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검제의 탄생 (2)
먼저 몸을 움직인 것은 놀랍게도 르노어였다.
르노어의 검이 폭풍과 같은 기세를 발산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시테르는 그 자리에 서서 검을 들어 올렸다.
쿠우웅―!
강한 충격파가 터지고 두 사람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아시테르가 검을 걷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번엔 르노어가 뒤로 물러나며 아시테르의 검을 흘렸다.
부드러운 물결의 움직임 속에서 아시테르의 검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후우우우웅―!
르노어의 검에서 시작된 다른 물줄기가 아시테르의 검을 옥죄었다.
이를 본 아시테르가 두 눈을 부릅떴다.
르노어의 검은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거친 힘이 이 부드러움에 감겨 힘을 잃었다.
아시테르의 공격을 물줄기로 휘감은 르노어가 일 보 앞으로 내딛었다.
“받아라.”
놀랍게도 아시테르가 쏟아냈던 힘이 다시 아시테르에게로 뻗어나갔다.
거기에 더해 르노어의 기운까지.
순간 당황한 아시테르가 더욱 기운을 끌어올렸다.
콰아아아앙!!!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거센 위력.
그러나 숨을 돌릴 틈 따윈 없다.
강물의 유수가 쉼 없이 흐르듯, 르노어의 공격도 빈틈없이 계속되었다.
다른 이들처럼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은 아니었다.
그저 부드러운 물결처럼 흘러가는 검로.
그러나 그 유수와 같은 검에 부딪히는 태산은 조금씩 깎여나가고 있었다.
“후우우…….”
아시테르가 낮게 숨을 내리깔았다.
입술을 굳게 다문 르노어는 검을 멈추지 않았다.
푸른 물결처럼 번진 오러가 점점 강한 물줄기를 만들어내며 아시테르를 덮쳤다.
하나하나 바닥에 커다란 궤적을 그릴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다.
아시테르가 수비하는 중간중간 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그 힘은 여지없이 배로 되어 아시테르에게 돌아갈 뿐이었다.
부드럽게 이어지고 있지만 당하고 있는 아시테르의 입장에서는 정신없이 몰아치는 공격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많은 이들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동안 아시테르가 보여주었던 결투들과는 사뭇 달랐다.
아시테르가 저렇게나 형편없이 물러서고 있는 모습이라니.
카이드조차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뭐냐 저 사람… 완전히 괴물이잖아.”
눈을 뗄 수 없는 검술이었다.
마치 물로 된 감옥에 갇혀있기라도 한 느낌.
그 속에서 아시테르가 발버둥 치듯 움직이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 흐름을 한 번은 끊어야겠다고 생각한 아시테르가 검을 고쳐 잡았다.
슈와아아앙―!!!
르노어가 만들어낸 공간.
그 공간 속에서 그의 검은 무섭도록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니 우선은 이 공간부터 부숴야 했다.
아시테르가 힘껏 내지른 일격이 대기를 갈랐다.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기분.
이를 본 르노어도 눈빛을 달리했다.
그동안 눈여겨보았던 일격이었다.
아시테르가 검을 휘두르면 마치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리고 막상 그것을 경험하니 참으로 신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시테르의 검격에 그의 마력도 일순간 흩어지고 말았다.
맥이 끊기자 검술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 틈을 아시테르는 놓치지 않았다.
쿠우우웅―!!!
공기가 갑작스레 무거워졌다.
이를 느낀 르노어가 두 눈을 부릅떴다.
단순히 기세 같은 것으로 짓누르는 게 아니었다.
아시테르와 르노어 사이에 그런 것이 가능할 리 없다.
오히려 이것은 마법과도 같은 힘이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르노어의 몸을 강하게 내리누르고 있다.
몸이 무거워진 르노어가 낮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가 만들어내는 검술의 공간은 부드러운 유수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 안에서 적은 천천히 깎여나간다.
함부로 유수를 베어내거나 쳐내려 한다면 더 큰 여파가 적에게 들이닥칠 뿐이다.
헌데 아시테르가 만들어내는 검술의 공간은 또 달랐다.
이제부턴 그의 검술이 본격적으로 펼쳐질 차례였다.
무겁게 내려앉은 공간에서 르노어가 검을 들었다.
그래도 마력으로 몸을 보호하니 이전보다는 훨씬 움직이기가 수월했다.
다만 계속해서 몸을 보호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존재했다.
허나 르노어의 경지에 이 정도쯤은 커다란 제약이 되진 못한다.
그때 대기를 찢는 검격이 르노어의 코앞에 들이닥쳤다.
콰앙!!!
묵직하기가 팔이 부르르 떨릴 정도다.
이어지는 공격.
콰아아앙!!!
쏟아지는 거센 공격에 르노어가 이를 악물었다.
힘을 흘려내는 것도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전투 방식을 달리한다.
“전력으로 부딪혀주마.”
부드럽게 흘러가던 유수가 멈추었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물.
그 자체로 르노어가 서있었다.
고요한 그의 검끝이 향하는 곳은 아시테르였다.
아시테르의 두 눈에서 안광이 폭사된 것은 그와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두 개의 검이 부딪혔다.
두 사람 모두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다.
르노어의 검이 태산이라도 벨 것처럼 거친 기세를 내뿜었다.
크게 몸을 일으킨 해일과도 같았다.
반면 아시테르의 검격에선 점차 거센 바람이 일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태풍과도 같은 위력.
그 속에서 르노어는 고고한 자세로 검을 쥐고 서있었다.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검이 거세게 충돌했다.
두 사람의 충돌을 모두가 숨죽여 쳐다보았다.
마도사들이 만들어낸 베리어들이 실시간으로 깨졌다.
두 사람이 내뿜는 기운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를 눈치챈 실력 있는 마도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로얄나이츠인 카일라이드가 지팡이로 대지를 두드렸다.
그러자 그의 방대한 마력이 경기장을 감싸 안았다.
카일라이드와 동시에 움직인 또 한 명의 존재가 있었다.
슈와아아아!
가시덤불이 순식간에 새장을 만들었다.
새장의 사이사이 공간을 세아츠리스의 마력이 메웠다.
“호오…….”
세아츠리스의 마법을 보며 카일라이드가 턱을 매만졌다.
순수한 지적 호기심을 굉장하게 자극하는 마법이었다.
거대한 새장을 보며 카일라이드는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아시테르와 늘 함께 다니는 저 여인.
저 여인이 마녀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그녀가 갖고 있는 마력의 파동은 궤를 달리하니까.
자연의 것을 빌려오는 게 아닌 날 것 그대로를 사용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마녀라곤 해도 그 실력은 마녀에 따라 천지차이였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어지간한 마녀 수준이 아닌데…….”
카일라이드조차 깊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정도였다.
세아츠리스도 카일라이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분명 뛰어난 실력을 지니긴 했으나 세아츠리스가 만나본 자들 중 최고의 수준에 이른 마도사는 아니었다.
마녀여왕을 제외하고 세아츠리스가 인정하는 인간 마도사는 몇 없었다.
그중에 한 명은 이스트 왕국의 수호신이었던 테르세우스였고 다른 한 명은 아시테르의 어머니인 아레나였다.
아레나의 마법은 세아츠리스조차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특별하면서도 신묘한 기운을 지닌 그녀의 불꽃은 난생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아시테르 또한 마력을 잃기 전까지는 세아츠리스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마도사 중 한 명이었다.
어쨌든 카일라이드의 마법도 세아츠리스의 이목을 끌긴 했으나 그들만큼이나 호기심을 느끼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쿠구구궁!!!
쩌저저적!!!
베리어가 깨지고 가시덤불이 잔뜩 베여나갔다.
그 속에서 아시테르와 르노어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싸움을 이어갔다.
그들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대기가 일렁이는 수준이니, 보는 이들마저 긴장되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던 두 사람이 마침내 멈춰 섰다.
아시테르가 르노어를 쳐다보았고, 르노어 또한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르노어가 검을 늘여트렸다.
“그대는 최선을 다했는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후후후. 나는 그 이상을 다했네.”
“예?”
“조금 전 나는, 나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벽을 깨고 나아갔다는 말이네.”
르노어에게서 정제된 마력이 흘러나왔다.
아시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또한 느끼고 있었다.
르노어의 검이 더더욱 무서워지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순 없었다.
“우선 그대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네.”
“별말씀을. 저 또한 선배님의 검에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후후. 그렇다면 다행이군.”
르노어의 시선이 카일라이드 쪽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전선을 누벼오며 함께 한 둘도 없는 친우 사이였다.
그러니 이제는 눈빛만 봐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르노어의 눈빛을 살핀 카일라이드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정말인가?”
카일라이드의 질문에 르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한숨을 내쉰 카일라이드가 이만 마법을 거두었다.
경기장을 감싸고 있던 베리어가 사라지니 남은 것은 세아츠리스의 마법뿐이었다.
카일라이드가 세아츠리스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그것은 필요 없네.”
“…? 그게 무슨 말이죠?”
“무슨 말이긴. 모든 것이 끝났다는 말이지.”
“아…….”
엉겁결에 세아츠리스도 마법을 거두었다.
아시테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르노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르노어가 웃는다.
“더 이상은 의미가 없네.”
“예? 하지만 조금 전 한계를 뛰어넘으셨다고 말씀하시질 않았습니까? 혹시… 제가 더 이상 르노어님의 상대가 되지 못할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르노어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 전에는 살이 아릴 정도로 무섭도록 강한 기세를 내뿜더니, 이제는 엉뚱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야. 조금 전 한발 더 나아갔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이제 더 이상 검을 들 힘이 없네. 겨우 서 있을 뿐이야.”
르노어가 부르르 떠는 자신의 팔을 내밀며 말했다.
확실히 그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나 있었다.
그때서야 아시테르도 르노어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내 몸은 이미 한계네. 아쉽게도 이번 대결은 나의 패배로 기록되겠군.”
“아…….”
“축하하네.”
르노어가 검을 거두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르노어가 자신의 패배를 입에 담은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아시테르가 해내고 만 것이다.
그는 모든 로얄나이츠를 이겨냈다.
국왕 헤렌달이 몸을 일으켰다.
왕성 마도사가 곧바로 확성 마법을 켰다.
“모두 보았는가!”
우렁찬 헤렌달의 목소리가 경기장 가득 울려 퍼졌다.
헤렌달이 말을 꺼냈음에도 환호의 목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헤렌달 또한 이런 것을 개의치 않아 했다.
그가 미소를 보이며 소리쳤다.
“새로운 태양이 떠올랐도다!”
“우와아아아아아!”
“우오오오!”
“와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환호 속에서 아시테르가 서 있었다.
그리고 르노어가 아시테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어 카일라이드도 아시테르에게 예를 차렸다.
로얄나이츠가 국왕 이외에 이렇게 예를 차리는 경우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바로 그들을 통솔할 수 있는 검제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것은 또 다른 충성의 서약이었다.
모든 로얄나이츠들이 차례로 몸을 일으켜 아시테르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 장엄한 광경에 지켜보던 이들의 가슴마저 함께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검제 만세!”
“검제 만세!”
“아시테르 만세에에!”
경기장에는 떠나갈 듯이 아시테르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이 날, 이곳의 주인공이 아시테르인만큼 헤렌달은 진심으로 축하를 전하며 일찌감치 자리를 빠져나와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옆에 있는 린에게 한 마디 더 건네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축하한다, 나의 딸아. 서둘러 검제에게 가 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