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황군과 홍군
“대장님께 알립니다.”
“무슨 소식이냐? 라바나스와 아곤의 싸움이 결판이라도 난 건가?”
“그렇습니다.”
“호오… 그거 흥미롭군. 그래서 흑군이냐 아니면 백군이냐?”
“그게…….”
기사가 잠시 멈칫했다.
그가 머뭇하자 카일리어가 인상을 찌푸.렸다.
“뭔데 뜸을 들이는 건가?”
“흑군도 청군도 아닙니다. 온통 황색물결이었습니다.”
“황색…? 그렇다면 그 아시테르인가 뭔가 하는 녀석이 라바나스와 아곤을 이겼다는 말이냐?”
“예…….”
“이것 참 뜻밖이로구나.”
카일리어가 턱을 매만졌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카일리어는 라바나스의 승률을 60%로, 아곤의 승률을 40%로 점치고 있었다.
아곤의 공격력이 대단하긴 하지만 라바나스의 수성을 뚫진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두 세력이 계속 소모전을 벌여도 좋다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파우트의 청군을 부수고 그곳으로 쳐들어가면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헌데 그 두 사람이 아닌 아시테르가 그곳의 주인이 될 줄이야..
“이제 딱 두 개의 세력만 남았습니다. 마침 한달 간 이어지는 경쟁전도 이제는 3일 밖에 남지 않았구요.”
“그렇다면 답은 역시 하나밖에 남질 않았잖나.”
“전면전입니까?”
“그래. 그래도 린 공주님께서 보는 안목은 있는 모양이로구나. 설마하니 그 자가 최종적으로 나의 상대가 될 줄이야.”
“라바나스와 아곤을 무너트렸으니, 결코 얕볼 수 없는 상대일 것입니다.”
“알아본 바에 따르면 아시테르의 곁에는 과거 함께 하던 동료들이 있다고 합니다.”
“과거 함께 하던 동료들? 그게 누구냐?”
“그게… 자세히 조사해보니 이스트 왕국에서 활동하던 자들입니다.”
“이스트 왕국?”
의외의 장소가 등장하자 카일리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스트 왕국이 갑자기 여기서 왜 나온단 말인가?
그보다 이스트 왕국이라면 검을 포기하고 마법만을 택했던 왕국이었다.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카일리어도 이스트 왕국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 모두 마도사들이라는 얘기.
“사우스 왕국에게 점령당한 약소국 아닌가? 그렇다면… 이스트 왕국에서 망명한 자들인가보군…….”
“헌데 이스트 왕국의 기사들만 속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스 왕국과 마녀숲 그리고 신원을 알 수 없는 자도 있습니다.”
“마녀숲? 마녀라도 있다는 말인가?”
카일리어의 물음에 기사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답에 카일리어도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마녀라니… 말이 되는 얘기를 해라. 마녀가 어째서 인간들과 함께 한단 말이냐?”
“그게… 정확한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들과 함께 하고 있는 마녀는 마녀숲에서도 상당한 위치에 있는 하이 등급의 마녀라 합니다.”
“콰트로라도 된다더냐?”
카일리어의 말에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일리어가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없다. 콰트로는 마녀 여왕을 보호하는 존재. 그런 존재가 마녀숲을 나와서 인간들의 세상에 관여하다니.”
“하지만 확인한 바에 의하면…….”
“어디 노예 시장에서 주워온 마녀쯤 되겠지. 뭐, 상관없다. 상대가 누구든 우리는 방심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부순다.”
“알겠습니다!”
“예!!”
카일리어는 곧바로 군세를 정비했다.
새로 편입된 군사들도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파우트의 군사들은 소리없는 진군으로 유명하다.
그들의 기동은 은밀하고 신속하다.
카일리어는 그 점을 이용하려 했다.
“우선 파우트의 군사들이 이곳을 칠 거다.”
“가장 먼저 공략하는 곳은 이쪽인 겁니까?”
“그래. 라바나스가 만들어낸 요새는 분명 대단한 수비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공성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파우트와 함께 하는 마도병단은 강한 위력을 낼 수 있다. 그들로 하여금 공성을 시작하게 하면 돼.”
“방심한 상대는 당황하겠군요.”
“설마하니 우리들이 라바나스의 거점을 먼저 공격해올 것이라는 생각은 못하겠지. 물론 우리들 또한 군사를 이끌고 이곳으로 향해 녀석들의 시선을 훔친다.”
카일리어가 가리킨 곳은 아곤의 거점이 있는 곳이었다.
파우트가 슬쩍 손을 들었다.
“전면전을 펼치려면 우리 정예도 그쪽으로 보내는 것이 낫지 않나?”
“후후 상관없다. 그대는 라바나스의 성을 함락하는데 총력을 기울여 주면 된다.”
“그 이후에는?”
“이쪽으로 남하하면 상대는 양옆에 적을 두게 되지.”
“양동작전이 가능해진다는 얘기인가.”
“바로 그렇다.”
“이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것 같은데.”
“현재 저쪽에도 우리 첩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들을 이용하면 작전은 더욱 수월해질 테지.”
“알겠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잘 부탁한다.”
“내가 패배했으니… 자네라도 꼭 이겨서 로얄나이츠에 입단해야지.”
파우트가 손을 내밀었다.
카일리어가 그 손을 마주잡으며 웃었다.
* * *
같은 시각, 아시테르 또한 쉬지 않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우선적으로 라빈과 자비토에게 부탁해 내부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곳 안에도 첩자들이 있을 것을 예상해 거짓 정보들을 흘리고 있었다.
여러 얘기들이 나오니 본래 있던 수하들도 어리둥절해할 정도였다.
라바나스와 아곤은 아시테르의 앞에서 조용히 얘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전면전을 하겠단 말씀이시지요?”
“승산은 얼마나 될까요?”
두 사람의 물음에 아시테르가 자신 있게 말했다.
“백퍼센트. 우리들의 승리로 끝날 겁니다.”
“어떻게 그리 자신할 수 있는 겁니까?”
“카일리어와 파우트가 힘을 합쳤다면… 그 세력의 규모는 이쪽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 없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아시테르는 다른 생각이었다.
“반키라스. 어땠어? 두 세력간의 싸움은?”
“생각보다 좋았습니다. 볼만하더군요.”
“전력차 비교는?”
“파우트 군은 은밀한 기동에 장점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카일리어 군도 생각보다 고전하더군요. 반면 카일리어 군은 다방면으로 준비된 군대 같았습니다. 특화된 것은 없지만 딱히 부족한 능력도 없는 정예병들입니다.”
“주의해야 할 건?”
“파우트의 밑에는 쌍둥이 기사가 있습니다. 두 기사의 실력은 꽤 좋은 편이지만… 글쎄요. 수련 받고 있는 길고트님과 호르콘님이 나서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금 신경 쓰이는 것은 카일리어의 밑에 있는 네 명의 강자들입니다.”
“신경 쓰이는 이유는?”
“두 명의 실력은 확인했습니다만… 남은 두 명은 아직 실력 확인을 못했습니다. 그래도 뭐… 이쪽도 워낙 괴물 같은 사람들이 있으니 문제될 것 있겠습니까.”
반키라스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당장 세아츠리스나 카이드만해도 충분히 로얄나이츠를 노려볼 수 있을만한 실력자들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거느리고 있는 아시테르였다.
어디 그뿐인가.
그 실력에는 조금 못 미쳐도 자비토나 에스파, 다른 이들도 어디가서 뒤지지 않을 최상급 강자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누가 아시테르 군을 막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지금은 라바나스와 아곤이라는 강자들도 합류한 상태였다.
“뒤지게 불리할 때도 늘 승리로 이끌던 스승님인데… 이렇게 유리한 상황이면 뭐… 말 다 했죠.”
반키라스의 옆에 있던 크로마제가 한 마디 거들었다.
곁에서 보면 참으로 신기한 광경이었다.
대체 저들은 어떤 경험들을 해왔기에 아시테르라는 사람에게 저토록 무한한 신뢰를 보이는 것인가.
나름 오랫동안 함께 해왔다고 자부한 자신들의 수하조차도 저만한 신뢰를 선뜻 내비추진 않는다.
자리를 빠져나온 아곤이 라바나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신기하군… 나는 물론이고 설마 라바나스 너까지 저 사람을 따르게 될 줄이야.”
“나는 이미 충성을 다하기로 마음 먹은 상태다.”
“응….? 기사의 충성을 바치겠단 말이냐? 단순히 경쟁전 때문이 아니라?”
“그래.”
“이해할 수 없군… 누구보다 다른 사람들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는게 너 아닌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사람이다. 아시테르님은 경쟁전을 바라보고 있지 않아.”
“경쟁전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알아들을 수 있게 좀 설명 해봐.”
“경쟁전은 주군께 스쳐 지나가는 과정일 뿐. 로얄나이츠에 입단하는 것도 어쩌면 목표하신 바를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일지도 몰라.”
“하! 누군가는 로얄나이츠라는 자리를 갈망하는데… 대장에겐 그 자리가 수단에 불과하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더군.”
“흐음…….”
아곤도 잠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이스트 왕국에서 온 망명자가 이곳에서 원하는 것이 뭐가 있을까.”
“글쎄. 곁에 린 공주님이 계신 것만해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호오… 뜻이 거기에 있다는 말인가?”
“아시테르님은 웨스트 왕국에 적을 두지 않았으니, 가장 기반을 쌓기 좋은 방법이 로얄나이츠가 되는 것 아닐까.”
“쳇… 그러고보면 문득 기분이 상하기도 하네. 결국 다른 나라에서 온 자가 로얄나이츠에 오를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말이 쉽지. 그게 실제로 가능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라바나스의 말에 아곤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그대로였다.
‘당신은 이방인이니 이곳에서 인정받으려면 로얄나이츠에 입단해 보시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과감하게 도전해 볼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사실 이건 웨스트 왕국 최강 10인에 들어가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이번 경쟁전은 기반 세력이 없으면 아예 참가조차 불가능 했다.
그런데도 아시테르는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세력을 구축해 경쟁전에 들어선 것이다.
거기다 귀족들로 가득한 참가자들의 빈틈을 정확히 파고드는 시선도 갖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대단하긴 하네.”
“너도 아시테르님에게 반해 따르고 있던 것이 아니었나?”
“뭐… 인정하긴 해.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치사한 정보전에 당해…….”
“그게 아니었다면? 이길 수 있었을 것 같나?”
“그건…….”
“나는 자신 없다. 몇 번을 싸우던 나는 아시테르님의 손바닥 위에 있을 거다.”
“이봐 라바나스. 한번 패배했다고 너무 자신을 낮추는 것 아냐?”
“나를 낮추는 게 아니야. 아시테르님이 나의 위에 있음을 인정한 것이지.”
“허어… 그럼 뭐 하나만 물어보자.”
아곤의 말에 라바나스가 물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라바나스와 얘기를 오래 나누는 것도 처음이긴 했다.
그래도 문득 그녀의 생각이 어떤지 궁금해지는 것이 있었다.
“알아보니 아시테르님은 이스트 왕국에서 잘나가던 기사단의 단장이었다고 한다. 그 말은 뭐야? 로얄나이츠가 되어서 군사권을 갖게 된 후 사우스 왕국으로 복수를 하러 갈 수도 있다는 말이야. 그렇게 전쟁이 시작되면 너는 정말로 저 사람을 따라 전쟁까지 참여할 생각이냐?”
“나를 필요로 하신다면 얼마든지.”
“하아…?”
“벌써 까먹었나? 나는 이미 아시테르님께 충성을 다하기로 한 몸이다. 그분의 기사로서 전장에 함께 할 것이다.”
“이것 참…….”
아곤도 머릿속에 혼란이 오고 있었다.
물론 아시테르라는 사람에게 호기심이 생기고, 그의 능력을 인정하기는 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무언가가 없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아곤은 아시테르가 경쟁전이 끝나도 자신을 따르라고 따로 말을 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 혼자서 고민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서둘러서 판단할 필요 없잖나. 일단은 좀 더 두고 봐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