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때
이스트 왕국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변화의 시작은 광장의 처형장부터였다.
프로메테 가문의 가주이자 이스트 왕국 권력의 상징 중 한 명인 크리울로스를 단죄하려 했던 사우스 왕국의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혁명군의 등장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상하고 있었다.
때문에 혁명군과 사우스 왕국군 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헌데 혁명군 이후 언노운 마법기사단의 등장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언노운 마법기사단은 보기 좋게 사우스 왕국의 군대를 격파했고, 총지휘관인 폴로라스와 다이아 군대의 대장인 바이헤른을 붙잡는데 성공했다.
덕분에 그들이 돌아왔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이 소문은 귀족들과 마법기사단 사이에도 삽시간에 퍼졌다.
귀족들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몇몇 귀족들은 언노운 마법기사단을 쳐내야 한다며 핏대를 세웠다.
“놈들의 목적이 뭐겠습니까!?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우리들을 끌어내리려는 겁니다!”
“맞습니다! 사우스 왕국이 쳐들어왔을 때 언노운 마법기사단은 단장의 행방불명을 핑계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런데 이제와 우리들의 일에 간섭하려 들다니!”
“애초에 그런 비밀스러운 기사단을 만든 이유가 뭐겠습니까? 군단장 히스링이 불미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는 우리들을 감시하고 주시할 목적으로 언노운 마법기사단을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쯧, 이번 일을 핑계로 사우스 왕국의 횡포가 더욱 거세지면 어떻게 하죠?”
“총지휘관인 폴로라스님이 붙잡혀 갔으니 이번 일로 사우스 왕국의 분노를 샀을 겁니다 우리는…….”
귀족들이 모여 나누는 얘기들이었다.
개중에는 이들과 생각이 다른 이들도 있었다.
허나 그들은 굳이 이곳에서 자신의 생각을 꺼내진 않았다.
아닌 척 해도 이미 사우스 왕국의 밑으로 들어간 귀족들이 많다.
그들은 이곳에서 나오는 말들을 사우스 왕국 관리들에게 옮겼고, 그 이후에 일어날 일들은 늘 뻔했다.
생각은 달라도 말을 아끼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래도 언노운 마법기사단의 등장은 이들에게도 상당한 희소식이었다.
사우스 왕국에 있어 언노운 마법기사단은 공포의 대상으로 불렸다.
그들이 전투에 참전하면 사우스 왕국은 언제나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기 때문.
다른 전선이 고전을 면치 못할 때도 언노운 마법기사단이 있는 곳에선 여지없이 승전보가 울려 퍼졌던 것이다.
그때 언노운 마법기사단과 전쟁을 치렀던 사우스 왕국 지휘관들은 아직까지도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이스트 왕국과는 다시 전쟁을 벌여도 언노운 마법기사단과는 다시 싸우고 싶지 않다고 말할까.
그런 와중에 언노운 마법기사단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니 당연히 사우스 왕국에서도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언노운 마법기사단이 광장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후 벌써 일주일이 흘렀건만 조용하게 지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근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저는 당연히 본국에서 당장 병력을 보낼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대처가 늦는군요.”
“그 부분은 저도 동감합니다. 지금쯤 폴로라스랑 바이헤른님을 찾겠다고 당장이라도 병력이 달려왔어야 했는데…….”
“그나저나 반프레도님, 조금 전에 ‘본국’이라고 했습니까?”
“이제는 본국이 맞지 않습니까? 이스트 왕국의 해는 저물었습니다.”
“…….”
“…….”
순간 적막이 흘렀다.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것만 같은 불편한 기분.
귀족들은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때 그들이 있는 곳으로 기사 한 명이 다가왔다.
“사우스 왕국에서 지원군이 출발했다고 합니다.”
“지원군?”
“역시… 드디어 보내는구만.”
“그래서, 이번에 오는 사람은 누구라고 하던가?”
“아일리시님이 온다고 합니다.”
“오오! 아일리시님이!”
“또 다른 트럼프가 오다니… 이러다 우리 왕국에서 또다시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건 아닌지…….”
“쯧, 이제 좀 적응이 되어가는데 괜한 일을 벌여선…….”
“아무튼 우리들도 입장을 잘 정리해야 합니다.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식으로 잘 얘기를 마무리 짓도록 하죠.”
그들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여인이 한심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벗어났다.
다른 몇몇 귀족들도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뭘 어떻게 생각해.”
“저기 있는 귀족들 말입니다.”
“다 죽일 놈들이지.”
“흐흐흐.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저딴 놈들을 위해 나와 내 동료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게 아냐.”
“그렇죠. 그나저나 언노운 마법기사단이 돌아온 것에 대해서는…….”
“다 생각이 있겠지. 이제 우리 왕국을 짊어질 세대는 그 녀석들이니까.”
“희망이 있다 보십니까?”
“언노운 마법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게 누군 줄 아나?”
“워낙 유명하질 않습니까. 던전에서 왔다는…….”
“후후 그래. 그렇지. 그 녀석은 그 두 사람의 아들이야. 분명 잘 해낼 거다.”
아그리나가 피식 웃었다.
아레나와 유미르를 똑 닮았던 아시테르의 얼굴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이제는 친구도 잃고 짝사랑했던 사내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모든 것은 시간이 흘러 추억과 슬픔 그 사이 어딘가 쯤으로 자리 잡았다.
“아그리나님께서 그토록 기대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예?”
“아무튼… 썩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여기에 더해 그 녀석까지 움직여주면 아주 좋은 일이고.”
“히스링 단장님 말씀이시군요.”
“그 녀석만 움직여준다면 우리 왕국은 다시 하나로 뭉칠 수 있을 거다.”
아그리나가 대화를 이어나가던 때, 문득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녀는 함께 걷던 이들과 자연스럽게 헤어지고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누구냐.”
“호오, 알고 있었던 건가?”
“이제 그만 나와라.”
아그리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초로인이 모습을 보였다.
그를 본 아그리나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로구나.”
“우리를 버리고 도망친 것도 모자라 칼까지 겨눈 배신자 아닌가.”
“말투는 여전하구나.”
“난 여전하지만 당신이 여전하지 못한 거지.”
“그렇게 내게 날을 세울 것 없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가게 된 데엔 당신의 공도 큰데 말이야.”
“그때의 나는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오르카이우스의 목소리엔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그의 변화를 느낀 아그리나가 눈매를 좁혔다.
“지금은 다르다는 얘기인가?”
“조금은 달라졌지. 나는 이스트 왕국의 귀족들과 왕족들은 모두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들이야 말로 이스트 왕국을 좀먹는 썩은 물들이라 여겼거든.”
“그래. 잘 알고 있지.”
“하지만 그것은 나의 오만이었다. 귀족들 중에는 여전히 이스트 왕국을 사랑하고 아끼는 자들이 많더군.”
“당연한 얘기를… 당신만 몰랐을 뿐이야. 그런 것들만 보려 했으니 그렇게만 보였겠지.”
“딱히 부정하진 않겠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으니 말이야.”
“그래서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지?”
“나는 이스트 왕국이 사우스 왕국에게 짓밟히고 그들에게 유린당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국민들을 지켜야 할 귀족들과 마법기사들이 오히려 왕국을 배신하고 사우스 왕국을 거드는 광경 또한 지켜봤지.”
오르카이우스의 말에 아그리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부끄럽게도 그것 또한 귀족들의 민낯이었다.
이번 일이 기회라 생각한 이들은 철저히 낮은 자세를 취하며 사우스 왕국에 잘 보이려 들었다.
그들은 서슴없이 왕국 귀족들과 국민들을 팔아넘겼으며 자신의 부귀영화만 쫓을 뿐이었다.
아그리나의 표정을 살피던 오르카이우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상당한 실망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테르세우스 무덤 앞에 가 실컷 비웃어주었다. 결국엔 네가 틀리고 내가 옳았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사우스 왕국의 압력에도 결코 굽히지 않는 몇몇 귀족들과 왕국민들이 있었던 게지. 그들은 자연스럽게 혁명군을 만들어 사우스 왕국에 대항했다. 뜻이 있는 젊은 친구들이 그곳으로 뛰어들었고 기존의 마법기사들과 관리들도 점차 뜻을 모으더군.”
“…….”
“그리고 그 중심에 나의 친구인 크리울로스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 전 크리울로스님의 처형식 때… 당신도 그곳에 있었던 건가?”
“그래. 나 또한 그곳에 있었다.”
“그렇군.”
“혁명군부터 시작해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사우스 왕국과 싸우고 있다. 이는 다른 귀족들 또한 마찬가지. 그것들을 지켜보며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테르세우스가 말하는 이스트 왕국의 저력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녀석이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그게 뭐지?”
“이스트 왕국의 얼이다.”
“왕국의 얼이라.”
아그리나가 오르카이우스의 말을 조용히 곱씹었다.
테르세우스가 이 왕국을 그토록 좋아했던 이유.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다른 마법기사들보다 테르세우스는 유난히도 이스트 왕국을 좋아했다.
마치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듯한 시선과 말투 행동들까지.
그것들을 보며 자라온 마법기사들은 그와 똑같이 이스트 왕국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우리들이 지키려 했던 것들이라…….”
아그리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테르세우스는 하늘에서 이쪽을 내려다보며 과연 무슨 말들을 하고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쳐지나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를 찾아온 이유는?”
“당연한 것 아니겠나. 힘을 빌려달라고.”
“후후, 당연히 당신에게 힘을 빌려달라는 말은 아닐 테지?”
“물론.”
“그렇다면 역시 그 아이를 도와달라는 말인가?”
아그리나의 말에 오르카이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는 이미 히스링을 찾아갔다.”
“히스링은 무조건 설득될 거다. 아니, 설득조차 필요 없을 거야.”
“그 말은?”
“히스링 군단장 또한 반격을 준비해왔어. 이제는 때가 되었다 판단하겠지.”
“호오… 좋구만. 모두가 음지에 숨어 기회를 기다려왔던 게로군.”
“아마 혁명군의 일에 히스링 군단장도 어느 정도 관여되어 있을 거다. 그런 것들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그 사람이 아니니까.”
“재밌겠구만. 그렇다면 이제야말로 진정한 반격의 시작이 아닌가.”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되찾을 때지.”
아그리나가 한쪽을 응시하며 말했다.
이에 오르카이우스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문득 아그리나의 시선이 오르카이우스에게로 향했다.
“당신은 어떻게 할 셈이지?”
“나는 이미 이스트 왕국에 등을 돌렸던 몸이다. 이제와 염치없이 돌아와 무언가를 하려 할 생각은 없다.”
“호오… 하지만 왕국을 전복시키고 배신자들을 숙청하고 나면 많은 인재들을 필요로 할 텐데.”
“그렇다면 새로운 인재들에게 기회의 장이 열려야겠지. 나는 이미 뒷방의 늙은이일 뿐이다. 세상의 일에 그리 깊게 관여하고 싶지도, 한 가운데로 뛰어들고 싶지도 않다.”
“그렇군. 그대의 생각은 잘 알겠어.”
“쯧… 그래도 한때는 네 선배이자 스승이었던 사람인데, 그 말투는 좀 어떻게 안 되겠나?”
아그리나가 오르카이우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면 존중받을 만한 행동을 하셨어야지.”
“이 녀석이…….”
“그래도 뒤늦게나마 이렇게 나서줘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아그리나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사실 처형장에 나타나 크리울로스를 구한 것이 오르카이우스라는 사실은 이미 그녀도 알고 있었다.
못한 것은 못한 것대로 질책하고 비난해도, 잘한 것은 또 잘한 것대로 감사 인사를 하는 것.
그것이 아그리나의 방침이었다.
오르카이우스가 괜히 시선을 피하며 자리를 떠났다.
“아무튼 무운을 빌며 나는 이 왕국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마지막까지 지켜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