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계책 (3)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아니지, 아곤이 이런 수를 생각해 낼 리가 없어… 그렇다면 네가……?”
아시테르가 말없이 웃었다.
그 말은 곧 긍정의 표시였다.
“당했네…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당해 버렸어…….”
라바나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하니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요새를 뚫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정작 상대는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인정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도착할 때까지 네가 이곳에서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물론입니다.”
가이우스가 아시테르의 앞에 섰다.
그가 두 주먹을 부딪치며 다른 기사들을 경계했다.
이곳에 있는 기사들은 라바나스의 수족들이었다.
고르고 고른 정예들인 만큼 그 실력도 결코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가이우스는 그들을 앞에 두고도 오히려 자신만만해 하는 얼굴이었다.
“주군께는 손가락 하나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이것 참… 우리가 어지간히도 얕보였나 보네. 고작 한 명으로 버텨내려 하다니…….”
자존심 상한 라바나스가 검을 출수했다.
양손에 든 검을 보며 아시테르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일단 저 두 사람부터 제압한다!”
“예!”
“예!”
“예!!”
기사들이 무기를 들고 일시에 달려들었다.
가이우스는 맨몸으로 그들의 검을 받아 내었다.
손바닥에 검날이 닿았음에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기사의 검이 튕겨져 나가고 있었다.
“가벼운 검이로군.”
가이우스가 검을 쳐내자마자 일권을 내질렀다.
쿠웅!!!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기사 한 명이 피를 쏟아내며 뒤로 나뒹굴었다.
묵직한 한방이었다.
가이우스는 이어서 몸을 돌려 어깨를 내밀었다.
파앙!!!
검을 한껏 들어 올리며 다가섰던 기사가 그대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 순간 환한 빛무리가 가이우스를 덮쳤다.
재빠르게 양손을 교차했다.
콰아앙!!!
거친 소리와 함께 바람이 일었다.
“이걸 막아 내……?”
마력을 두른 검을 가이우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 내고 있었다.
이어진 그의 주먹에 마력이 실렸다.
콰아앙!!!!
뻗어나간 주먹이 기사를 덮쳤다.
그러나 그의 주먹은 라바나스의 검에 막혀 버리고 말았다.
“제법이로군.”
라바나스가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으며 가이우스와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과연 자신 있어 할 만한 수준이었다.
가이우스는 철옹성처럼 버티고 서서 아시테르를 지켰다.
아시테르는 그 뒤에서 주변 상황을 살피고 있을 뿐이다.
그 모습을 지켜봤던 라바나스가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너는 나의 충심을 받아 가지 못할 것 같구나.”
“그 이유는요?”
“내 힘이 네가 생각한 것 이상이기 때문이지.”
라바나스가 순간적으로 대지를 박찼다.
그녀의 몸이 튕겨져 나가듯 앞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빠른 속도로 쇄도하는 라바나스를 보며 가이우스가 자세를 취했다.
왼쪽으로 들어오는 검을 보자마자 한쪽 팔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른쪽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어 날아오던 검도 한순간 모습을 감추었다.
“흐음…….”
마치 환영이라도 본 것처럼 눈앞에서 사라지는 검.
그러나 다음 순간 환한 빛무리가 일며 가이우스의 시야를 덮쳤다.
파콰아앙!!!!
엄청난 빠르기의 쾌검이었다.
가이우스도 순간 움직임을 놓쳤을 정도.
라바나스는 멈추지 않고 연속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검끝은 모두 가이우스의 빈틈을 향했다.
가이우스는 눈으로 검을 쫓아가는 한편 양팔을 휘저으며 마력의 벽을 형성했다.
“소용없다.”
라바나스의 검이 마력으로 만든 벽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공격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거기다 물방울이 어디로 튈지 모르듯, 라바나스의 공격도 변화무쌍한 수준이었다.
“놀랍긴 하네. 카이드 말고도 저런 공격이 가능한 사람이 있었을 줄이야.”
그녀의 검술을 보며 아시테르는 순수한 감탄을 토해 내고 있었다.
아곤에게도, 린에게도 라바나스라는 인물이 대단한 실력의 검사라는 말은 들었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가이우스를 몰아붙이는 라바나스를 보며 다른 기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이제 남은 그들의 목표는 아시테르였다.
사실 가장 먼저 노려야 할 목표이기도 했다.
그를 지키는 가이우스가 라바나스에게 발목이 묶였으니.
이제 아시테르를 지켜줄만한 사람은 없다.
“마력이 없다며? 그럼 식은 죽 먹기지.”
“감히 함부로 입을 놀린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우리도 못 본 라바나스님의 얼굴을 보려 하다니… 분수를 알아야지……!”
분노한 그들이 아시테르를 향해 쇄도했다.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이 있다.
라바나스를 따르고 있는 수하들은 그녀의 얼굴이 공개되지 않도록 지켜 주려 했다.
때문에 항간에는 라바나스가 워낙 못생긴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려 투구를 쓰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외모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만 증명해 내겠다는 다짐의 표시라는 말도 있었다.
뭐가 됐든 라바나스는 이미 높은 위치에 올라선 실력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녀의 투구 속에 감춰진 얼굴을 본 자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궁금해지기도 하네.’
아시테르의 시선이 라바나스 쪽으로 향했다.
그것을 본 기사가 소리쳤다.
“여유만만한 모습이구나!! 지금 네가 무슨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모르진 않을 텐데?!”
“포기한 걸 수도 있지!”
그들의 검이 아시테르에게 닿으려는 순간, 어딘가에서 날아온 화살이 깔끔하게 검면을 때렸다.
검로가 틀어지니 검은 자연스럽게 아시테르에게서 비껴나갔다.
“어라?!”
“뭐야……?!”
그들이 놀랄 새도 없이 화살은 계속해서 날아왔다.
화살은 모두 마력으로 이루어진 화살이었다.
그런데 그 위력이 심상치 않다.
파앙!!! 파바바방!!!
마력이 실린 검인데도 불구 화살에 맞으니 힘없이 튕겨져 나갔다.
그나마 그중에서도 실력 있는 기사들은 화살을 막아내며 상대를 찾았다.
“웬놈이냐?!”
“모습을 드러내라!!!”
“비겁하게 숨어 있지 말란 말이다!”
그들의 말에도 화살은 멈추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날아왔다.
정신없이 날아오는 화살 세례를 받아내며 기사들이 주변을 살폈다.
그때 아시테르의 곁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늦은 건 아니지?”
“아주 좋은 시기에 왔어.”
아시테르가 고개를 위로 젖혔다.
어느새 위쪽에는 사슬로 이루어진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아시테르는 사슬의 주인이 누군지 알고 있다.
에스파는 사슬을 이용해 마음대로 위치를 이동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쏘는 화살이 사슬에 튕겨져 나가며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
“굳이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되지 않아?”
한쪽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에이브릴이 에스파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볼에 바람이 들어간 것을 보니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아시테르는 우리들의 대장이잖아.”
“그치만 원래 선두에 나서길 좋아하는 스타일이잖아.”
“아하하하 그래도 급이 다르지. 이 정도는 우리 선에서 처리해 줘야지 않겠어?”
에스파가 활을 들어 올렸다.
마력이 더욱 타오르며 마치 푸른 불길이 활을 감싸 안는 것처럼 보였다.
“오오……?!”
이를 본 아시테르가 두 눈을 반짝였다.
저 마법은 또 처음이었다.
파아앙!!!
피슈우웅!! 피슝!!!
더욱 강한 위력의 화살이 대기를 갈랐다.
라바나스의 수하들이 방패를 들어 올렸다.
“고작 매직 에로우일 뿐이다!”
“밀고 들어간다!!”
“뒤에 바짝 따라붙어라.”
그들의 말을 들은 에스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입가를 실룩인 그가 활을 하늘로 겨냥했다.
“고작… 매직 에로우…? 하… 이미 한번 경험해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온다 이거지? 내가 너무 사정을 봐줬나…….”
에스파가 하늘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자 수십 갈래로 갈라진 화살이 상대 기사들을 노렸다.
그 위력은 애써 말할 필요도 없었다.
파콰가가가가가강!!!!!
마치 유성우라도 쏟아지는 것처럼 퍼붓는 화살 세례 때문에 기사들은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정신없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직접 화살을 막아 내면서도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기초 마법 중의 하나인 매직 에로우가 이런 위력을 내다니…….
눈으로 보고도, 직접 겪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그들의 발밑에서 사슬이 움직였다.
“내 남편한테… 말을 함부로 하면 곤란한데…….”
에이브릴의 사슬이 적들의 한 가운데를 휘저었다.
뱀처럼 휘어진 사슬들의 공격에 기사들이 검을 휘둘렀다.
그 틈으로 날아오는 화살 공격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딴 잔재주를!!”
그때 누군가 화살과 사슬을 동시에 파쇄했다.
라바나스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소르하였다.
그가 금발 머리를 흩날리며 몸을 날렸다.
소르하도 엄청난 빠르기로 움직였지만 에스파만큼은 아니었다.
에스파는 소르하보다 더욱 빠르게 움직이며 활을 쐈다.
움직이며 활을 쏘는데도 위협적이면서도 위력적인 공격을 퍼붓는다.
상대가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님을 깨달은 소르하도 더욱 공격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황색 물결의 검기가 사방을 갈랐다.
“오… 좋은 검술이네.”
아시테르는 여전히 가만히 서서 그들의 전투를 구경하고 있었다.
몇몇 기사들이 그 틈을 노리려 했다.
그러나 어느새 도착한 다른 동료가 그들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었다.
“미안하지만 거기까지예요.”
솟구친 가시덤불이 아시테르를 보호했다.
아시테르가 여유롭게 뒤를 돌아보았다.
“왔어?”
“맡겨주신 일은 다 처리했어요.”
세아츠리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녀의 미모를 본 몇몇 기사들이 순간 본분을 잊고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 사이 가시덤불은 걷잡을 수 없이 퍼지며 건물의 대부분을 파괴했다.
“일단은 거기서 얌전히 있어 주시겠어요.”
세아츠리스가 가시덤불로 커다란 새장을 만들어 냈다.
그곳에 갇힌 기사들은 이번에도 역시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몇몇 기사들이 가시덤불을 자르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세아츠리스의 마법은 그들이 감당해 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대지를 뚫고 나온 가시덤불이 순식간에 그들을 제압해 버렸다.
“아…….”
에스파를 쫓던 소르하도 그때서야 주변에 시선을 돌렸다.
건물이 부서지니 주위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소르하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 버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절대 함락될 것 같지 않았던 흑군의 중앙 요새가 어느새 적들의 깃발로 가득해져 있었다.
게다가 그 색은 놀랍게도 하얀색이 아닌 황색이었다.
“아곤이… 패배했었단 말이야……?”
이건 소르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결국 아시테르에게 소르하를 포함한 모두가 완전히 속아 버리고만 것이다.
시선을 돌리니 여기저기 아곤의 수하들이 보였다.
벌써 몇 번이고 전투를 치러봤으니 그 얼굴들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헌데 그들이 들고 있는 깃발은 백색기가 아닌 황색기였다.
“라바나스님…….”
소르하의 시선이 라바나스를 쫓았다.
그녀는 상대하던 가이우스를 뚫고 아시테르에게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에스파의 화살이 라바나스를 겨냥했다.
몸을 일으킨 가시덤불이 라바나스를 막아섰다.
콰드드드득──!!
분노를 담은 일격이 가시덤불을 단칼에 잘라 버렸다.
몸을 비틀어 화살까지 피해 낸 라바나스가 사슬을 발로 튕겼다.
그녀가 보여 주는 몸놀림은 감탄을 금치 못할 수준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아시테르가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가 직접 나서는 것을 본 세아츠리스가 가장 먼저 마법을 거두었다.
에스파도 활시위를 당기는 것을 멈추었다.
에이브릴의 사슬은 어느새 아시테르의 곁을 맴돌았다.
라바나스가 이를 악물었다.
이번 일격에 끝내 버려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라바나스가 두 개의 검과 하나가 된 것처럼 빠르게 질주했다.
아시테르는 가만히 서서 검을 들고 그녀의 공격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를 본 라바나스가 자세를 더욱 낮추었다.
“나는 지지 않ㄴ…….”
쿠우우웅───!!!!
하늘에서 떨어진 창이 라바나스의 검격을 막아 내었다.
거센 충격파와 함께 창날이 대지에 깊숙이 박혔다.
창 위에 올라탄 카이드가 뒤로 튕겨져 나간 라바나스를 내려다보았다.
“너는 뭐야?”
이를 본 아시테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눈치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