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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360화 (360/424)

360화 대화 (2)

아시테르가 린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린이 가만히 있으라는 듯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일리시가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린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웨스트 왕국의 공주라고요?”

“네. 제 이름은 하이시아 린이에요.”

“하이시아 린…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네요.”

그러나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이었다.

허나 그녀가 린을 의심한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차피 아일리시는 하트 군대를 돌리는 선택을 할 것이고, 사우스 왕국도 이스트 왕국에 더는 손을 대지 못할 것이다.

“아마 웨스트 왕국에서도 사우스 왕국에 사신을 보낼 거예요.”

“무슨 이유로요?”

“글쎄요. 그건 나중에 직접 확인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씀 드릴 순 있는 건, 서신에는 아마 제 이름이 적혀 있을 겁니다. 그것으로 제 신분의 증명을 대신하죠.”

린의 말에 아일리시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보다 아시테르의 곁에 웨스트 왕국의 공주까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큰일이었다.

사우스 왕국으로서도 웨스트 왕국은 상당히 까다로운 존재.

그런 존재가 이스트 왕국의 일에 개입이라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우스 왕국이 가장 바라지 않는 결과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병력을 돌리도록 하죠.”

“고마워요.”

“고마워 할 필요 없어요. 솔직히 이건 협박에 가깝지 않나요? 이런 실력 행사라니…….”

“그렇게 생각해도 딱히 부정할 순 없을 것 같네요.”

“쳇…….”

아시테르가 얄미워 아일리시가 눈을 흘겼다.

그래도 내심 이스트 왕국으로 향하지 않을 명분이 생겨 반갑기도 했다.

아일리시는 그대로 병력들을 이끌고 다시 왔던 곳으로 향했다.

돌아서는 수석기사들의 얼굴은 그야말로 똥을 씹은 표정들이었다.

부푼 마음으로 이스트 왕국 땅을 밟으려 했는데 그것이 보기 좋게 무산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아시테르의 입장으로선 더 이상 사우스 왕국의 병력들이 이쪽으로 오는 것이 달갑지 않다.

“나머지는 다른 곳에서 힘을 써주겠지.”

노스 왕국과 웨스트 왕국이 동시에 움직였다.

거기에 더해 웨스트 왕국에서는 린의 이름으로 사신까지 보냈으니, 사우스 왕국의 시선은 더더욱 이스트 왕국으로 향하지 못할 것이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모든 것을 다 끝낼 생각이었다.

아시테르가 이만 몸을 돌렸다.

에스파가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며 아시테르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잘 해결 됐네.”

“응. 아일리시가 우리들에게 아직까지는 호의적이었던 모양이야.”

“솔직히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우리들도 상당히 곤란해졌을 걸.”

“그렇지.”

“그런 점에서 정말로 다행이야. 순순히 군대를 물려줘서.”

“아일리시에게 받은 은혜는 보답할 생각이야.”

“아하하하. 과연 그 사람이 그런 걸 바랄까? 그보다는 네가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일걸?”

에스파의 말에 아시테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눈치였다.

이에 에스파도 황당하다는 표정을 보였다.

“왜 그런지 몰라?”

“…모르겠는데?”

“야. 네가 지금까지 계속 아일리시 앞에 나타나서 저 사람 앞길을 다 망쳐놨잖아.”

“아…….”

“그러니 얼마나 네가 질리겠냐.”

에스파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이에 아시테르가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가장 먼저 찾아갈 곳이 있지 않아?”

“있지.”

“복수는 해야지.”

“응.”

아시테르의 두 눈에 살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가 이렇게 진득한 살기를 내비치는 것도 정말 오랜만에 보는 일이었다.

“이제는 이성적인 대화가 아닌 감정적인 대화를 나눌 차례야.”

* * *

이스트 왕국의 수도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카르텔.

카르텔에 머무는 사람들은 늘 두려움에 휩싸여 살아갔다.

이유는 바로 살라 기사단이 이곳에 머물기 때문이었다.

살라 기사단의 전신은 섬광 마법기사단으로, 놀랍게도 이스트 왕국의 마법기사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공포로 군림하는 이유는 사우스 왕국에서 이들에게 귀족들이나 다른 마법기사단의 감시를 맡겼기 때문이다.

살라 기사단을 이끄는 하인트는 고위 귀족으로 승격해 사우스 왕국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들의 공훈을 하나하나 인정받아 지금은 완전한 사우스 왕국의 충신이 되어 있었다.

하인트의 권력도 막대해져 이제는 누구도 쉽게 건드릴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있는 곳으로 누군가 찾아왔다.

똑똑똑.

“무슨 일이냐?”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앉아서 술을 마시던 하인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렌시아 단장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알렌시아가?”

하인트가 비릿한 미소를 보이며 몸을 일으켰다.

여인이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술잔을 치웠다.

“들어오라고 해라.”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점검한 하인트가 자리에 앉았다.

거대한 책상에 금으로 된 의자.

호사스러움을 보이면서도 들어오는 이를 압도하기 위해 고안된 특제 책상과 의자였다.

하인트가 의자에 깊이 몸을 뉘였다.

문이 열리고 알렌시아가 안으로 들어섰다.

“불렀나요?”

“오오 알렌시아. 오랜만이로구만.”

“그렇게 오래 된 것 같지는 않은데요.”

“후후. 까칠한 말투도 여전하고, 아름다운 것도 여전하고…….”

하인트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말했다.

그의 께름칙한 시선에 알렌시아도 순간 표정관리가 안되었다.

“부른 이유가 뭔가요?”

“요즘 우리 왕국이 뒤숭숭한 건 알고 있지?”

“광장 사건 때문에요?”

“그래. 그 사건 때문에 말이야… 내가 여간 골치가 아픈 게 아니거든.”

“그건 그쪽 사정 아닌가요.”

“참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정 없이 말할 건가?”

“제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 다는 건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

이미 익숙한지 하인트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뭐 그래…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지. 내가 사우스 왕국에 붙어먹었기 때문 아닌가?”

“…….”

“거기에 더해 제 9기사단도 내가 죽였으니까.”

알렌시아의 얼굴이 잔뜩 굳어버렸다.

제 9기사단만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아려오는데, 거기에 더해 자연스럽게 아시테르의 마지막 모습까지 떠올랐다.

알렌시아의 표정을 살피던 하인트가 이죽거렸다.

“그래서 뭐? 그게 뭐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그게 지금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나요?”

“후후후. 그러는 너는? 너도 그 잘난 전 남자친구 버리고 고귀한 가문의 자제를 선택했잖아?”

“…당신과 나는 달라요.”

“다르기는! 내가 모를 줄 알아? 너는 아시테르가 천민인 걸 알고 많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네가 정말 아시테르를 사랑했다면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겠지.”

“맞아요. 솔직히 아시테르의 신분에 신경을 쓴 건 인정해요.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랑도 있고 그런 것까지 전부 신경 쓰는 사랑도 있는 법이에요. 그리고 이런 종류의 얘기는 굳이 당신과 나누고 싶지 않군요.”

“뭐, 맘대로 하라고.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기도 하니까.”

비릿한 조소를 흘린 하인트가 지도를 펼쳤다.

그 중 X자로 표시된 자리들을 하나씩 가리켰다.

“너도 ‘르네마리아’를 잘 알고 있지?”

“잘 알고 있죠. 그곳은 왜요?”

“이 르네마리아가 혁명군과 관련이 있어서 말이야.”

“여기는 그냥 주점일 뿐이에요.”

“아니. 르네마리아의 주인인 사르바타는 알고 보니 루기아 가문의 사람이었다. 그곳과 깊은 연관을 가진 그 자가 과연 혁명군을 도와주지 않았을 것 같나?”

“단순히 인연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의심하는 건가요?”

“너는 내가 그 정도로밖에 안 보이나? 크로마제를 비롯해 언노운 마법기사단의 단원들이 르네마리아에 신세를 졌다. 거기다 르네마리아의 자금 출처가 이상한 곳도 있어. 그러니 혁명군과 연관을 지어볼 수밖에.”

알렌시아가 조용히 지도를 살폈다.

X가 쳐져 있는 곳은 전부 르네마리아가 가입된 상인 길드와 관련된 곳이었다.

“그래서 저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죠?”

“이곳들을 쳐서 자네가 직접 조사해주었으면 좋겠군.”

“저들은 아는 것이 없어요.”

“아는 것이 없으면 알게 만들면 돼.”

“저더러 고문이라도 하라는 말인가요?”

“그렇지! 이제야 이해가 빠르게 되나보구만.”

“싫습니다.”

“네가 내게 싫다고 말할 깜냥이 되나?”

하인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현재 사우스 왕국의 총애를 받고 있는 사내.

반면 알렌시아는 칸의 위치 때문에 위태로운 상태였다.

칸은 여전히 사우스 왕국의 밑에서 일을 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나마도 알렌시아의 설득 때문에 혁명군에 가입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의 만류가 없었더라면 칸은 이미 그들과 함께 사우스 왕국과 싸웠을 것이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알렌시아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그래. 너는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어차피 너도 권력을 챙기고 싶고 더욱 위로 올라가고 싶잖아!? 이제 5대 가문은 그냥 옛날의 이야기일 뿐이야. 우리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장이 열렸어! 그 기회를 붙잡지 않으면 결국 우리들의 손해일 뿐이라고!”

“…….”

알렌시아는 더는 대꾸하지 않고 이만 몸을 돌렸다.

그녀가 싸늘한 태도를 보였음에도 하인트는 전혀 기분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순순한 그녀의 태도에 강한 만족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네가 아무리 자존심 챙기려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이미 이 왕국은 내 손아귀에서 돌아가고 있으니까.”

총지휘관이었던 폴로라스와 다이아 군대의 대장 바이헤른이 사라진 이상, 지금 이스트 왕국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하인트였다.

사우스 왕국에는 그 두 사람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말했지만 사실 보여주기식일 뿐이었다.

하인트는 굳이 그들을 찾으려 들지 않았다.

“언노운 마법기사단이 나타났다고? 크흥. 그래봤자지.”

그보다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하트 군대의 대장 아일리시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일리시는 꽃 마법을 사용하는 뛰어난 마도사인데다 미모까지 뛰어나다고 했다.

거기다 아직까지 미혼이라고 했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보이는 일이었다.

“내가 만약 아일리시랑 혼인이라도 해봐라… 그럼 제대로 된 인생 역전 아닌가!?”

상대가 비록 사우스 왕국의 트럼프라고 하지만, 자신 또한 이제는 이스트 왕국에서 제일가는 권력자였다.

그와 혼인을 하면 아일리시도 이스트 왕국에 뿌리 내릴 명분을 얻는 것이니 딱히 손해는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인트가 행복회로를 돌리던 때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행복한 상상이 깨지자 하인트가 인상을 구겼다.

“밖에 무슨 일인데 이렇게 시끄러운 거냐!?”

“누군가 이곳으로 찾아온 모양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시끄러워?”

“아무래도 손님은 아닌 것 같고… 혁명군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혁명군이!? 이것들이 미쳤나…….”

인상을 와락 구겼던 하인트가 이내 화색을 보였다.

이건 오히려 기회였다.

저들을 붙잡아 이곳으로 오고 있는 아일리시에게 혁명군을 바친다면, 그녀의 환심을 쉽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인트는 곧바로 준비태세를 갖추고 밖으로 향했다.

“혁명군은 지금 어디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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