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경쟁전 (1)
아시테르 군은 순식간에 르브레임스의 세력을 흡수해 버렸다.
이미 압도적인 전력차 앞에서 그들의 저항은 무의미했다.
아시테르는 성에 올라 황색으로 깃발을 바꾸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다들 적극적이야?”
아시테르의 시선이 다른 이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적당한 전투를 벌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나 열심히 싸워줄 줄은 몰랐다.
경쟁전은 말 그대로 모의 전쟁일 뿐인데 조금 전은 실제 전쟁을 방불케 했다.
어디 그뿐인가.
전략을 세우는 것부터 군사 이동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다.
본래 모든 것에 열심히 임하는 동료들이긴 했지만 이번에는 뭔가가 달랐다.
그때 에스파가 아시테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당연한 것 아니야? 네가 이렇게까지 뭔가를 하고 싶다고 의견을 내비친 적이 없잖아 지금까지.”
“그랬나….?”
“여태까지는 마법기사로서, 왕국민으로서, 아들로서 움직였다면 지금은 딱 아시테르 네가 하고 싶은 걸 위해 움직이는 느낌이야.”
에스파의 말에 아시테르도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고보니 그동안 지내면서 자신은 무언가에 대한 책임으로 얽메여 있었다.
“저도 근래 아시테르님의 모습들이 너무 보기 좋았습니다.”
“생동감 있는 모습이라니까.”
“그건 인정합니다.”
“원래도 보기 좋았지만 지금은 뭔가… 한결 짐을 덜어낸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동료들의 말에 아시테르도 생각이 많아진 얼굴이었다.
그러자 에스파가 아시테르를 툭툭 쳤다.
“뭘 그렇게 고민하는 얼굴이야? 어쨌든 보기 좋아졌다는 말이잖아.”
“맞아. 너무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내 친구가 뭔가를 간절하게 바란다고 생각하니 진짜 열심히 도와주고 싶단 말이지.”
“이렇게 모인 것도 다 그런 마음에서 그런 것 아닐까요.”
언노운 마법기사단.
그들이 결국 다시 모이게 된 것도 아시테르 때문이었다.
구심점이 되어주는 아시테르가 있어 다들 한달음에 달려와 모인 것이다.
동료들의 마음에 아시테르가 활짝 웃었다.
“고마워 다들.”
“근데 그 로얄나이츠라는 게 된 다음에는 어떻게 하게?”
“사우스 왕국에 복수를 할 생각이야.”
“우오오…….”
아시테르의 입에서 복수라는 단어가 나오자 다들 표정을 달리 했다.
아시테르가 그동안 어떤 고통을 겪었을지 다른 이들은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어머니를 잃고 소중하게 생각하던 동료들을 잃었다.
거기다 사랑하는 여인에게까지 버려졌다.
마력까지 모두 잃었던 아시테르를 생각하면 모두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었다.
“제기랄… 절대로 용서 못 하지 사우스 왕국놈들.”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비겁한 작자들.”
“그나저나 좋네요. 우리가 이렇게 모여 있다는 게.”
“저도 사우스 왕국과의 전쟁에 참여하겠습니다.”
“일단은 아시테르가 로얄나이츠부터 되어야 해.”
아시테르도 그 말에 동의했다.
웨스트 왕국의 로얄나이츠는 작전권을 갖는다.
이는 즉, 독자적인 세력으로 얼마든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시테르는 로얄나이츠라는 자리가 필요했다.
그가 로얄나이츠가 되면 린에게 많은 도움이 되어 줄 수도 있다.
이전에 마르체니는 왕권에 아예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존중해 준다는 마음으로 그냥 두고 보았다.
하지만 그 결과가 곧 사우스 왕국으로의 방출이었다.
볼모로 보내진 마르체니는 지금 사우스 왕국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애초 고국이라 생각한 이스트 왕국에서 버려졌을 때, 그녀는 과연 어떤 감정과 기분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 갔을까.
이 모든 것이 곧 힘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힘을 키우려 하는 것이다.
힘을 키우는 방식도 조금 달라졌다.
그동안에는 자신만 강해지면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시테르 혼자만 강해져서는 안된다.
언노운 마법기사단의 동료들과 함께 강해지고, 그를 따르는 세력들도 함께 강해져야만 했다.
“그 다음에는…….”
“뭐?”
“아니야. 일단 르브레임스의 세력을 흡수했으니 곧장 다른 쪽으로 향하자.”
“이번엔 어디야?”
“호르콘이라는 기사가 있는 곳.”
“거기도 애매한 지역이로군요.”
“그런 지역들을 가장 먼저 흡수하는 겁니다. 그러는 동안 저들끼리의 전투가 시작된다면 더더욱 좋은 일이고요.”
아시테르는 눈앞에 돌을 두어 전체적인 판을 그렸다.
네 개의 세력 중 어디가 먼저 전투를 시작하건 상관 없다.
그동안 아시테르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세력들을 쓸어 담을 생각이었다.
남은 네 개의 세력이 건드리지 않고 있는 세력들을…….
그리고 이 계획은 잘 들어맞았다.
아시테르가 눈에 보이는 세력들을 흡수하고 있는 것을 나머지 세력들은 지켜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함부로 행동을 취하면 다른 적들이 움직인다.
그 생각들에 묶여, 아시테르가 활발하게 움직이는데도 그냥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시테르가 교묘히 힘의 균형을 이용하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다 참지 못하는 자들이 전투를 벌일 것이다.
* * *
쿵!
누군가가 큼지막한 주먹으로 탁자를 때렸다.
“이대로 둘 겁니까? 저 쥐새끼 같은 놈이…….”
“작은 것에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래도 그 작은 세력들을 모두 모으면 제법 커진단 말입니다.”
“그래봤자야.”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차라리 우리가 먼저 놈들을 쳐서 흡수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라바나스가 움직일 거다.”
“그 여우가요…? 하긴… 기회를 놓칠리 없겠군요.”
“만약 아시테르라는 놈이 라바나스와 손을 잡았다면요…? 그래서 이대로 있다가 양동작전이라도 당하면…….”
기사들의 말에 아곤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주 가능성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아시테르가 꼭 라바나스와 손을 잡았을 거란 보장도 없었다.
만약 아시테르 세력이 라바나스 외에 다른 세력과 손을 잡았다면?
그게 누구든 상당한 이득을 취하고 힘의 균형을 깨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게 내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아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녀석들이 아시테르에게 무어라 말했든 자신이 더 많은 것을 얹어주면 될 뿐이다.
아곤은 아시테르가 로얄나이츠가 되기 위해 나서진 않았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렇지 않다면 자처해서 지금과 같이 계륵의 존재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저 힘의 균형 사이에서 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기회를 간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똑똑한 놈이야. 기회를 이용할 줄 아는…….”
하지만 아곤의 이러한 생각은 틀렸다.
아시테르는 누구도 함부로 손을 쓰기 어려워진 위치를 제대로 이용하고 있었다.
“공격의 선택권은 우리들한테 있어. 저들한테 있는게 아니라.”
아시테르가 가장 먼저 노린 곳은 아곤의 백군이었다.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다른 곳에 비해 공략하기 쉬운 지형이었다.
아곤이 아시테르에 관한 보고를 받고 있을 때쯤 이미 아시테르는 군을 이끌고 아곤의 영토를 급습하고 있었다.
워낙 빠른 움직임 탓에 아곤의 수하들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3개의 성을 빼앗기고 나서야 아곤도 아시테르의 공격을 알아차렸다.
“이런…! 이 건방진 자식이 설마 먼저 공격해올 줄이야……!”
분노한 아곤이 쌍심지를 켜며 전장으로 나섰다.
그를 따르는 병력은 총 만여 명.
아시테르는 그사이 이만 여명이나 되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전과 달리 아시테르의 병력이 우위를 가진 상황.
그런 상황 속에서 아시테르는 전방위로 아곤의 세력을 무너트리는 방법을 택했다.
각 군을 이끄는 지휘관으로는 언노운 마법기사단의 동료들과 길고트, 호르콘 등이 맡았다.
군의 개성을 살려 움직이니 기동이 훨씬 빨라졌고, 그 덕분에 아곤의 빈틈을 찌를 수 있었던 것이다.
아곤은 그를 따르는 수족들과 함께 전장으로 나섰지만 이미 전황은 그들에게 나쁘게 흘러가고 있었다.
전선이 밀려나는 것을 본 아곤이 헛웃음을 지었다.
“순식간에 다섯 개의 성이 함락당했어.”
눈앞에 보이는 것은 모의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성이었다.
한데 만약 이 성들이 실제였다면…….
아곤은 이미 많은 수의 수하들과 영지민들을 잃은 것이다.
그때 아곤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적들의 속도가 워낙 빠른데다,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해왔습니다. 거기다 아군의 병사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퇴로도 차단당한 상태… 그런 와중에 보급로까지… 끊겼습니다.”
기사는 면목이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아곤이 고개를 돌렸다.
이제 보니 그의 모습도 성하지 않다.
“이봐 탈렌. 네가 보급로를 맡았는데도 보급로가 끊겼단 말이냐……?”
“네… 적들 중에 상당한 강자들이 있습니다.”
“길고트를 말하는 건가? 하지만 길고트라면 같은 하이랭커인 네가 그렇게 쉽게 당하진 않았을 텐데?”
“길고트도 문제였지만… 그와 함께 온 마도사가 더 큰 문제였습니다.”
“무슨……?”
“무시무시한 마법을 사용하는 마도사였습니다. 그자의 마법이 시작되면 병사들의 몸에 커다란 상처가 남았습니다. 저 또한 그것을 막아보며 전진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습니다.”
“커다란 상처?”
“마치 날카로운 발톱에 뜯긴 상처입니다.”
“흐음…….”
그때 또 다른 기사가 달려와 말했다.
“보고드립니다. 2번 성도 함락당했습니다.”
“2번 성은 페레스가 지키고 있던 성인데……?”
“페레스님이 패배하셨습니다.”
“페레스가 졌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페레스는 아곤의 수하들 중 최강을 다투는 자였다.
그런 페레스가 패배하다니…….
“대체 몇 놈이나 페레스에게 달려들었길래…….”
“합공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일기토에서 패배하셨습니다.”
“거짓말 치지 말아라! 페레스가 일대일 승부에서 졌을 리가 없어!”
“하지만 정말입니다. 페레스님은 깔끔하게 결과에 승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적들은 무혈로 성에 입성… 페레스님은 적들에게 붙잡혔습니다.”
기사의 보고에 아곤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무언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언제든지 흡수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안중에도 없던 세력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발밑까지 치고 들어와 이제는 목줄을 위협한다.
이런 상황이 되니 아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너무 저들을 만만하게 봤구나……!”
“자투리라 생각했던 자들을 모은 것만으로 이런 결과를 낼 수 있단 말입니까…?”
“생각해 보면… 세력적으로는 별 것 아니었을지 모르나… 길고트나 호르콘 같은 기사들은 상당한 실력자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들을 그냥 두었지……?”
아곤이 과거를 돌이켜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특히나 호르콘의 세력은 아곤의 성 지척에 있었다.
“근데 애초에 호르콘을 어떻게 수하로 받아들였을까요……?”
“호르콘은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좋아하는 자가 아닙니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를 어떻게 거둔단 말입니까.”
수하들의 말에 아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르콘은 강성(強性)의 기사였다.
그런 자가 순순히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갈 리도 없다.
그러니 아곤 또한 자연스레 호르콘은 ‘거두는 자’가 아닌 ‘쓰러트려야 할 상대’로 인식하고 있던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아시테르쪽을 너무 얕봤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아직 본 성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제대로 한 번 붙어 보자. 과연 지금까지의 일들이 요행이었는지… 아니면 힘을 숨기고 있던 맹수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부딪혀 보면 알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