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이종족들의 왕국 (1)
아시테르는 곧바로 군을 이끌고 헬라이번의 왕국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가 행하는 일의 귀추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다른 로얄나이츠들에게도 꽤나 흥미로운 주제였다.
로얄나이츠가 웨스트 왕국의 최강 10인이라는 말이 있는 만큼, 그들의 활동이 다들 활발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로얄나이츠는 세상과는 조금 떨어져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자그마한 행동이라도 많은 여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로얄나이츠는 움직임에 있어 늘 조심을 기했다.
그런 가운데 새롭게 로얄나이츠에 입단한 아시테르가 곧바로 헬라이번과의 전쟁을 선포하니 참으로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아시테르는 경쟁전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자신의 수하로 끌어들였다.
이것 또한 다른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대체 어떠한 매력과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경쟁전에서 패배한 이들이 모두 아시테르의 산하로 들어갈 것을 희망했을까.
더군다나 그들 중에는 유망한 인재였던 카일리어도 있었다.
카일리어를 차기 왕권을 이어갈 주자로 생각했던 몇몇 귀족들은 그의 결정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몇몇 귀족들이 카일리어를 찾아갔지만 돌아온 대답은 하나였다.
“나의 손바닥으로는 하늘을 가릴 수 없었네.”
그가 말하는 바가 대체 무엇이었을까.
의문만을 남긴 채 카일리어는 아시테르의 출정을 도왔다.
카일리어와 아곤, 라바나스 같은 굵직한 인물들이 대거 아시테르의 수하를 자처하니, 그 세력 또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모두가 그들을 주시하는 가운데 무려 3만이나 되는 정예병이 서쪽 끝에 모였다.
이들이 향하는 곳은 헬라이번의 영토.
붉은 협곡 앞에 당도한 아시테르가 감회에 젖은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도마뱀처럼 생긴 마수, 사우라가 무리를 지어 이동하고 다녔다.
“이 붉은 협곡을 지나려면 어쩔 수 없이 사우라 떼와 전투를 벌여야 합니다.”
카일리어가 앞쪽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쓸데없는 전투는 피할 수 있을 겁니다.”
“예?”
전투 준비를 명령하려던 카일리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의문이 드는 것이 하나 있었다.
헬라이번의 왕국을 공격하는 것치고 너무나 적은 병력이 모여 있었다.
지난 번 헬라이번 왕국을 공격했을 때는 5만의 병력이 출정했었다.
전부 정예만 모였다곤 하나 3만은 그보다 적은 숫자.
이번에 많은 세력들을 거둔 아시테르는 당장 가용할 수 있는 병력만 9만이 넘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9만의 모든 병력을 소집하진 않았다.
첫 출정이니 만큼 대군으로 헬라이번의 왕국을 쓸어버리는 것도 나쁜 계획은 아니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게 아시테르라는 이름을 웨스트 왕국 국민들의 뇌리에 새기는 것이다.
그것만큼 강렬한 시작은 없을 것이라 여겼다.
웨스트 왕국은 더욱 아시테르에게 열광할 테고 그만큼 아시테르의 입지는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이것까지 생각에 집어넣고 있었지만 아시테르는 카일리어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카일리어가 물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붉은 협곡을 횡단하실 생각입니까?”
“이미 모든 계획은 마쳤습니다.”
아시테르는 이번에도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말했다.
그의 수신호에 데미리우스가 움직였다.
그가 만들어낸 주머니를 곧 모든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주머니에서는 시큼하고도 이상한 냄새가 났다.
“이게 무엇입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사우라가 싫어하는 냄새입니다.”
“사우라가 싫어하는 냄새라고요……?”
“우리 군이 이 냄새를 풍기면서 진군하는 한 사우라 떼는 결코 우리를 향해 접근해 오지 않을 겁니다.”
“겨우 그런 방법으로…….”
“겨우라니요. 불필요한 전투를 하지 않고 빠르게 적국으로 향할 수 있게 해주는 방법입니다.”
아시테르가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헬라이번의 왕국이 있었다.
“헬라이번 역시도 첫 번째로 맞닥뜨려야 하는 관문은 사우라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만약 그 관문을 거치지 않고 빠르게 통과한다면?”
“적의 입장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겠군요…….”
“그 느낌은 제가 잘 압니다.”
아곤이 기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경쟁전 때의 기억이 자연스레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때는 정말 귀신에 홀린 줄로만 알았다.
자신이 아는 정보는 모두 거짓된 것이었으니까.
알고 있는 모든 것이 부정당할 때의 참담한 기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
그 앞에 찾아온 거대한 적.
그토록 완벽한 패배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아주 크게 당했었지?”
“쩝… 그때는 어쩔 수 없었지.”
“다시 상대해 본다면?”
“그때보다는 방심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뭐 이기지는 못했을 거다.”
라바나스의 물음에 아곤이 순순히 답했다.
곁에서 겪어보니 아시테르와 언노운 마법기사단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들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경쟁전에서 그들은 본신의 실력을 다 발휘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뭐… 널 놀릴만한 처지는 아니었어. 완벽히 당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니까.”
라바나스가 새삼 아시테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 역시도 아시테르의 계략에 꼼짝없이 당해 버리고 말았다.
“아무튼 그때는 완전 하얗게 질려 버렸다니까… 아마 헬라이번 그놈도 크게 당황할 거다.”
“그렇겠지. 이대로 전투 한번 없이 붉은 협곡을 통과한다면 병력의 손실도 없는 채로 헬라이번의 왕국 코앞까지 다가가게 되는 거니까.”
아시테르의 명령에 따라 군사들 모두가 허리춤에 주머니를 차고 이동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기사들과 병사들도 막상 사우라 떼가 이곳을 피해가기 시작하니 곧 안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3만이나 되는 군사가 아무런 전투 없이 붉은 협곡을 건널 수 있었다.
카일리어의 시선이 아시테르의 진영으로 향했다.
언노운 마법기사단은 긴장감이 없는 건지 아니면 자신감이 넘치는 것인지 평소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근데 어떻게 할 생각이야?”
에스파가 아시테르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아시테르가 고개를 돌려 에스파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니?”
“헬라이번이라는 자. 반인반수라며? 게다가 왕국 내에는 붙잡혀 있는 인간들도 많다던데… 자칫 잘못했다간 그들을 붙잡고 협박을 가해 올지도 모르잖아.”
“일단은… 대화가 통하는 상대인지부터 파악해야겠지.”
“대화가 통한다면?”
“붙잡은 인간들을 모두 풀어 주고 적당한 타협을 보는 쪽으로.”
“그게 될까? 아니 그보다… 네가 그런 말을 한 다고? 마수는 무조건 다 죽이는 쪽 아닌가?”
“판단이 안 서서 그래. 반인반수가 어떤 느낌인 건지…….”
아시테르가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이런 표정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헬라이번이 다스리는 왕국.
그곳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인간들이 그곳에서 가축으로 키워지고 있다곤 하지만 어느 누구하나 직접 눈으로 확인한 자가 없다.
그렇다고 마수들이 관리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헬라이번과 다른 마수들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웨스트 왕국에서는 다른 곳과 전쟁을 벌이면 헬라이번의 군대가 빠져나와 틈을 노릴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웨스트 왕국에서 다른 곳과 전투를 벌일 때 헬라이번의 왕국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이는 아시테르가 특별히 부탁해 린이 알아봐주었으니 확실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웨스트 왕국 사람들은 헬라이번의 왕국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일까.
“아마 미지(未知) 때문이겠지.”
“알지 못해서?”
“저들에 대한 정보가 없어.”
“그러게… 여러 방면으로 알아봤지만 워낙 폐쇄된 곳이라 알아낼 수가 없더라고.”
“저 또한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뭐… 그러니 직접 가 보면 알 수 있겠지.”
아시테르는 3만의 병력을 이끌고 붉은 협곡을 아무런 피해 없이 건넜다.
* * *
같은 시각, 이들의 움직임을 알고 있던 헬라이번은 깊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인간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헬라이번님.”
“그 수가 적지 않습니다.”
“사우라 떼가 어째서인지 인간들을 피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방법을 찾은 모양인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헬라이번의 양옆으로 늘어선 신하들이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잠시 눈을 감고 고민에 잠겨 있던 헬라이번이 이내 눈을 떴다.
“어쩔 수 없지. 전쟁이다.”
“전쟁을 시작하시려는 겁니까.”
“그렇게 되면 피해가 너무 클 겁니다.”
“차리리 제가 나서서 대화를 하고 오겠습니다.”
갈색빛깔 머리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그를 보며 다른 마수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체이즈. 그대의 마음은 알겠지만… 인간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자네와 같은 것은 아니다.”
“맞는 말이다. 인간들 중 우리 왕국의 존재를 인정해줄 수 있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 것 같은가?”
그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문제는 헬라이번 역시도 그들과 같은 마음이라는 점이었다.
“인간들은 믿을 수 없다…….”
“하지만 헬라이번님 저 또한 인간이지 않습니까. 거기다 다른 이들도…….”
“그래. 너희가 ‘특별할’뿐이다. 모든 인간들이 그렇지 않아. 그러니 놈들이 우리들의 삶의 터전을 위협하려 한다면 그저 지켜낼 뿐이다.”
헬라이번이 몸을 일으켰다.
붉은 빛 비늘이 햇살을 받아 더욱 빨갛게 빛을 냈다.
뒤를 이어 다른 마수들이 그를 따랐다.
하지만 체이즈라 불린 사내만큼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여보…….”
뒤편에 있던 여인이 체이즈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체이즈가 자신의 속마음을 얘기했다.
“전쟁만큼은 막아야 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웨스트 왕국의 힘은 다른 왕국들과 달라. 괜히 네 개의 왕국 중 최강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게 아니라고…….”
“그런데 웨스트 왕국에서 왜 갑자기 이곳을 노리는 걸까요? 그동안은 그냥 두었잖아요…….”
“듣기로 새로운 로얄나이츠가 선출되었다고 하더군… 아마 실력 행사를 위해 선택한 첫 번째 행선지가 이곳인 거겠지…….”
“헬라이번님의 나라를 점령해서…….”
“이종족들의 목을 거리에 걸 거야.”
“그것만은 막아야 해요. 우리는 저들에게 피해를 입힌 적도 없잖아요.”
“헬라이번님을 포함한 장로분들이 굉장한 강자임엔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웨스트 왕국에게는 역부족이야… 웨스트 왕국에는 로얄나이츠라는 괴물 집단이 있으니까…….”
아내인 로세리아도 체이즈의 말에 동의했다.
체이즈가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헬라이번님은 말렸지만… 그래도 나는 한 번 도전해보고 싶어.”
“저들과의 대화를요?”
“그래… 전쟁 없이 잘 넘어갈 수만 있다면… 내 목숨쯤은…….”
“저도 함께 가요.”
“하지만 로세리아 당신은…….”
“어차피 우리 두 사람 모두 헬라이번님께 목숨을 빚진 사람들이잖아요. 헬라이번님을 위해 목숨까지 걸 수 있는 것은 체이즈 당신뿐만이 아니에요.”
“고마워… 로세리아… 하지만 마음만 받을게. 당신까지…….”
“체이즈. 어차피 당신이 실패하면 전쟁이 벌어질거고 그렇게 되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죽임을 당할지 몰라요.”
“당신은 인간이니까 웨스트 왕국에서도 봐줄 수 있지 않을…….”
체이즈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로세리아의 시선이 날카로웠던 탓이다.
“설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그렇게 비겁하게 제 목숨을 연명하고 싶진 않아요.”
“하여간…….”
하는 수 없이 체이즈는 로세리아와 함께 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