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이종족들의 왕국 (2)
“아시테르님.”
“……?”
“헬라이번의 왕국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사람?”
아시테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수들의 왕국이라 불리는 헬라이번에서 사람이 찾아왔다니…….
곧이어 두 명의 남녀가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을 본 아시테르가 눈매를 좁혔다.
입은 옷차림으로 보건데 감옥에 있다가 빠져 나온 차림새는 아니었다.
거기다 얼굴도 고생한 얼굴은 아니었다.
“헬라이번의 사람인가요?”
“그렇습니다.”
“앉으세요.”
“저어… 저희는 이곳 책임자인 아시테르라는 분을 만나고 싶어서 왔습니다.”
체이즈가 가이우스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카일리어가 웃었다.
“잘 찾아왔군. 하지만 아시테르님은 내가 아닌 이쪽이다.”
카일리어가 아시테르를 가리켜 말했다.
그러자 체이즈가 화들짝 놀랐다.
“이렇게 젊은데 로얄나이츠에 들어갔다는 말씀이십니까……?”
“로얄나이츠에 입단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지? 실력이 증명된다면 얼마든지 입단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로얄나이츠다.”
카일리어의 설명에 체이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시테르를 찬찬히 살폈다.
아직 자신보다도 어려 보이는데 벌써 로얄나이츠에 들어가다니…….
대체 어떤 실력을 갖고 있기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를 찾아왔다면서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염치불구하고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이곳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체이즈에게로 향했다.
체이즈는 주변에 보이는 아시테르의 수하들을 둘러보았다.
오면서 본 3만의 군사들.
거기다 이곳에 있는 날카로운 기도를 가진 사람들까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심지어 몇몇은 체이즈도 잘 알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크흠… 이곳에 오니 더더욱 확신이 드는군요.”
“…….”
“제발… 이대로 돌아가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헬라이번님과 우리 왕국민들은 전쟁을 원치 않습니다.”
체이즈가 깊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나 카일리어가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곳으로 오기 위해 3만의 병력을 소집했어. 거기다 식량이나 무기를 비롯한 많은 물자들을 준비했다. 뿐만 아니라 아시테르님은 로얄나이츠에 오르고 처음으로 출정한 건데… 왕국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는 만큼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아니겠나?”
“그냥 돌아가 달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부족하시겠지만… 제 목숨이라도 드리겠습니다.”
“그대의 목숨은 우리들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데.”
“저도 함께…….”
가만히 뒤편에 서있던 로세리아도 울먹이며 말했다.
잠자코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아시테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헬라이번의 왕국이 마수들의 나라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인간들을 잡아다 가축으로 키운다는 말까지 들었어요. 그런데… 막상 코앞까지 와보니 다른 누구도 아닌 인간이 이곳까지 찾아와 헬라이번의 왕국을 공격하지 말아 달라 말하는군요… 그러니 묻겠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건…….”
아시테르의 말에 체이즈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과연 이곳에 있는 이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 줄까.
하지만 이제와 그런 걱정을 한들 너무 늦어 버린 뒤였다.
잠시 말을 멈췄던 체이즈가 다시 입을 열었다.
“헬라이번님의 왕국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만약 가축으로 키워진 인간들이 있었다면 아마 이곳의 룰을 어겼기 때문일 겁니다.”
“그곳의 룰이요?”
“네. 우리들의 왕국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모든 종족은 평등하다는 겁니다.”
“모든 종족이 평등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헬라이번님의 왕국에는 인간들뿐만 아니라 여러 종족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 종족들이 살아가고 있다고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마수들 중 높은 지능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크 엘프를 들 수 있겠군요.”
“다크 엘프요…? 하지만 그들은 멸족당한 게 아니었나요?”
옆에 있던 세아츠리스가 놀라 물었다.
이에 체이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주 소수지만… 다크 엘프들은 존재합니다. 거기다 높은 지능을 갖고 있는 하이오크 종족도 있고 드라고니아 종족도 있습니다.”
“드라고니아 종족은 무엇입니까?”
“도마뱀을 닮은 녀석들입니다. 성정이 조금 거칠긴 해도 생각보다 화끈하고 의리 넘치는 녀석들이죠.”
드라고니아 종족을 설명하는 체이즈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만약 고문을 당했거나 약점을 잡혀 억지로 이러고 있는 것이라면 나올 수 없는 표정이었다.
덕분에 아시테르와 다른 이들에게도 혼란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때 길고트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속으시면 안됩니다 주군. 최면 마법에 걸려 저런 말들을 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아니요. 저분에게는 아무런 마법도 걸려있지 않아요. 그건 제가 장담할 수 있어요.”
엔류아가 체이즈와 로세리아를 살펴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저들의 건강이 염려되어 마법으로 그들의 건강을 살펴보던 중이었다.
만약 어떠한 마법이든 걸려 있었다면 엔류아의 마법에 이상 신호가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체이즈와 로세리아에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직접 보고 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건 더더욱 안 되겠는데.”
“맞아. 함정일 수도 있잖아. 우리를 데려가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갑자기 찾아온 너희 두 사람을 믿고 아시테르 오빠를 보내라고? 어림없는 소리를.”
순간 이곳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살을 옥죄는 듯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체이즈가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제 말에 오해가 있었군요… 꼭 아시테르님께서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분들이라도 좋습니다.”
“좋습니다. 제가 직접 다녀와 보도록 하죠.”
아시테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다른 이들이 화들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안 돼!!”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야, 너 예전의 네가 아니야. 이제는 책임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졌다고!”
“행동에 조심을 기해야 합니다. 저들의 함정이라면…….”
“아시테르님.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다른 이들이 모두 아시테르를 말렸다.
그 사이 카이드가 손을 들었다.
“그럼 내가 따라가야지.”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뒤따라 가이우스도 손을 들었다.
“저도 갈래요! 이번에는 허락해 주세요.”
“스승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크로마제가 가면 저도 같이 가야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럴 거면 그냥 언노운 마법기사단 전원이 가자. 그게 낫지 않겠냐?”
에스파가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가 좋은 생각이라는 표정들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결국 아시테르에게 모여들었다.
“어때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아시테르가 카일리어를 바라보며 물었다.
카일리어도 못말리겠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언노운 마법기사단 전원이 함께 하는 거라면 저도 조금은 안심되겠군요.”
“고마워요. 그동안…….”
“이쪽 일은 제가 알아서 해놓겠습니다.”
카일리어가 아시테르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아시테르에게 예를 갖췄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아시테르님.”
“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언노운 마법기사단은 체이즈와 로세리아를 따라 몰래 헬라이번의 왕국으로 들어갔다.
체이즈와 로세리아만 알고 있는 통로가 있어 안으로 들어가는 데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두 사람은 초입에 들어서서 따로 옷을 마련해 주었다.
“지금 모습 그대로 들어갔다간 한눈에 띌 겁니다. 이쪽에서는 그런 옷을 입지 않으니까요.”
두 사람이 마련해 준 옷은 고급 비단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옷을 입자, 마치 옷이 체형에 맞추듯 줄어들었다 늘어났다를 반복했다.
“뭐야 이게……?”
“이 옷은 드워프들이 만든 옷입니다.”
“드워프……?”
“본래 무기를 만드는 장인들로 알려져 있지만 드워프들은 손재주가 굉장히 뛰어난 종족입니다. 무기뿐만 아니라 생활 잡화, 옷가지 등도 잘 만듭니다.”
“다크 엘프에 이어 드워프까지…….”
둘 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족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종족들이 이곳에 산다고 하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동굴 벽을 지나 체이즈가 마지막 문을 열자 환한 세상이 드러났다.
그 안의 풍경을 본 모두가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헬라이번님이 만들어낸 왕국, ‘첼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체이즈가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장 먼저 특이한 구조물들이 눈에 띄었다.
인간들의 도시에는 네모난 건물들만 넘쳐나는데 이곳은 달랐다.
다양한 모양의 집들이 있었으며, 한쪽은 숲에 나무집들이 지어져 있었다.
거리는 활기를 띄었으며 여러 인종들이 각자의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거리에 보이는 이들의 얼굴엔 자그마한 어둠도 없었다.
이는 인간들도 마찬가지.
들려오던 소문과 다르게 인간들도 삼삼오오 모여 각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몇몇은 오크로 보이는 이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눴다.
“이게 뭐야…….”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듯 에스파가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말했다.
다른 이들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체이즈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첼룬 안에서는 모든 종족이 평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족들이 쉽게 어우러질 수 있습니다.”
“모든 종족이 평등하다라…….”
아시테르의 초롱초롱한 시선이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짜리몽땅한 자줏빛 피부의 드워프가 힘차게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아시테르는 어느새 그곳으로 쪼르르 달려가 물건들을 구경했다.
“으엉? 뭐냐. 못 보던 얼굴인데?”
털을 덥수룩하게 기른 드워프가 인상을 찌푸리며 아시테르를 올려다보았다.
갑작스럽게 대뜸 나타난 인간이 너무 가까이서 자신의 작업을 구경하고 있으니 방해가 된 것이다.
“이번에 길을 잃어서 이곳으로 유입된 사람입니다.”
“호오… 사우라 떼에 쫓기다 이곳까지 온 건가? 운이 좋은 녀석이로군.”
드워프가 체이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리곤 이내 작은 브로치를 들어 아시테르에게 건네주었다.
“자네 뒤에 있는 아름다운 숙녀분께 전해 주게.”
“예……?”
브로치를 받아 든 아시테르가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뒤편에는 라빈이 자리해 있었다.
아시테르가 라빈과 드워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쩐지 드워프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첫눈에 반했다네. 인간 중에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다니…….”
“예에……?”
아시테르가 받아든 브로치를 받았다.
붉은 보석이 중앙에 박혀 있어 빛이 났다.
“드워프가 세공한 보석에는 특별한 힘이 깃듭니다.”
체이즈가 아시테르의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던 아시테르가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광경들이 웨스트 왕국과 전혀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아시테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평화롭고 좋아보였다.
“신기하네요.”
아시테르뿐만 아니라 다른 언노운 마법기사단원들도 첼룬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카이드 빼고는 다들 이곳이 흥미로운 눈치였다.
체이즈는 이 기세를 몰아 첼룬 곳곳을 아시테르 일행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이종족들이 어떻게 한데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지.
일단은 그것에 집중했다.
이것부터 납득을 받아야 첼룬 왕국의 존재가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한참 첼룬 왕국을 둘러보던 아시테르도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