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계책 (1)
“제가 정말… 함께 해도 되겠습니까?”
“함께 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흐음… 그래도 제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도중에 마음이라도 바뀐다면…….”
“후훗. 상관없습니다. 무슨 짓을 하셔도.”
“호오… 보기보다 배포가 크시군요. 자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곤의 말에 아시테르가 웃었다.
그 웃음이 아곤에게는 답변이었다.
“그나저나 제가 패배했다는 소식은 이미 빠르게 퍼졌을 겁니다.”
“아니요. 반대일 겁니다.”
“예……?”
“제가 아곤님의 세력에게 졌거든요.”
“네?!”
아시테르의 말에 아곤이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 사이 또다시 정보에 손을 쓴 것이다.
그야말로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질 않는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큰 전투의 정보까지 통제할 수 있는 것일까.
“경쟁전은 다른 말로 정보전입니다.”
“진짜 놀라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그럼 나라바스는…….”
“현재 아곤님의 군대가 더더욱 사기가 진작되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신 겁니까? 이제부터는 제가 대장인 걸로 연기를 하면 되겠습니까……?”
“네. 바로 그겁니다.”
“예에……?”
아곤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웃는다.
“평소처럼 해주시면 됩니다.”
“그 다음에는요…? 다음에는 무슨 행동을 할 생각이십니까……?”
“우리가 행동을 취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쪽에서 먼저 행동을 취할 테니까요.”
“예? 그럴 리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는 아곤이라면 당연히 이 기세를 이어 라바나스를 향해 돌격했을 것이다.
지금 군사들의 사기는 최고조.
이만한 적기가 없다.
헌데 아시테르는 어째서인지 이런 상황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이 무엇인지 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시테르는 그의 생각을 일절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러니 일단은 아시테르의 말 대로 아곤이 대장 노릇을 하는 수밖에.
그렇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정말로 라바나스 측에서 은밀하게 연락을 취해 왔다.
거처에 있던 아시테르는 라바나스 측의 사람을 안으로 들였다.
“안녕하신가.”
“어서오십시오.”
“흐음… 아곤에게 패했다더니…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군.”
“후우… 아곤을 얕보면 안 됩니다. 아곤과 그의 군대는 강합니다.”
“크하하하──!! 그것은 우리들이 당신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사내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나바라스님을 따르는 기사 중 한 명인 구스할이라고 하네.”
“반갑습니다. 그래서 저를 보자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네에게 복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 하네.”
“복수요……?”
“그래. 아곤에게 패했으니 분할 것 아닌가? 이번에 아곤에게 복수도 하고 많은 보수도 받는 것은 어떻겠나?”
아시테르가 생각하는 척 내심 미소를 지었다.
결국 원하는 대로 되었다.
그의 시선이 가이우스에게로 향했다.
가이우스가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아시테르도 연기를 시작했다.
쿵!
그가 주먹으로 의자의 손걸이를 내리쳤다.
“복수라… 그것 참 달콤한 말이로군요. 저 또한 아곤에게 치욕스런 패배를 당한 뒤 하루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내 그럴 줄 알고 이렇게 찾아왔지. 어떤가? 이참에 우리와 손을 잡고 아곤을 내치는 것이.”
“그런데… 제가 여러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호오… 이것은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질 않나? 이렇게 줄을 내려준다면 그게 썩은 줄이든 아니든 일단은 잡고 보는 게 맞잖아?”
“철저히 이용당하고 버려질 수도 있질 않습니까.”
“흐음…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들을 믿을 수 있겠나?”
“일단 두 가지의 부탁을 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시테르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를 본 구스할이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쯧… 그래도 머리를 제법 쓸 줄 아는 자라 이건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저 또한 여러분들을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시테르가 일부러 고개를 크게 가로저으며 말했다.
지금 상황에 있어 우위에 있는 사람은 아시테르였다.
아시테르의 도움이 없다면 불리한 것은 나바라스쪽이었다.
아시테르가 끌어모은 세력이 아곤에게 고스란히 붙는다면 힘의 균형은 자연스럽게 무너져 내리고 만다.
그럼 아곤은 별다른 힘도 들이지 않고 세력을 부풀린 셈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나바라스쪽에서도 조치를 취해 온 것이다.
“크음… 알겠네. 내가 졌어. 원하는 것을 말해 보게.”
“첫 번째는, 흑군 진영의 가장 가까운 곳에 로몸이 지키는 성이 있습니다. 그곳을 먼저 함락시켜 주십시오.”
“로몸이라… 쉽지 않은 상대로군. 헌데 로몬 성을 먼저 함락해 달라고 하는 그 이유는……?”
“그곳을 함락시켜야 아곤의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습니다. 그곳으로 지원군이 가지 못하도록 제가 돕겠습니다.”
“그렇게까지? 그런 정도라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
구스할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째 일이 수월하게 잘 풀려가는 기분이었다.
수성에 뛰어난 로몸이 지키고 있는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 마저도 따지고 보면 나바라스 군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어쩌면 아시테르는 지금 부탁이라는 것을 빌미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내려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다음은? 두 번째는 뭔가?”
“나바라스님을 직접 보고 싶습니다.”
“나바라스님을?”
“예.”
“흐음…….”
구스할이 수염을 쓸어내렸다.
나바라스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이는 나바라스가 늘상 투구를 쓰고 있기 때문.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항상 베일에 가려져 있다.
“안됐지만 나바라스님의 얼굴을 보지 못할 거다.”
“아, 얘기는 들었습니다. 항상 투구를 쓰고 있다지요?”
“그래.”
“상관없습니다. 저는 나바라스님의 얼굴을 보려는 게 아니고 그분을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눠보고 싶을 뿐입니다.”
아시테르의 말에 구스할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말은 어째 직접 보고 자신의 주군인 나바라스를 평가하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아곤을 무너트린 이후로도 제가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인물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기회는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자네를 그곳으로 데려가는 것은…….”
“크게 우려할 일은 없을 겁니다.”
아시테르가 팔을 들어보였다.
구스할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번 살펴보십시오. 저는 마력이 없는 몸이거든요.”
“뭐? 마력이 없다고……?”
구스할은 그게 정말인지 확인하기 위해 아시테르의 팔을 붙잡았다.
가이우스가 그것을 보고 움찔했지만 아시테르가 슬쩍 말렸다.
그 사이 구스할은 심각한 얼굴로 침음성을 흘렸다.
“정말이로군… 마력이 하나도 느껴지질 않아.”
“그동안 제가 이 위치까지 올라설 수 있었던 이유는…….”
아시테르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그리곤 가이우스쪽을 쳐다보았다.
“저의 머리와 다른 동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흐음…….”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아시테르가 직접 나서서 싸웠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마수 사냥을 할 때는 직접 나섰다는 얘기가 들려오긴 했지만, 마력이 없는 인간이 얼마나 활약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지금까지 모두를 속여 왔다는 건가? 아니지… 자신을 철저히 감춰 왔다는 표현이 맞으려나… 저자에겐 머리가 있고 우리에겐 실력이 있다. 저자를 거둔다면 주군께도 큰 힘이 될지 모르겠어.’
잘 구슬려 나바라스의 군사(軍師)로 활용하면 어떨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구스할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이 없는 사람을 너무 경계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대신 호위는 한 명만 데려갈 수 있도록 하겠다.”
“알겠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 짓고 나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지.”
“모쪼록 다음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시테르가 구스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구스할은 손을 들어 그의 인사를 대충 받곤 자리를 떠나 버렸다.
이를 악물고 있던 가이우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카일리어가 파우트의 세력을 흡수하고 나면 마지막 전투를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최대한 병력을 보존해야 해요.”
“하지만 아곤 군과는 제대로 전투를 치르지 않으셨습니까.”
“아곤은 말보다 실력으로 증명해야 저를 따를 사람입니다.”
“흐음… 그렇군요. 그나저나 참느라 혼났습니다.”
“잘 참았어요.”
“그리고 이제는 말을 낮춰서 해주십시오. 그래야 군주로서의 권위가 서지 않겠습니까.”
“아, 알겠어요. 천천히 그렇게 해보도록 할게요.”
아시테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구스할은 놀랍게도 곧바로 공격을 시작했다.
로몸은 아마 적당히 수비하는 척 하다 함락당해 줄 것이다.
아시테르가 그에게 그렇게 하도록 명령을 내렸으니까.
“가이우스. 다른 동료들은?”
“말씀하신대로 이미 잠입에 성공했습니다.”
“흑군의 본영으로?”
“예.”
“카이드는?”
“준비를 마친 상태입니다.”
“좋아… 그럼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군.”
아시테르가 들어온 보고서들을 읽어 내렸다.
카일리어와 파우트의 전쟁은 역시나 카일리어쪽이 우세를 가져가고 있었다.
파우트도 상당한 실력자인데다 뛰어난 기사들을 가진 강한 세력이었으나, 카일리어 역시도 만만치 않았다.
“린의 말대로 카일리어쪽이 이기겠어.”
“예?”
“나중에 파우트 군과 카일리어 군이 맞붙으면 카일리어 군이 이길거라고 예상했거든.”
“린 공주님께서요?”
“대단한 사람이야.”
사실 이번 경쟁전의 전략도 린이 많은 도움을 준 상태였다.
직접적으로 경쟁전에 참여하진 못하지만 이러한 전략들을 귀띔해 준 것이다.
이틀 정도가 지나고 로몸이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 사이 아곤은 애써 그곳의 일을 모른 척 했다.
아시테르가 수하들을 이용해 여기저기 반란을 일으킨 것처럼 꾸며놨기 때문.
그것을 수습하느라 아곤은 애먹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나바라스의 수하들이 목격하고 떠났다.
그렇게 얼마지나지 않아 마침내 나바라스의 진영에서 연락을 취해왔다.
그것을 기다리고 있던 아시테르가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때가 왔군.”
언노운 마법기사단의 단원들은 이미 나바라스 진영에 숨어들어있다.
로몸이 이끄는 병사들은 모두 아시테르의 병사들.
전쟁에 참여할 병사들도 이미 나바라스 진영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아시테르가 준비한 깜짝 선물(?)까지.
아시테르는 가이우스와 함께 선선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밖으로 나서는 길에 아곤과 길고트, 호르콘이 서있었다.
“조심하십시오.”
“저희 또한 병력을 이끌고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들의 말에 아시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이우스와 함께 곧바로 나바라스 군 진영으로 향했다.
수십의 흑색 깃발이 휘날렸다.
그곳의 모습을 본 아시테르가 두 눈에 이채를 띠었다.
과연, 아곤이 몇 번을 덤벼들어도 쉽게 넘볼 수 없었던 요새 다웠다.
“수비 진형이 아주 잘 짜여져 있네. 거기다 수로까지 이용해놨다니…”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아시테르를 데리러 왔던 기사가 웃었다.
기사가 성문을 열어주고 아시테르가 그 안으로 들어섰다.
아시테르는 걸음을 옮기며 성안 이곳저곳을 살폈다.
기사가 커다란 문 앞에 멈춰 말했다.
“이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