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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365화 (365/424)

365화 대면

“내가 못할 것 같아?”

“…….”

알렌시아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과거에는 아시테르가 저런 미소를 보일 때면 어딘가 믿음직하고 든든했었다.

그것은 그동안 아시테르가 보여준 행동들이 쌓은 신뢰에서부터 비롯된 마음이었다.

헌데 이제는 다르다.

아시테르는 같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인데 과거와 달리 지금은 그저 불안하기만 하다.

그게 알렌시아의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가능할 거라곤 생각 안 해.”

“흥. 웃기네. 그렇게 되질 않길 바라는 마음이겠지.”

옆에서 듣고 있던 카이드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의 말에 알렌시아도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되질 않길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으니까.

사우스 왕국이 이스트 왕국을 점령하면서 알렌시아는 독보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물론 이스트 왕국의 신인이라며 추앙받긴 했지만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알렌시아는 은근하게 이스트 왕국의 귀족들이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것을 즐겼다.

거기다 과거에는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명확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알렌시아의 지위가 점점 더 높아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겼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을 잃을 순 없다.

“…변했구나.”

알렌시아를 빤히 바라보던 아시테르가 씁쓸한 미소로 말했다.

그러자 알렌시아가 그를 마주보았다.

“세월이 흘렀잖아. 사람은 누구나 변해.”

“맞아요. 사람은 누구나 변해요. 성장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점점 후퇴하는 사람도 있죠.”

그때 아시테르의 곁에 잠자코 있던 린이 슬쩍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모습을 본 알렌시아가 순간 흠칫했다.

어디에 있더라도 주목받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답고 수려한 외모였다.

거기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그녀를 보며 알렌시아가 물었다.

“당신은 못 보던 사람이네요.”

“처음 뵙네요. 당신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 아시테르에게서요?”

“네.”

린이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알렌시아가 린과 아시테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거기다 아시테르의 저 눈빛은 알렌시아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혹시… 새로 만나는 사람이야?”

“맞아요.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제 이름은 하이시아 린이에요.”

“아… 체르도네 알렌시아라고 해요. 그런데 하이시아…? 들어보지 못한 가문 이름인데…….”

“네. 별 볼일 없는 가문이라 들어보지 못했을 거예요.”

능청스러운 린의 답에 몇몇 사람들이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이시아 가문이 별 볼일 없다니…….

웨스트 왕국 사람들이 들었다면 어이가 없어 뒤로 넘어졌을 것이다.

허나 알렌시아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린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렇군요…….”

그러면서도 알렌시아는 슬쩍 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차려 입은 옷은 생각보다 수수했다.

만약 돈이 많은 귀족 가문의 영애였다면 입고 있는 옷도 남달랐을 텐데.

하지만 린이 입고 있는 옷은 철저히 편안함에 치중한 옷이었다.

“그럼 실력이 뛰어난 마도사인가보군요.”

“어머? 글쎄요… 제 실력이 뛰어난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요?”

알렌시아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가 갑자기 웃는 이유를 몰라 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가문에 돈은 많나요?”

“음… 부족하지 않은 정도로 있는 것 같군요.”

“흐음… 그렇군요,”

“근데 그런 건 왜 물어보시는 건가요?”

“네? 뭐가요?”

“보통 가문에 돈이 많냐는 질문은 초면인 사람에게 안하지 않나요?”

“아, 기분이 언짢았다면 미안해요.”

알렌시아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니에요. 그보다 아시테르의 전 연인이라고 들었어요.”

“네… 한때는 그랬었죠.”

알렌시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직 아시테르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나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제게는 사랑하는 남편이 있어요.”

“아…! 그렇군요. 실례했어요. 그럼 미련이나 후회도 없으시겠네요?”

“네. 그건…….”

알렌시아는 어째서인지 답이 선뜻 나오질 않았다.

과연 그녀가 미련이나 후회가 없다고 과감하게 답할 수 있을까.

린을 처음 보자마자 가문에 대해 물은 것도, 그녀의 실력에 대해 물은 것도 어쩌면 자신과 비교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신경쓰지 않았다면 다른 것들에 대해 묻거나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터다.

헌데 알렌시아는 지금 이곳에서 누구보다 린의 존재를 신경 쓰고 있었다.

어쩌면 린도 그 점을 진즉에 알아차렸을지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알렌시아가 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얘기해도 될까요?”

“네. 얘기하세요.”

“아시테르의 옆에 있으면 불행해질 때가 많아요.”

“야, 알렌시아……?”

“호오.”

“…….”

알렌시아의 말에 언노운 마법기사단이 먼저 반응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시테르에게 커다란 상처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경계한 것이다.

하지만 알렌시아는 그들의 반응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서요?”

반면 린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러자 알렌시아가 피식 웃었다.

“알고 있으라고요. 그 불행이 생각보다 나 자신을 깎아 먹거든요.”

“해가 떠오르면 그림자는 자연스레 생기게 마련이에요.”

린이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시테르는 나의 어둠을 거두어준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을 고작 그 작은 그림자 때문에 밀어내진 않을 거예요.”

“해가 늘 떠 있진 않을 거란 것도 잘 알고 있겠군요.”

“그럼 제가 달빛이 되어 이 사람을 감싸주면 되지 않을까요. 당신이 얘기한 대로 해가 늘 떠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시테르에게 아주 푹 빠져 있군요.”

“네. 그래서 당신에게 감사했어요.”

“나에게……?”

“당신이 놓아주지 않았더라면 이 미련한 사람은 언제까지고 당신만 바라봤을 테니까요.”

알렌시아의 인상이 굳었다.

반면 다른 이들은 통쾌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아시테르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될지 의문이군요.”

“그건 당신이 걱정할 부분이 아닌 것 같네요.”

린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알렌시아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녀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이스트 왕국을 되찾겠다고?”

“응.”

“그게 말처럼 쉬울 것 같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어.”

“…사우스 왕국은 어떻게 할 건데?”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많은 사람들이 또다시 전쟁은 일어나질 않길 바라고 있어.”

“나 또한 동의해. 하지만 마땅히 흘려야 할 피가 있다면 그때는 망설이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 생각해.”

“나도 이스트 왕국 사람으로서 이스트 왕국이 사우스 왕국에게서 독립하길 진심으로 바라.”

“다행이네. 그럼 적어도 우리들의 앞길을 방해하진 말아줘.”

아시테르의 대답에 알렌시아가 순간 움찔했다.

다른 때였다면 아시테르는 분명 자신에게 함께 하자는 말을 건네 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함께’가 아닌 ‘방해’라는 단어를 택했다.

그만큼 아시테르와 알렌시아 사이의 거리가 멀어져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 거리는 앞으로도 좁힐 수 없을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알렌시아는 씁쓸한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네 앞길을 막아서게 된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길 바라지만… 만약 네가 그런 선택을 한다면 나는 존중해줄 수 있어. 다만, 나 또한 최선을 다해 너를 쓰러트릴 뿐이야.”

알렌시아의 눈동자와 아시테르의 눈동자가 서로 마주했다.

무감정하면서도 차갑게 식은 눈빛.

단 한 번도 아시테르는 이런 눈빛으로 알렌시아를 쳐다본 적이 없었다.

늘 사랑스러움이 가득한 따스한 눈빛이었다.

그것은 아시테르를 두고 나온 던전에서조차 그러했다.

알렌시아는 아시테르와 있으면서도 늘 가슴 한 쪽에 외로움을 느껴왔었다.

과연 아시테르에게 자신은 필요한 존재인가.

그런 의문이 늘 머릿속 어딘가에 자리 잡아 자신을 괴롭혀 왔었다.

때로는 아시테르가 자신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왔었다.

이런 생각들에 사로잡혀 지내다보니 자연스레 아시테르와 멀어지는 길을 택했다.

헌데 이제와 뒤늦게 깨달았다.

아시테르는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봐왔다.

아시테르는 알렌시아를 필요로 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녀에게 무언가를 바라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저 알렌시아를 그 존재 자체로 바라봐주고 사랑해왔던 것이다.

다만 편안함과 익숙함에 속아 알렌시아가 그것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변한 것은 아시테르가 아닌 자신이었으며, 그런 아시테르의 마음을 저버린 것 또한 자신이었다.

칸과의 생활도 행복했지만 아시테르와 함께 있을 때랑은 무언가 다른 느낌이었다.

아시테르의 말에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는 기분이었지만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

아시테르가 언노운 마법기사단과 함께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살라 기사단에 대한 복수는 끝마쳤다.

거기다 사우스 왕국의 기사단까지 붙잡아버렸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처우는 너에게 맡길게.”

“뭐?”

“이스트 왕국 국민들을 괴롭힌 자들이야.”

아시테르는 이 말만 남기고 떠나버렸다.

알렌시아는 그런 아시테르를 붙잡을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가슴 속에 남겨두어야 한다.

“단장님……?”

부기사단장 콜로츠네스가 알렌시아의 곁에 다가와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알렌시아는 한참동안이나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글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설마 저들의 말을 믿는 겁니까?”

“당치도 않습니다! 이스트 왕국이 독립을 한다뇨! 차라리 저들의 존재를 빠르게 보고해서 이쪽에서 먼저 쳐야 합니다!”

피뢰르가 목에 핏대를 올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알렌시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그 전에 언노운 마법기사단은 모습을 감출 것이다.

거기다 아시테르 말의 뉘앙스를 보니 절대로 언노운 마법기사단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얼마나 많은 세력이 저쪽에 가담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어. 일단은 상황을 지켜본다.”

“말도 안 됩니다! 반역이나 다름없는데…….”

“반역?”

피뢰르의 말에 알렌시아가 인상을 구겼다.

그러자 피뢰르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피뢰르. 너는 어디 사람이지? 사우스 왕국 사람인가? 그게 아니면 이스트 왕국 사람인가?”

“저는… 이스트 왕국 사람입니다.”

“그래. 그걸 기억하도록 해.”

알렌시아도 이만 몸을 돌렸다.

살라 기사단에 볼 일이 있어서 다시 발길을 돌렸던 거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살라 기사단 모두가 죽음을 맞이한 지금, 자신의 볼일을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보단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칸을 만나봐야 했다.

‘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해.’

벌써부터 아시테르 쪽에 동조해 있는지, 그게 아니면 아직까지 신중한 태도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나서야 알렌시아도 자신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아시테르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시테르와 언노운 마법기사단이 돌아왔다니…….”

사우스 왕국의 하트 군대가 회군했다는 소식이 급보로 전해져 왔었다.

어쩌면 이것 또한 아시테르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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