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여왕의 유희 (2)
대지가 가시덤불로 가득해지고 있었다.
그것에 휘말린 마수들이 수많은 피를 흩뿌렸다.
가시덤불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어지러이 움직이는 덤불들이 마수들의 몸을 마구잡이로 할퀴었다.
그 사이로 아시테르가 움직였다.
검을 들고 있는 그가 쏜살같은 움직임을 선보이며 눈앞에 보이는 마수들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그를 덮치려는 마수들을 가시덤불이 막았다.
이어 날아오는 공격들까지 막아낸 가시덤불이 분노를 표해내듯 마수들을 강타했다.
“크워어어어―!”
“꾸웨에에에―!!!”
마수들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 들려왔다.
세아츠리스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날아다니는 마수들을 향해 그녀의 가시덤불이 뻗어나갔다.
공중에서 요리조리 피해내던 마수들을 결국 가시덤불이 붙잡았다.
가시덤불은 공중의 마수들을 끌어내려 바닥에 내리꽂았다.
이어 대기하고 있던 줄기들이 얽히며 마수들을 옥죄었다.
“이건 완전 지옥인데…….”
“이게 진짜 세아츠리스 언니의 힘이구나…….”
그 광경을 지켜보던 언노운 마법기사단조차 세아츠리스의 마법에 감탄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껏 활개치고 있는 아시테르의 곁으로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꽃잎이 휘날리는 곳 사이로 마수들이 뛰어들었다.
촤라라락―!
스가각!!!
마수들의 몸에 무수히 많은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하나하나에 마력이 깃든 꽃잎들이 마수들의 몸을 베고 지나가는 것이다.
피분수가 피어나는 광경을 보며 헬라이번과 다른 장로들도 침음성을 흘렸다.
“과연 마녀로군요…….”
“저런 마법이 가능하다니…….”
“수많은 마수들이 고작 저 여인 한 명을 못 당해내고 있습니다.”
“그냥 평범한 여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마녀입니다, 마녀. 거기다 저 정도의 실력이라면 그냥 그저 그런 마녀도 아닐 겁니다.”
“헬라이번님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저들의 전투를…….”
장로들이 헬라이번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헬라이번은 말없이 전투의 전반적인 부분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어느 누구 하나 평범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수천의 마수들이 뛰어드는데도 이들은 그 한 가운데에서 물러섬 없이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전투가 익숙한 것인지 합이 척척 잘 맞는 기분이었다.
결국 헬라이번과 다른 장로들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언노운 마법기사단만으로 모든 마수들을 처리해낸 것이다.
특히나 이번 전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세아츠리스였다.
그녀의 마법이 전장의 대부분을 휘저어 놓은 덕분에 다른 단원들이 비교적 수월하게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
던전 브레이크의 파동도 끝이 나버리고 열렸던 게이트도 서서히 닫혀갔다.
기세 좋게 쳐들어왔던 모든 마수들이 싸늘한 시체로 변했다.
그 위에 언노운 마법기사단이 서 있었다.
“어땠어?”
“아주 좋았다.”
“그동안 실력 좀 많이 늘었는 걸?”
“근데 이 골렘은 뭐냐?”
우뚝 서 있는 모래골렘을 에스파가 가리켰다.
그러자 크로마제가 번쩍 손을 들어올렸다.
“그건 제 골렘입니다.”
“대박이네… 언제 이런 마법을 익혔어?”
“후후, 혼자서 열심히 연구한 결과물입니다.”
“좋다 좋아.”
마수들을 모두 정리하고 아시테르가 헬라이번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들의 전투를 모두 지켜본 헬라이번도 함께 생각이 많아지고 있었다.
과연 자신감을 드러낼만 했다.
만약 아시테르 일행이 아니었다면 저 많은 마수들을 막아내기 위해 첼룬 왕국도 손해를 감수해야 했을 터다.
“고작 10명 정도로 모든 마수들을 죽이다니…….”
이대로 만약 전쟁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헬라이번의 왕국은 오래동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헬라이번과 장로들도 분명 강한 힘을 갖고 있었지만 눈앞의 언노운 마법기사단 역시도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다.
“이제야 그대의 말을 제대로 믿을 수 있겠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인간들의 세상에서 자네의 말이 얼마나 힘을 가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직접 보니 알겠더군. 발할라의 힘을 잇고 있었다니.”
“제 힘에 대해서 알고 계시나요?”
발할라의 이름이 나오자 아시테르가 흠칫했다.
그러자 헬라이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에 대해 잠시 할 말이 있는데, 시간을 좀 내어주겠나?”
“좋습니다.”
“그럼 잠시 대화를 좀 나눠보도록 하지.”
헬라이번이 아시테르를 이끌고 개인적인 공간으로 향했다.
용의 둥지라 불리는 이곳은 헬라이번의 처소나 다름없었다.
그곳에서 헬라이번과 아시테르가 단둘이 마주했다.
항상 곁에 붙어 다니던 가이우스도 이번에는 바깥에서 대기했다.
“먼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어떻게 너는 발할라의 힘을 갖고 있는 거지?”
헬라이번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발할라 왕국이 멸망한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명맥 역시도 끊긴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눈앞에서 그 맥을 잇는 자를 보니 문득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혹시나 발할라 인들이 모습을 숨기고 있던 것은 아닐까.
만약 발할라 인들이 존재한다면, 모습을 숨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헬라이번에겐 인간들보다는 발할라 인들이 훨씬 더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
아시테르는 담담하게 자신의 얘기를 전해주었다.
그가 어떻게 던전에서 태어났는지부터, 어떻게 발할라의 힘을 갖게 되었는지까지.
간단하게 전한 그의 말을 모두 듣고 헬라이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발할라 인들은 그때 멸망당하고 말았다.
“그랬군… 그래도 아직까지 발할라의 유지를 이어가는 이가 있었다니…….”
“헬라이번님은 아포칼립스의 문 얘기를 듣고도 크게 놀라는 기색이 없으시군요.”
“당연하지. 나의 아버지 또한 아포칼립스의 문을 넘어 이 세계에 도착한 존재니까.”
“예……?”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미 아포칼립스의 문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늘 노력해 왔던 발할라인들까지도.”
“그랬군요… 그렇다면 헬라이번님은 아포칼립스의 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시테르가 헬라이번을 응시하며 물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모를까 아포칼립스 문에 대해 알고 있는 이라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더군다나 방금 헬라이번은 자신의 아버지가 아포칼립스 문 너머에서 왔다는 말을 했다.
이에 따라 그는 아포칼립스 문이 개방되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그것을 위해 힘을 키우는 자였다면 아시테르의 노선도 당연히 바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포칼립스는 다행히 아시테르가 우려할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 또한 아포칼립스 문이 열려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습니까.”
“그곳 너머에 있는 마수들은 굉장히 흉포하다. 놈들은 공생이라는 말을 몰라. 그저 약육강식의 세계만을 선호할 뿐이다. 약하면 먹히고 강하면 먹는 거다. 그것은 오늘 던전 게이트 너머에서 흘러나온 마수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네. 마수라면 저 또한 지긋지긋하게 봐왔으니까요.”
“하긴, 그 던전에서 수많은 마수들을 상대해왔다고 했으니…….”
헬라이번이 찻잔을 들어올렸다.
아시테르도 차를 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혹시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안타깝지만 인간들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요. 이것은 비단 인간들의 일뿐만은 아닐 겁니다.”
“흐음… 얘기의 연장선이었나? 아포칼립스의 문에 대해 얘기를 하려는 건가?”
“맞습니다.”
“그곳은 이미 비체라는 자가 지키고 있다면서? 내가 도울 일이 뭐가 있지? 아니면 이종족 중 던전의 문을 지키는 데 쓸모 있을만한 자들을 보내달라는 건가? 하지만 그것 또한 소용없다. 발할라 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힘을 쓰는 만큼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 술식도 독특하다. 우리들이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야.”
“그것을 도와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세계를 지킬만한 힘이 필요합니다.”
“힘이 필요하다……?”
“예. 얼마 지나지 않아 아포칼립스 문이 열릴지도 모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지?”
헬라이번은 이제까지 본 중 가장 심각하고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간들이 쳐들어온다는 것과 아포칼립스의 문이 열린다는 말은 아예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인간들이 쳐들어오면 전투를 통해 지키면 되고 이렇게 대화로 풀어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아포칼립스의 문이 열린다는 것은 곧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아포칼립스 문을 봉인하고 있는 봉인진이 약해졌습니다. 할아버지께선 그것을 본인의 생명력으로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할 겁니다.”
“흐음…….”
헬라이번이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아포칼립스의 문이 열린다니.
어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실제 하는 지도 몰랐던 문이 사실은 던전 어딘가에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이제는 그 문이 열리려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자연스럽게 심각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리 생각해놓은 방법은 있는가? 우리들만으로는 놈들을 막기 어려울 거다. 그 너머에는 몇 만의 아니 몇 십만의 마수들이 있을지 몰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계의 많은 분들과 힘을 합칠 생각입니다.”
“과연… 나야 이미 예전부터 아포칼립스 문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믿지만… 다른 평범한 인간들이 과연 그 말을 믿어줄까?”
“설득할 자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설득이 통하지 않는다면… 힘의 논리로 지배한 후에 전투에 참여 시켜야겠죠.”
아시테르가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라진 분위기에 헬라이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마음을 굳게 먹은 것이리라.
헬라이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동안 그대를 낮잡아 본 것에 대해 심심한 사과를 하도록 하지.”
“예?”
“그저 인간들의 대장이 되었다고 우쭐대기 위해 이곳으로 찾아온 자인줄 알았더니… 사실은 그게 아니었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릇이 큰 인간이었어. 한번 신뢰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군.”
“그 말은… 저와 함께 해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일단 내 뜻은 그러하다. 하지만 내가 이 왕국의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는 법. 이것은 내가 장로들과 직접 얘기를 나눠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혹시나 장로들이 함께 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춰도 너무 실망하지는 말게. 그들이 인간들을 경계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니… 쉽게 신뢰할 수도 없겠지.”
“이해합니다. 저 또한 이곳에 와서 많은 얘기들을 듣고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대를 신뢰하는 것 또한 그대가 반은 인간이고 반은 발할라인이기 때문이다.”
“반은 인간이고 반은 발할라인이라니요…? 저는 인간입니다만…….”
“후후후. 아직 모르고 있었나? 발할라의 힘을 잇는 자는 그 수명이 훨씬 더 늘어난다.”
“아……?”
“아마 그대는 다른 평범한 인간들과 달리 100년에서 150년 정도 더 살아가겠지.”
“예에에에……?”
놀란 아시테르가 두 눈을 깜빡였다.
그의 반응을 본 헬라이번이 피식 웃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그 비체라는 자가 말해주지 않았나보군.”
“아니… 네…? 제가 그렇게나 오래 산다고요……?”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100년은 생각보다 짧은 세월이니까.”
“그, 그렇군요… 100년은 짧은 세월이었군요…….”
하기사 눈앞에 있는 자는 몇 백년을 살아온 생명체였다.
그렇게 느껴질만도 했다.
헬라이번이 아시테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쨌거나 한 가지는 약조해두마. 만약 장로들의 뜻이 나와 다르다 하더라도, 나만은 그대의 부름에 응해 아포칼립스 너머의 마수들과 얼마든지 함께 싸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