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교류
일련의 얘기를 들은 아시테르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눈으로 보지 못했으면 쉽게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양한 종족들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라니.
한 번도 이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렇다면… 헬라이번님과 이곳 첼룬 왕국 분들은 우리 인간들에게 별다른 위협을 주지 않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인간들이 먼저 싸움을 걸어와 우리들의 터전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먼저 인간들과 전쟁을 벌일 이유는 없다.”
“그렇군요.”
아시테르 또한 이들이 인간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딱히 먼저 나서서 이들을 죽일 생각까진 없었다.
가능한 전투를 벌이지 않겠다는 것이 아시테르의 우선된 생각이었으니까.
그래서 가장 먼저 대화로 많은 것들을 풀어보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러면 되었습니다. 저희들 또한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냥 병력을 물리겠다는 말이냐?”
“네. 이곳의 주민들이 우리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저희들 또한 이곳의 존재를 인정하겠습니다.”
“말은 누구든 쉽게 할 수 있지. 인간들이 다 너 같은 줄 아는가?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해서 모두가 그렇게 따라주는 것은 아니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첼룬 왕국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면? 그때는 얘기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흥.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이냐?”
아시테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그렇게 만들 수 있다.
물론 그 전에 전제되는 조건이 하나 있었다.
아시테르가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대신에 한 가지 제안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안? 그게 무엇이냐.”
“첼룬 왕국의 쇄국을 풀어주십시오.”
“쇄국을 풀어달라? 설마 우리더러 너희들과 교류라도 하라는 말이더냐?”
헬라이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시테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웨스트 왕국이 헬라이번의 왕국에 경계심을 갖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무지 때문이었다.
웨스트 왕국 사람들은 이곳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소문만 무성하게 나있으니 자연스럽게 이곳을 경계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이곳의 쇄국을 풀고 웨스트 왕국과의 교류를 시작한다면 인간들 또한 이곳에 대해 알아갈 수 있게 된다.
“저희들과 교류를 시작한다면 가장 먼저 식량난을 해결 할 수 있을 겁니다.”
헬라이번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시테르가 말한 것은 첼룬 왕국의 고질적 문제였다.
그 때문에 첼룬 왕국은 다른 것보다 식재료가 굉장히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었다.
“식량난을 너희들이 해결할 수 있다고……?”
“다행히 이곳 근처 영지들은 식재료가 풍부합니다. 바다를 앞에 두고 있는 영지도 있어 물고기나 다른 먹을 것들을 수급하기에도 좋습니다. 곡창지대를 갖고 있는 영지도 있으니,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식량난을 해결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왕국민들이 굶지만 않는다면… 나쁜 거래는 아니로구나.”
“그리고 이곳에서 거래되는 물품들을 저희가 좋은 값을 치르고 수입해 오겠습니다.”
“이곳에서 거래되는 물품들? 뭘 말하는 거냐?”
“예를 들어 이 옷입니다. 사람의 체형에 맞게 바뀌다니… 이런 옷은 태어나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흐음…….”
“그리고 오면서 들어보니 드워프분들이 만드는 물건들의 성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다 들었습니다.”
“당연하지. 그들의 솜씨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물건들을 좋은 값을 치르고 사가겠습니다.”
헬라이번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인간들과의 교류.
그것을 아예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쇄국의 한계가 슬슬 드러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더 이상 영지를 넓힐수도 없었다.
때문에 늘 머릿속을 맴도는 고민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것이 뜻하지 않게 쉽게 풀리려 하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들과 적극적으로 교류를 하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신기한 것들이 많지 않습니까? 분명 웨스트 왕국 사람들도 좋아할 것입니다. 특히나 농구기 같은 것들은 혁명에 가깝습니다.”
아시테르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그가 이곳에 와 가장 충격 받았던 장면도 그곳에 있었다.
헬라이번이 한쪽 눈을 찌푸렸다.
“혹시나… 우리들의 무기를 노리려는 것은 아닌가?”
사실 드워프들의 진짜 능력은 무기 제작에 있었다.
오래 전부터 드워프들은 신의 무기를 만드는 종족이라 불렸으니까.
지금도 몇몇 드워프들은 무기를 만드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첼룬 왕국에서 무기를 판매한다면 좋은 값에 사갈 사람들은 많을 겁니다.”
“우리들이 만든 무기로 무장해서 우리 왕국으로 쳐들어온다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지금 당장 전쟁을 벌일 순 있습니다.”
“호오…….”
“하지만 저는 최대한 전투나 전쟁은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안 드리겠습니다. 쇄국을 풀고 우리와 든든한 우방국가가 되는 것은 어떻습니까?”
“우방국가라… 정말 그것이 가능하다 생각하는가?”
“얼마든지요. 저희들은 첼룬 왕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곳의 법을 존중하겠습니다. 인간들이 만약 이곳을 방문하여 잘못을 저지른다면 웨스트 왕국의 법이 아닌 이곳의 법대로 처리하여 주십시오.”
“다른 종족을 차별하고 살해한다면 이곳은 똑같은 벌을 내린다. 그래도 괜찮다는 얘기냐?”
“물론입니다.”
아시테르의 빠른 대답에 헬라이번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를 위시한 다른 종족들도 순간 흔들리는 눈빛을 보였다.
흑요석과 같은 피부를 지닌 인간형 마수가 입을 열었다.
“헬라이번님. 인간들의 달콤한 말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그간의 일들을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하피오… 너는 이들의 제안을 거부하자는 거냐?”
“물론입니다.”
“그렇군…….”
헬라이번의 시선이 다른 이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의중은 어떤지 무언의 눈빛으로 묻는 것이었다.
몇몇 이종족들은 찬성했지만 반대하는 이종족 대표들도 있었다.
“흐음…….”
생각보다 의견이 갈렸다.
헬라이번이 아시테르를 향해 말했다.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군.”
“알겠습니다. 저희는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이곳에 머물 생각인가?”
“허락하여 주신다면 좀 더 이곳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어려울 것 없지. 다만 하피오의 수하들이 그대들을 한시도 쉬지 않고 감시하고 있을 거다.”
“그 정도는 감수하겠습니다.”
아시테르가 헬라이번에게 예를 차렸다.
그리곤 언노운 마법기사단을 데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아시테르 일행이 완전히 물러가자 회의장은 다시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그동안 아시테르는 마음 놓고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렇게 한가하게 있어도 괜찮나?”
“내 고민거리는 이미 저쪽에 모두 맡겨놓았는데 뭐.”
“그나저나 어쩌려고 그래? 정말로 네가 말한 일들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거야?”
“불가능할 것 같진 않은데?”
“아니, 헬라이번의 말대로 사람들 모두가 너 같진 않다니까……?”
“물론 그 과정속에서 몇몇 문제들은 발생하겠지. 하지만 나는 이곳에 이미 매료되었어. 모든 종족들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라잖아? 너무나 매력적이야. 거기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물품들도 신기한 것들이 한가득이고.”
“아이고…….”
“방법은 있는 겁니까?”
모두가 아시테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슬쩍 손가락을 올려보았다.
“원래 로얄나이츠가 되면 영지를 하사받는대. 그것도 상당히 넓은 영지를. 하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어. 내가 어느 영지를 받느냐에 행사하게 되는 영향력이 달라질 테니까. 린과 대립해 있는 몇몇 세력들이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는 모양이야.”
“너 설마…….”
“맞아. 이곳 첼룬 왕국을 나의 영지로 할 생각이야.”
“야, 여기는 네 땅이 아니잖아? 카일리어님도 원한다면 자기 가문의 땅을 기꺼이 내줄 수도 있다고 했는데… 꼭 그렇게까지 할 생각이냐?”
에스파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자 옆에서 라빈이 웃었다.
“왜? 재밌는 생각 아니야? 나는 아시테르 오빠다워서 좋은데. 그리고 이곳을 영지로 두면 사실상 다른 로얄나이츠들 중에서 가장 좋은 영지를 갖는 것 아닌가?”
“그게 그렇게 되나……?”
“저는 너무나 좋은 생각 같습니다. 기존의 땅을 비집고 들어가면 반발도 심할 테고 여러 견제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을 영지로 둔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가이우스도 아시테르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곳을 어떻게 영지로 인정받지?”
“그러려면 이렇게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점령을 하는 게 낫지 않았어? 속국으로 만든다든지…….”
“뭐, 꼭 나의 영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린도 전 로얄나이츠의 영지를 수복하고 있고, 나에게도 여러 지지층이 있잖아? 그런 것들은 이미 충분해. 이곳 첼룬 왕국을 내 영지로 삼는 것은 보호하기 위함일 뿐이야.”
“호오… 너의 영지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얘긴가?”
“응. 그리고 이곳의 물건들을 이용해 사람들의 삶의 질을 올린다.”
“그것도 나쁘지 않군.”
“재밌네요 스승님. 마치 왕국 속의 작은 왕국 같군요.”
“뭐가 어찌 되었건 안전하게 첼룬 왕국과 교류를 틀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공일 것 같은데.”
“변화의 시작이 되겠지.”
그렇게 언노운 마법기사단은 체이즈가 마련해 준 숙소에서 밤을 새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둠이 물러가고 다시 해가 떠올랐다.
언노운 마법기사단은 이른 아침부터 헬라이번에게 불려갔다.
그들 또한 밤을 새가며 이야기를 나눈 것은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중앙에 앉아 있던 헬라이번이 아시테르에게 물었다.
“우리 왕국과 교류를 하려면 그대들의 영지와 맞닿는 길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하겠나?”
“저희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사우라 떼를 비롯한 마수들을 처리해주게. 그렇게만 해준다면 우리 왕국의 드워프들과 몇몇 기술자들이 다리 공사에 착수 할 거다. 다리를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들과 건설에 참여할 인부들도 제공해줄 수 있나?”
“어렵지 않은 부탁이로군요.”
아시테르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헬라이번이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보면 상당한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아시테르는 기꺼이 응한 것이다.
“그럼. 일단은 거기서부터 시작하지.”
헬라이번의 말에 아시테르가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눠야 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의외로 빠르게 첫발을 내딛을 수 있게 해주었다.
아시테르는 곧장 바깥으로 향했다.
그들은 사우라 떼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당연히 인간들의 군대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갈 줄 알았던 헬라이번과 장로들은 의문을 표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저희들의 실력이 어떤지 궁금했던 것 아닙니까?”
언노운 마법기사단 모두가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이를 본 체이즈와 로세리아가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시테르님.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도 조금은 우스운 일이지만… 사우라 떼는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됩니다. 놈들은 생각보다 교활합니다. 거기다 이 광활한 협곡에는 사우라 말고도 상당히 흉포한 몇몇 마수들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시어 대기하고 있는 군대와 합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문제없을 겁니다.”
아시테르가 별 것 아니라는 듯 답했다.
그러자 뒤편에 있던 하피오가 코웃음을 쳤다.
“흥. 한낱 인간들 따위가 과연 놈들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으려나. 차라리 평소처럼 인원수로 밀어붙이지 그러나?”
“그러게. 인간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우리 드워프들을 내보낼 순 있는 건지.”
“사실은 실력에 자신 없으니까 이렇게 먼저 찾아왔을 수도 있다니까.”
하피오의 도발에 여러 장로들이 말을 보탰다.
그러나 아시테르는 이들의 이런 반응에도 가볍게 미소만 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