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살라 기사단의 몰살 (3)
하인트는 사력을 다해 도망쳤다.
그의 수하들이 뒤따라 달려오고 있었다.
“이건 단단히 잘못 됐어……!”
저런 괴물을 무슨 수로 이기라는 말인가!?
아시테르는 전장의 수라가 되어 살라 기사단원들을 모조리 베어버리고 있었다.
그의 검에 닿으면 누구라도 예외는 없다.
사지가 갈라지고 핏물이 하늘 높이 솟구쳐오른다.
붉은 피가 대지를 한가득 적시고 있음에도 아시테르는 검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검에 서린 분노는 그간의 설움을 토해내듯 아직 멈출 길이 없어보였다.
그 때문에 하인트는 전장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하인트님! 이대로 퇴각해도 되는 겁니까!? 아직 아군의 숫자가 더 많습니다만…….”
“멍청한 놈!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을 때나 전투를 계속해보는거지… 너는 저놈들을 상대로 숫자가 의미가 있어 보이나!?”
하인트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섬광 마법기사단을 이끌만큼 하인트 또한 자신의 실력에 자신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는 도망치는 자신의 모습을 애써 위로하며 사력을 다해 달렸다.
그래도 최선을 다한 마법 공격을 여러 번 사용했으니 잠깐의 틈은 벌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그때 수풀을 헤치고 나간 하인트의 앞에 사우스 왕국 기사단이 보였다.
“아아!”
환희에 가득찬 표정으로 하인트가 그들의 대장부터 찾았다.
가장 선두에 있는 기사의 투구에 푸른 깃털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단번에 그가 이곳의 대장임을 알아본 하인트가 서둘러 달려나갔다.
“음?!”
하인트를 확인한 누네이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살라 기사단을 전에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하인트가 누군지 대번에 알아봤다.
“도와주십시오!”
“하인트 공!? 여기까지 무슨 일로… 아니 그보다 행색은 왜 그러십니까?”
하얗게 잔뜩 질려 있는 얼굴.
창백한 얼굴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꼭 공포에 질린 모습이었다.
하인트가 누네이르에게 소리쳤다.
“빨리 이곳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천천히 얘기해보십시오.”
“시간 없습니다! 하나하나 말할 시간이 없어요. 그보다 그 괴물 녀석이 쫓아오기 전에 도망쳐야 합니다!”
“에헤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했더니… 근래 일이 많아서 헛꿈이라도 꾸셨나 봅니다.”
“꿈이 아닙니다! 지금 서둘러서…….”
하인트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누네이르의 병력이 상당히 많다.
이건 오히려 독이었다.
가뜩이나 누네이르는 사우스 왕국에서 떠오르는 신성 중 한 명이었다.
자신감으로 가득찬 그가 아시테르 일행을 만난다면 분명 부딪히려 할 것이다.
“일단은…….”
“여기 있었군.”
순간 소름이 쫙 돋는 느낌이었다.
전신이 오싹해지는 차가운 목소리에 두 눈을 부릅뜬 하인트가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왔는지 아시테르와 카이드, 가이우스가 서 있었다.
거기다 뒤편에는 린도 함께 따라와 있었다.
“어느새…….”
“도망칠 수 없을 거다.”
아시테르의 무심한 시선이 하인트의 뒤편에 있는 기사단에게로 향했다.
“이스트 왕국의 기사단은 아닌 것 같은데…….”
“사우스 왕국의 개들인가보구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 땅을 밟고 있는 침략자들이다.”
“알겠습니다.”
아시테르의 답에 가이우스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카이드도 창을 고쳐 쥐며 걸어나갔다.
앞으로 나오는 두 사람을 보며 누네이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희들은 누구지? 못보던 자들인데.”
“사우스 왕국의 개들 맞지?”
“개…? 지금 우리더러 개라고 했나?”
“그럼 충실한 개를 개라 그러지 뭐 다른 말이 있나?”
“굉장히 무례한 자로군. 이스트 왕국과 관련이 있는 듯한데…….”
후우웅!
쿠우우우우웅!!!
들이닥치는 거대한 힘에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누네이르는 물론 다른 이들도 놀란 얼굴을 보였다.
가이우스가 연이어 주먹을 내지르자 또다시 거대한 마력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단숨에 수십 명의 기사들을 쓸어버린 가이우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 필요한가. 가장 무례한 자들은 남의 땅에 당당히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자들인데.”
가이우스의 말에 카이드가 피식 웃으며 창을 들어올렸다.
“그 말도 맞긴 하네.”
카이드의 전신에서 칠흑빛 마기가 폭사되어져 나왔다.
이를 본 누네이르가 대번에 상황을 파악하고 명령을 내렸다.
“이스트 왕국의 혁명군 놈들이다! 모두 죽여라!”
누네이르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카이드와 가이우스도 그들을 향해 마주 달렸다.
린은 뒤편에서 그들에게 마법을 걸어주었다.
갑자기 근력이 향상하고 몸도 훨씬 더 가벼워지자 카이드와 가이우스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칠흑빛 마기를 두른 창이 어지러이 춤을 추기 시작했고 가이우스는 날아오는 마법들을 모두 몸으로 받아내며 돌려주었다.
누네이르는 카이드와 가이우스보다 아시테르에게 주목했다.
“네놈이 대장이겠지?”
“비키세요. 당신보다 저쪽에 먼저 볼 일이 있습니다.”
“그럴 순 없다. 하인트 공은 사우스 왕국에 충성을 맹세한 새로운 시민이다. 사우스 왕국이 지켜주어야 할 아주 중요한 인물이라는 얘기지.”
“그렇군요.”
아시테르가 검을 들어올렸다.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은 그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누네이르는 순간 자신이 무엇을 본 건지 제 눈을 의심했다.
갑자기 일그러지는 공간, 그와 동시에 기사들과 병사들의 몸에서 핏물이 터져나왔다.
몸이 터져버리는 고통에 여기저기서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려나왔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
아시테르는 무심하게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끝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수십, 수백의 병사들이 피를 토해내며 죽었다.
처음 겪어보는 이 공포감에 누네이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크윽, 저 괴물새끼……!”
하인트가 결국 몸을 돌려 다시 도망가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같은 걸 두 번씩이나 당해줄 아시테르가 아니었다.
섬전과도 같은 빠르기.
엄청난 속도로 몸을 날린 아시테르가 하인트의 한쪽 팔을 잘라버렸다.
“끄아아아악!”
하인트가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토해냈고, 누네이르는 온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의 눈앞에 있었건만 언제 어떻게 움직였는지 전혀 보지 못했다.
만약 저 검 끝이 하인트가 아닌 자신을 향했다면…….
누네이르가 마른 침을 삼키며 자신의 목을 매만져보였다.
갑자기 울대가 불편해지며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다.
“사, 살아 있나…….”
온전하게 붙어 있는 자신의 목을 매만지며 누네이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시테르는 검을 늘어트린 채로 하인트 앞에 서있었다.
“이제와서 대체 왜 이러는 거지!? 네놈은 이스트 왕국을 버리고 도망간 것이 아니었나? 아니 애초에… 이스트 왕국은 네놈을 영웅으로 여기지 않아! 이 왕국은 네놈을 버렸단 말이다! 그런데도 넌 어째서 이 썩어빠진 왕국을 위해 싸우려는 거냐!?”
“내 부모님이 사랑하는 나라니까.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이스트 왕국을 버린 적이 없다.”
아시테르의 검이 또 한 번 움직였다.
그는 쓰러져 있는 하인트의 발을 베어버렸다.
하인트의 비명이 전장 가득히 울려 퍼졌다.
“거기다 꼭 이스트 왕국 때문이 아니더라도… 당신은 용서할 수 없어.”
“크흐흐… 그건 9기사단 때문이냐?”
하인트의 물음에 아시테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인트가 돌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차피 아시테르의 손아귀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이미 자포자기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날은 아주 짜릿했다! 배신당한 놈들의 얼굴이란… 그 얼굴에 대놓고 오줌을 갈겨버리고 싶어질 정도라니까!”
일부러 아시테르를 도발하듯 말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아시테르가 단칼에 자신을 죽여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시테르는 놀라울 정도로 이성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냐? 너무 오래 돼서 감흥이 없는 거냐? 아니면… 애초에 그건 핑계일 뿐인가?”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죽여줄 생각이다.”
아시테르가 뒤편을 바라보기도 전에 린이 먼저 나서서 하인트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을 것 같이 뛰어난 치유 실력을 지닌 린이었다.
그녀는 짧은 순간에 하인트를 치료해 버렸다.
그리곤 아시테르를 돌아보았다.
린의 표정도 훨씬 차갑게 굳어 있었다.
“저도 더는 못 들어주겠네요.”
그녀는 딱 이 한 마디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안에 담겨 있는 의미는 명확했다.
아시테르가 다시 나섰다.
“설마… 아니지……?”
아시테르가 다시 검을 들어 하인트의 몸 곳곳을 베었다.
린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상처난 하인트의 몸을 치료해주었다.
하인트가 계속해서 비명을 토해냈고 아시테르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기사들과 병사들도 하얗게 질려버릴 정도였다.
뒤늦게 이곳으로 온 세아츠리스와 에스파도 그런 아시테르의 모습을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저 녀석이 저렇게까지 할 정도면…….”
“오늘은 모른 척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시테르 오빠도 사람이잖아요.”
“당연하지. 솔직히 말해서 나도 저렇게까지 해버리고 싶을 정도야.”
“저는 오빠가 걱정되네요. 오늘 하루 너무 많은 감정들을 내비치고 있잖아요.”
“괜찮아. 아시테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녀석이잖아. 거기다 아시테르의 곁에는 린도 있고 우리도 있어.”
에스파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이드와 가이우스 두 사람은 아시테르가 방해받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사실상 이곳에 있는 병력만으로 이 두 사람을 막는다는 것도 무리인 일이었다.
“진짜 강해졌구나 우리들도…….”
예전 같았으면 정말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그런데 이제는 만 명이 넘는 군대가 눈앞에 있어도 겁을 먹거나 두렵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들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고 또 동료들을 믿었다.
“뒤쪽은 모두 끝났습니다.”
어느새 가까이로 다가온 데미리우스가 에스파에게 상황을 보고해주었다.
에스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생하셨어요 형.”
“별말씀을. 그보다 우리 대장의 상태는?”
“보다시피 극대노 상태에요.”
“흐음… 9기사단은 아시테르 대장에게 가족과도 같은 사람들이었으니까…….”
“9기사단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잃었잖아요.”
“복수라… 아시테르 오빠와 별로 어울리진 않는 단어 같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라빈이 한 마디 거들었다.
에이브릴도 아시테르의 모습을 보며 무거운 표정을 보였다.
그때 그들이 있는 곳으로 또다른 기사단이 접근해 왔다.
“누구지?”
“저 문양은…….”
“일섬 마법기사단이다.”
“일섬 마법기사단이면 알렌시아가 이끄는 마법기사단이 아닌가?”
“맞아.”
“여기서 대장과 마주하게 되면 사고 같은데?”
“그러기엔 이미 우리가 이곳에 있는 걸 알고 온 것 같은데.”
그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섬 마법기사단의 기사들이 이곳을 둘러싸고 있었다.
하인트를 무자비하게 베던 아시테르의 검이 멈췄다.
이때다 싶어 만신창이가 된 하인트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사, 살려줘… 아니 그냥 죽여줘!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나도 살려고 했던 거란 말이다!”
“…….”
아시테르가 검을 늘어트리며 몸을 돌렸다.
익숙한 마력이 느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