되는데. 바쁜 것 아니에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에요.”
“냅둬 대장. 공주님이 대장 곁에 있고 싶다는 거잖아. 모르겠어?”
카이드가 괜히 린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린은 그동안 카이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파악해 내었다.
그녀는 카이드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제공하고 새로운 창을 전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카이드에게 창술에 관한 것들을 보여 주기도 했다.
덕분에 카이드에게 린은 굉장히 호감인 사람이었다.
본래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그 주변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얻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린은 착실하게 아시테르에게 다가가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굳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아시테르는 이미 린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린의 입장에서도 아시테르의 소중한 동료이자 친구들에게 좋은 대접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뿐이다.
어쨌거나 아시테르 일행과 함께 린도 실비아라는 이름으로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곧바로 전달 받은 마을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와있던 기사들이 아시테르를 보며 피식 웃었다.
“웬 거지가 왔는데?”
“창? 그런데 저런 창으로 뭘 할 수나 있나?”
“그래도 저 사람은 좀 쓸만해 보이는데.”
그들의 시선은 아시테르나 카이드 대신 가이우스에게로 꽂혔다.
가이우스의 피지컬이 워낙 좋다보니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수준이었다.
린은 들키지 않도록 완벽하게 변장을 한 상태.
기사들은 린에게도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때 그들이 있는 곳으로 삼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다가왔다.
“반갑다. 너희들을 지휘하게 된 십인장 볼로스라고 한다.”
볼로스가 그들을 향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시테르와 다른 이들도 볼로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첫 임무라고?”
“네.”
“그럼 긴장 좀 되겠군.”
볼로스가 그들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임무에 앞서기 전 수하들의 면면들을 익혀 두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표정에서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후후, 고블린을 사냥한다고 해서 너무 마음의 긴장을 풀어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지 말고 마음을 달리 하게. 고블린 또한 충분히 흉포하고 위협적인 마수니까.”
“알겠습니다.”
아시테르가 답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블린들은 야밤을 틈타 움직인다.
그러니 아직 그들이 오기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작전 수행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 그동안 작전을 다시 상기시켜 주겠네.”
아시테르와 가이우스, 린은 볼로스의 작전을 귀담아 들어 주었지만 카이드는 조금 달랐다.
이미 흥미를 잃은 그는 뒤편에 자리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볼로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첫 임무를 수행하는 기사가 저런 태도를 보이니 당연히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저 친구는…….”
“크게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흐음… 그래도 저런 태도는 좀 거슬리는구만 그래.”
그래도 카이드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따분한 표정으로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그냥 가서 쓸어버리면 되잖아.”
“우리는 이곳에 대해 잘 모르잖아. 적응하는 기간이 잠시 필요해.”
“뭐… 대장이 알아서 하겠지. 근데 말이야 한 가지 좀 거슬리는 게 있는데 말이지.”
“뭐가?”
카이드가 볼로스의 앞으로 다가갔다.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카이드를 보며 볼로스가 인상을 굳혔다.
우뚝 선 카이드가 볼로스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나한테 함부로 명령하지 마. 이 세상에 내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으니까. 알겠어?”
“…너 지금 뭐라고……!”
슈와아아아──!!!
카이드가 기운을 끌어올리자 공기가 숨 막힐 듯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보며 볼로스가 놀라 딸꾹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볼로스의 몸이 본능적으로 덜덜 떨기 시작했다.
십인장 수준의 볼로스가 감히 감당해 낼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아시테르가 슬쩍 카이드의 기운을 흩으렷다.
“그만.”
아시테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거짓말처럼 사방을 옥죄던 마기가 사라졌다.
카이드가 피식 웃으며 공포에 질린 보로스를 바라보았다.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