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경외
먼저 움직임을 보인 것은 여우였다.
녀석은 아시테르가 자신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라 판단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아주 정확했다.
아시테르가 위협적인 기세를 내뿜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아시테르의 실력 행사를 처음 보는 라바나스로선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시테르님을 도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녀가 옆에 있는 가이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가이우스가 웃는다.
“주군의 실력이 못 미더우십니까?”
“마력이 없는 분인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시테르님은 마력으로 싸우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마력으로 싸우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시테르님은 조금 더 특별한 힘을 사용하십니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이로군요.”
“이제 지켜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우리들의 역할은 그저 아시테르님의 싸움을 방해하려는 작은 마수들을 처치하는 겁니다.”
가이우스가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초거대 마수인 여우 주변으로 많은 짐승형 마수들이 울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과거 하이브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던 마수가 자연스레 떠오를 정도였다.
가이우스는 아시테르의 오른편으로 걸어갔다.
그쪽에서 맹렬히 돌진해 오는 마수를 주먹으로 쳐냈다.
어느새 곁에 붙은 라바나스가 검으로 마수들을 베었다.
“마수를 상대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렇습니까.”
“본래 사람들을 상대하는 쪽이었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말씀 하십시오.”
“이전에도 아시테르님은 마수 사냥에 나서셨습니까?”
“인간을 상대할 때와 마수 사냥할 때의 아시테르님의 모습은 많이 다를 겁니다.”
“예……?”
라바나스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다르다는 얘기일까.
그녀의 반응은 당연했다.
아시테르를 많이 겪어본 사람들도 그 차이를 처음엔 혼란스러워 하니까.
마수들을 상대할 때의 아시테르는 지나치리만큼 무자비해진다.
세상의 원수가 따로 없을 정도로 마수들에게 차가워지는 게 아시테르였다.
그것은 지금 상황만 봐도 그러했다.
콰아아앙──!!!
아시테르의 검격에 수십 마리의 마수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럼에도 아시테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여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우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아시테르를 찢어발기려 했다.
대지를 박찬 아시테르가 날렵한 움직임으로 여우의 공격을 피해냈다.
이어 그가 검을 휘두르자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 보였다.
“키야아아오오오──!!!”
여우의 비명이 들린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공간이 일그러지는 곳 중심에 여우의 발이 있었다.
우두두둑 소리와 함께 여우의 발이 기이하게 휘었다.
이어 날카로운 발톱도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버렸다.
“저건 대체 무슨 공격이냐……?”
베는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마수의 신체 일부가 기이하게 뒤틀렸다.
핏물이 흘러나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여우는 굉장히 괴로워 보였다.
후우우우웅──!!!
녀석이 또다시 꼬리로 검은 구체를 형성해 냈다.
마기를 잔뜩 머금은 검은 구체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어림없는 짓이야.”
어느새 허공으로 도약한 아시테르가 검을 내리찍었다.
그러자 주변 일대 공기가 무거워지며 검은 구체를 그 자리에 떨어트렸다.
이 힘에 휘말린 마수들의 비명이 또다시 터져 나왔다.
여우는 눈앞의 인간을 죽이기 위해 번갯불 같은 마기를 입으로 쏘아 내었다.
아시테르는 검을 들어 다가오는 공격들을 쳐냈다.
파콰아앙!!!!
사방에서 옥죄여 오는 공격들.
그 틈에서 아시테르는 여우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콰드드득!!!
아시테르의 검격에 여우의 몸이 또다시 뒤틀렸다.
공간을 일그러트리는 공격 때문에 여우도 속수무책이었다.
둘의 싸움을 보며 카일리어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저 사내의 실력이 저 정도였나……?”
어느 정도 숨겨진 수들이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솔직히 말해 저 정도의 실력을 감추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초대형 마수를 상대로 아시테르는 전혀 물러섬이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전투가 너무나도 과격해 함부로 끼어들 틈조차 없다.
“어떤가? 자네들이 보기에 저 전투에 끼어드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역시 그렇게 생각하나…….”
“이미 황군은 그렇게 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사들이 오른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왼쪽 편에는 카일리어의 군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카일리어가 손을 들어올렸다.
판단은 빨라야 한다.
그는 왼쪽 편으로 물밀 듯 밀고 들어오는 마수들을 향해 진격 명령을 내렸다.
어차피 초거대 마수는 아시테르가 맡고 있으면 된다.
조금은 기분 상하는 일이지만 일단은 카일리어 군도 아시테르의 보조를 맞춰 주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아시테르의 수하들이 오른쪽, 카일리어의 군대가 왼쪽을 맡아 주는 양상을 띠었다.
이를 지켜보던 엔류아가 광역 힐링 마법을 시전했다.
그녀의 마력이 군사들을 뒤덮자 피로가 물러가고 작은 상처들이 회복되었다.
엔류아는 회복 마도사들을 이끌고 카일리어 군대 쪽으로도 이동했다.
처음 엔류아와 회복 마도사들을 경계했던 카일리어 군의 기사들도 그들이 회복 마법을 쓰는 것을 보고 경계심을 풀었다.
“저희들도 도울게요.”
마수들 앞에서 인간은 모두 똑같다.
마찬가지로 엔류아는 마수들을 상대하는 인간들은 모두 동료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것 덕분에 그녀는 조금 전에 치열한 전투를 벌였음에도 불구 카일리어 군을 치료해 주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이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아시테르의 황군은 카일리어 군의 전선이 밀리는가 싶으면 과감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카일리어의 군사들도 그들을 따라 똑같이 행동했다.
마수라는 공통의 적이 있고, 이곳에 모인 기사들은 모두 웨스트 왕국의 국민들이었다.
그들은 이곳에 있는 마수들이 이대로 나아간다면 근처 영지의 사람들까지 위험할 수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힘을 합치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경쟁 따위는 잠시 잊고 본분을 다하는 모습을 보며 카일리어 또한 많은 생각에 잠겨들고 있었다.
그 사이 아시테르는 엄청난 전투 실력을 뽐내며 여우 마수를 압박하고 있었다.
아시테르의 검술을 보며 아시테르 군은 물론 카일리어의 군사들조차 그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쿠르르르릉──!!!!
아시테르의 검격이 여우의 꼬리를 자르는데 성공했다.
꼬리가 잘린 여우가 사나운 울음을 토해 냈다.
그러자 이에 반응하듯 짐승형 마수들이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후콰아아앙──!!!
퍼버버벅!!!!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마수들이 쏟아져 나왔는지 궁금할 정도.
그러나 이곳에 모인 웨스트 왕국군은 모두 정예들.
경쟁전을 치르기 위해 뽑히고 뽑혀온 자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여우 마수와 다른 마수들은 운이 없는 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웨스트 왕국의 강군이 하필이면 근처에 있었으니까.
그것을 증명해 내듯, 홍군과 황군이 거침없이 마수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전열이 뒤섞였음에도 그들은 뒤엉키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왔던 것처럼 하나의 군대처럼 움직였다.
여기엔 다른 지휘관들의 역할이 컸다.
아곤과 라바나스도 훌륭한 지휘관이었지만, 카일리어와 그의 수하들도 오랜 세월의 전투 경험이 있는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심중을 읽으며 전장을 지휘했다.
그 선두에는 카일리어가 있었다.
용병술이 뛰어난 인물인 만큼 그는 적재적소에 군대를 배치했다.
인간도 아닌 마수들과의 싸움인 만큼 적들의 움직임은 예상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마수들은 그저 본능에 의지해 싸운다.
그러니만큼 체계적인 움직임이 없었다.
“차륜진이다!!”
카일리어의 명령에 기마병들과 보병들이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사납게 달려들던 마수들은 옆에서 튀어나오는 병장기에 가죽이 뚫려 버리고 말았다.
진형을 바꾸니 마수들도 곧장 반응해 내지 못했다.
그러다 종종 강한 힘을 지닌 마수들이 튀어나왔다.
놈들은 본신의 힘으로 진을 뚫어내려 했다.
일반 병사들과 기사들이 상대하기에는 상당히 강한 존재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지휘관 급 기사들이 출동했다.
가이우스가 빠르게 내달리며 묵직한 주먹을 휘둘렀다.
투콰아앙!!!
강렬한 소리와 함께 곰을 닮은 마수가 힘없이 튕겨져 나갔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마수의 머리통을 부순 가이우스를 보며 카일리어 군의 기사들도 감탄을 터트렸다.
거기다 언제 합류한 것인지 다른 언노운 마법기사단의 단원들도 전장에서 빛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에스파의 화살이 마수들의 급소를 뚫고, 세아츠리스의 마법이 주변 군사들을 보호했다.
이어 그녀의 가시덤불은 덮쳐오는 마수들까지 꿰뚫어 버렸다.
“그래 이거지!!!”
지난 번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지 못했던 라빈이 전장의 한 가운데로 떨어졌다.
그녀를 중심으로 대지를 뚫고 나온 새하얀 뼈들이 마수들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양손에 날카로운 뼈를 든 라빈이 마수들을 향해 쇄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스파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정도면 대체 누가 마수인 거냐……?”
“아름답지 않나?”
“야 자비토… 같이 붙어 다니더니 너까지 이상해진 건 아니지…? 저 모습이 어디가 아름다워?”
“내 눈에는 더없이 아름다워 보인다.”
“하, 거참 이상하네… 내 눈이 이상한 건가… 아니면 네가 이상한 건가…….”
에스파의 시선이 다른 쪽을 훑었다.
새하얀 뼈를 들고 마수들과 싸우는 라빈.
그녀를 바라보는 기사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그때 쇠사슬이 허공을 가득 메우며 달려드는 마수들을 사정없이 쳐냈다.
“상황은 어떤 것 같아?”
에이브릴이 에스파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에 에스파가 차분히 전장을 살폈다.
현재 아시테르는 초거대 마수와 홀로 전투를 벌이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
그를 대신해 군대를 지휘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놀랍게도 카일리어가 그 역할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카일리어의 군대가 선두에 서기 시작하고 가이우스나 아곤, 라바나스가 그 보조를 맞춰 주고 있는 형태였다.
덕분에 아시테르도 여우와의 전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카이드는?”
“아직도 파우트와 싸우는 중.”
“결판이 쉽게 날 것 같지는 않지?”
“생각보다 엄청 강하던 걸… 그 검제의 제자라는 사람.”
“일단 그쪽은 알아서 하라고 하고 우리들은 이 전투의 마무리를 짓자.”
“그렇지 않아도 저쪽도 전투가 마무리 되어가는 것 같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엔 아시테르가 있었다.
아시테르는 결국 홀로 초거대 마수를 쓰러트리는데 성공했다.
그 모습을 라바나스와 아곤은 넋을 잃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군…….”
“저렇게나 강한 마수를 혼자서… 그동안 힘을 감추고 계셨구나…….”
라바나스는 새어 나오는 헛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이는 아곤 또한 마찬가지.
“대체 공주님께서는 어디서 저런 사내를 데려온 것인지…….”
“이걸로 확실해졌어 아곤.”
“네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다. 라바나스.”
“이번 경쟁전에서 승리를 거두는 사람은 아마 아시테르님이 될 거다.”
결국 초거대 마수인 여우가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꼬리는 모두 잘려나가 있었고 녀석의 털은 어느새 피로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마수가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쓰러진 마수 위에 올라선 아시테르가 검을 늘어트린 채 전장을 살폈다.
그 고고한 모습에 순간 경외감마저 들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