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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314화 (314/424)

314화 그 시각, 이스트 왕국은 (3)

“왔어? 재수탱이.”

“나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네가 유일할 거다 라빈.”

칸이 웃으며 말했다.

과거와 다르게 그의 인상에는 온화함이 자리해 있었다.

날카롭고 차갑기만 하던 인상이 알렌시아를 만나 조금씩 변화한 것이다.

세월은 과연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칸의 시선이 자비토에게로 향했다.

“아직도 우리 마법기사단에 들어올 생각은 없는 건가? 너라면 곧바로 부단장의 자리를 내어 줄 수 있다 자비토.”

“미안하지만 누구 밑에 들어가는 건 사양이라서.”

“그렇군.”

칸은 자비토의 말이 진심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과거 자비토는 칸의 예상을 깨고 언노운 마법기사단에 들어갔다.

자비토나 되는 인사가 언노운 마법기사단에 들어갔기 때문에 칸도 당연히 그가 그곳에서 요직을 차지할 줄로만 알았다.

허나 자비토는 언노운 마법기사단에서 단장이나 부단장의 자리도 아닌 선임기사에 머물렀다.

자비토만한 남자가 부단장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다니…….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충격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들을 듣고나서야 납득이 되었다.

괴물 같은 창술사와 콰트로 마녀.

모든 마법 공격들을 견뎌내는 하드한 탱커 마도사.

칸이 생각했을 때 당장 그들만 해도 자비토와 비견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의 예상을 깨고 언노운 마법기사단의 부단장은 에스파가 되었다.

에스파는 후보조차 되지 못하는 인물이라 생각했다.

그가 기억하기로 에스파는 특별한 마력 변환도 못하는 마도사였으니까.

‘그런 에스파를 부단장이라는 중요한 자리에 앉히다니… 역시나 아시테르 답다고 해야 할지, 사적인 연에 집착하는 안 좋은 모습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다른 마법기사단의 일이라 크게 신경 쓰진 않았지만, 언젠가 아시테르의 이런 사적인 감정들이 커다란 실수를 낳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시테르는 결국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사우스 왕국에 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나름 칸은 아시테르를 자신의 둘도 없는 라이벌이라 여겼다.

이스트 왕국에 태어나 자신 혼자만 뛰어났다면 이렇게까지 재밌는 인생은 살지 못했을 것이다.

아시테르는 안정된 길만을 걸어온 자신과 다르게 늘 기상천외한 행적들을 남기며 성장해 온 인사였다.

그런 아시테르를 보며 칸도 자신의 심장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던 존재가 어느새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강자가 되어 있었다.

칸은 수련을 할 때 늘 무형의 상대를 머릿속에 그리는데, 언젠가부터 그 상대는 늘 아시테르와 닮아 있었다.

녀석을 뛰어넘고 자신을 뛰어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수련이라 생각했다.

그런 아시테르를 잃고 나니 씁쓸함이 늘 맴돌았다.

죽은 이의 허상을 붙잡고 수련하는 것도 못할 일이었다.

상상 속의 아시테르는 더 이상 강해지지도, 발전하지도 않는다.

허나 그 일 때문에 알렌시아를 얻기도 했다.

인간이란 참으로 간사했다.

둘도 없는 라이벌이자 동료라고 생각했던 아시테르의 죽음은 슬픔을 불러왔으나, 그로 인해 알렌시아가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니 만감이 교차하는 행복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알렌시아를 보듬으며 칸은 다짐했다.

이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아시테르가 주었던 사랑보다 더한 사랑을 주겠다 다짐했다.

그의 빈자리를 느낄 수 없도록……!

그리고 이참에 아시테르가 남긴 사람들까지도 케어해 주고 싶었다.

라이벌이었던 아시테르에 대한 예우였다.

물론 이것만은 아니었다.

언노운 마법기사단은 부정할 수 없는 최고의 마법기사단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들이 남긴 업적은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굵직굵직했다.

만약 사우스 왕국과 전쟁이 벌어졌다면 누구보다도 선봉에 섰을 이들이었다.

아시테르의 죽음에 대해 가장 분노한 이들이 누구냐 하면 단연코 언노운 마법기사단이라 말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들은 전쟁을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았다.

언노운 마법기사단이 전쟁을 주장했다면 이스트 왕국은 아마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언노운 마법기사단은 아시테르의 죽음 이후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침묵을 지켰다.

놀랍게도 그것은 에스파의 뜻이기도 했다.

가장 먼저 복수를 하고자 나설 것 같았던 에스파가 예상외의 행동을 보인 것이다.

다른 마법기사단원들도 그런 에스파의 뜻을 순순히 따라 주었다.

칸은 이스트 왕국이 사우스 왕국에 잠시 점령당했다 해도 그 뿌리만큼은 아직 건재하다 믿고 있었다.

사우스 왕국이 아무리 이스트 왕국을 자신들의 발밑에 두려 해도 이스트 왕국의 얼이 살아 있다면 언제든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마법기사단을 유지한 것이다.

거기다 돌풍의 마법기사단은 사우스 왕국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브레이크 되는 던전이나 마수들을 사냥하며 왕국민들을 도왔을 뿐이다.

그게 아니면 일상으로 돌아가 주변 사람들을 챙겼다.

사우스 왕국도 그런 돌풍 마법기사단을 크게 제지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돌풍 마법기사단뿐만 아니라 다른 마법기사단도 그렇게 행동해 주길 바랐다.

그동안 천천히 이스트 왕국의 상층부부터 잠식해 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며 칸도 자비토를 비롯한 몇몇 인사들에게 돌풍 마법기사단으로의 가입을 권유했다.

만일의 상황을 위해 마법기사단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단호한 거절뿐이었다.

결국 언노운 마법기사단의 단원들이 각자의 길로 흩어지는 것을, 칸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칸이 자비토를 향해 손을 건넸다.

“그래도 이렇게 축하해 주러 와서 고맙다.”

자비토가 그런 칸의 손을 맞잡았다.

그가 생각했을 때 알렌시아와 달리 칸은 진정으로 이스트 왕국을 위해 살아가는 기사였다.

칸은 자신의 부귀영화보다는 왕국과 왕국민들을 위한 일을 우선적으로 생각했다.

가끔 고지식하고 딱딱한 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면모 덕분에 칸은 사우스 왕국에 굽히지 않고 여전히 이스트 왕국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었다.

“때가 되었을 때. 너의 선택을 기대하겠다.”

“뭐?”

“아니야.”

자비토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곤 자리를 떠나 버렸다.

결혼식도 마무리 되어 가니 더 이상 이곳을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다.

자비토가 떠나버리니 라빈도 재미없다며 함께 따라나섰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언니는 안 와?”

“나?”

“오늘 오는 날이지 않아?”

“아……!”

라빈의 말에 에이브릴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옷을 갈아입었다.

굴곡진 몸매가 확연히 드러나는 아름다운 옷이었다.

머리도 다시 만지고 화장도 예쁘게 고쳤다.

에이브릴이 향하는 곳은 커다란 연회장이었다.

레프레시아 가문에서 준비한 연회.

그곳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 중 유달리 눈에 띄는 사내가 있었다.

“에스파!”

그녀의 부름에 장발의 머리를 묶은 에스파가 뒤를 돌아보았다.

“에이브릴?”

“벌써 온 거야!?”

“네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야? 아직 결혼식이 한창이지 않나?”

“그곳은 내가 아니어도 축하해 주는 사람들이 많잖아. 그 사람들에게 맡겨놓고 달려왔지.”

“흐음……?”

“그리고 너한테는 나의 축하가 필요하잖아?”

“후후 그건 그렇지.”

“어때? 성공했어?”

“15층까지 돌파했어.”

“무려 15층까지?!”

“응. 왠지 그 정도까지는 해야, 그 녀석이 돌아왔을 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에스파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단하군 15층이라니… 혼자서 그 정도까지 돌파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는 말이냐?”

“자비토. 너도 왔구나.”

“그래서 어땠나? 15층은.”

“말해 뭐해. 그냥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지.”

“더욱 강해진 너라니… 붙어보고 싶어지는데.”

“얼마든지.”

에스파가 찡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 에스파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너희들도 그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에이브릴이 궁금해 하자 에스파가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리곤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웨스트 왕국에 새로운 신성이 등장했대.”

“새로운 신성?”

“그래. 마수를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기사인데 그 실력이 엄청나다는군. 웨스트 왕국에선 이미 소문이 자자할 정도인가 봐.”

“아무리 그래도 왕국 전역에 퍼질 정도라고?”

“그 사람이 특별한데엔 또 다른 이유가 있거든.”

“무슨 이유?”

“신기하게도 그 사내를 지원해주는 이가 바로 웨스트 왕국의 공주인가 봐.”

“공주가?”

에스파의 말에 에이브릴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말은… 웨스트 왕국 고위 귀족의 자제라는 소리인가?”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야.”

“근데 왜 그렇게 신난 얼굴이야? 다른 나라의 얘기일 뿐인데. 네가 그런 쪽에 그렇게나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는데? 여차하면 내가 더 알아봐줄까?”

“그렇지 않아도 그걸 좀 부탁하려고. 마침 여기에 5대 가문의 자제들이 세 명이나 있잖아.”

“레프레시아 가문과 오르페 가문의 정보력을 이용하고 싶다는 얘기냐? 이유는?”

자비토의 물음에 에스파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침내 때가 온 게 아닐까 싶어.”

“때가 오다니. 네가 우리들에게 말한 그 시기 말이냐?”

“응.”

“그 말은… 너는 지금 그 신성을 아시테르라 생각하고 있는 건가?”

“내 직감은 그래.”

“근거는?”

“전투 방식을 들어보니 마수들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고 있어. 그건 아시테르도 그랬거든. 그리고 웨스트 왕국의 공주 하이시아 린은 아무나 지원해 주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 실제로 많은 귀족들이 그 여자와 연을 대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지.”

“근데 아시테르가 무슨 수로 그 여자에게 지원을 받는다는 말이냐?”

“아, 너희는 몰랐나? 린 공주랑 아시테르는 친구 사이거든.”

에스파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꺼냈다.

자비토가 헛웃음을 지었다.

“아시테르 녀석은… 공주들과 친구되는 게 취미냐……?”

“들어보니 이전에 린 공주가 이곳에 와서 위험에 처했을 때 아시테르가 그녀를 도와준 모양이야. 그날 이후로 친구의 인연이 이어진거고.”

“나참… 하여간 인생 한 번 재밌게 사는 놈이라니까….”

“그러니까 아시테르가 더 특별하고 재미난 녀석이겠지. 아무튼 린 공주와도 그런 인연이 있으니, 그녀라면 충분히 아시테르를 도와줄만 해.”

물론 이것 말고도 린과 아시테르의 사이엔 많은 인연들이 오갔지만 당장 에스파로선 그 일들에 대해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증거.”

“그게 뭔데?”

“신성의 곁에 두 명의 강한 기사가 있다고 해. 그중 한 명은 창을 쓰는 기사고, 다른 한 명은 맨주먹으로 싸우는 기사다.”

“카이드와 가이우스라는 건가…….”

“백퍼센트네. 이건…….”

“숨기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네. 이건 대놓고 우리들에게 자기가 거기 있다는 걸 알리려는 의도 아니야?”

“그런 걸지도 모르지. 어쩌면 준비하라고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일 수도 있고.”

“하여간… 살아 있으면 소식이라도 한 통 전해 주지. 이렇게 알리고 말이야.”

라빈이 입술을 뾰루퉁하게 내밀며 말했다.

에스파가 그런 라빈을 보며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지금 그녀는 안도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 누군가 에스파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곳에 계셨군요 신궁(神弓)님. 이번 전투에 함께 갈 동료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인원은 신궁님이 말씀하신 곳으로 소식을 보내 초대하면 되겠습니까?”

중년의 신사가 에스파에게 예의를 차리며 말했다.

그러자 에이브릴이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물었다.

“근처에 마수들이 나타났다고 해서. 마냥 기다리는 것보다 한 번 다 같이 모이는 게 좋지 않겠어? 근처에 있는 엔류아도 불렀어. 이번 토벌대에 우수한 힐러도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에스파의 말이 끝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가 피식 웃었다.

라빈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간만에 몸 좀 풀어볼 수 있겠네.”

“후후후후, 너무 좋군. 그렇지 않아도 요새 지루하던 참인데.”

“이번엔 나도 따라갈 거야.”

에이브릴이 에스파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에스파가 그녀를 향해 웃으며 답했다.

“얼마든지. 이번에는 언노운 마법기사단원들이 모이는 자리니까. 너도 함께 가야지.”

“솔직히 말해 에스파 오빠. 당장이라도 아시테르 오빠 곁으로 달려가고 싶지?”

“말해 뭐해. 당연한 마음이지.”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야? 설마 ‘마법기사’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닐 테고… 이스트 왕국에 누구보다 실망한 건 오빠잖아?”

“아시테르가 불러 줄 때까지 기다릴 뿐이야. 아시테르가 아직 우리를 부르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얘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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