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이스트 왕국의 반격 (2)
베거이트가 놀란 얼굴로 수하를 돌아보았다.
“지금 뭐라고?”
“그들을 이끌고 있는 자가 바로 히스링 군단장입니다.”
“히스링은 오르페 가문에 처박혀 있었잖아?”
“예… 분명 오르페 가문 땅에 들어가 은거했는데… 돌연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흐음… 히스링이 움직였다는 것은 이 일이 우연히 벌어진 게 아니라 오랜 시간 계획되어 왔다는 말인가?”
베거이트가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그렇다면 이쪽도 더욱 신중을 기해 대응해야 했다.
히스링이 나선 것은 완전히 상정 외였다.
당연히 혁명군과 언노운 마법기사단이 전부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히슬링은 신중한 인물이었으니, 이번 일에도 상황을 관망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런데 히스링이 먼저 움직였다는 것은 그도 이 계획의 중심에 있다는 뜻이었다.
“일단은 우리 쪽 세 개 부대의 병력과 다이아 군대 세 개 대대가 함께 가서 대응한다.”
“그렇게나 많은 병력을 투입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멍청한 놈. 상대는 이스트 왕국의 전 군단장이다. 히스링이라는 사내를 결코 만만하게 보지마라.”
“흐음… 알겠습니다. 그럼 나머지 부대는 어떻게 할까요? 다른 곳에 추가적으로 배치할까요?”
“이쪽에서 시선을 끌고 히스링이라는 금패로 우리를 흔들었다면… 이제는 언노운 기사단이 본격적으로 나설 차례다.”
“그들을 찾는데 주력하겠습니다.”
“애써 찾을 필요 없다. 놈들은 반드시 이곳에 나타날 테니까.”
베거이트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이는 언노운 마법기사단이 자주 써먹는 방법이기도 했다.
놈들은 여기저기 상대의 시선을 끌고 그 빈틈을 파고드는 전략을 자주 써왔다.
이쪽에도 언노운 마법기사단과 직접 전투를 치러본 기사들이 있었기에 놈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진 적이 있었다.
때문에 베거이트도 언노운 마법기사단을 상대로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어느 정도는 갈피를 잡고 있었다.
“분명 다른 쪽에서 기습을 가해올 것이다. 잘 찾아봐라.”
“예!”
“그리고 왕성의 왕족들도 인질로 붙잡아. 여차하면 왕족들을 이용해 시간을 버는 거다.”
어차피 시간은 이쪽 편에 있었다.
급한 것은 상대다.
이쪽은 시간만 잘 끌어도 차례차례 지원군이 도착할 터.
반면 상대는 처음인 지금이 가장 최고의 전력일 것이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쪽이 유리해진다는 말이었다.
“애초에 우리들의 병력이 훨씬 더 많기도 하고.”
베거이트가 슬쩍 미소를 보였다.
상대가 예상치 못하게 움직이긴 했지만 어쨌든 이쪽이 유리한 상황인 것은 부정할 수 없을 터다.
“너희는 상대를 잘못 건드린 거다.”
폴로라스와 바이헤른이 패한 이유는 하나다.
바로 방심했기 때문.
그들은 언노운 마법기사단과 혁명군을 너무나도 얕봤다.
하지만 자신은 다르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그들을 막아낼 생각으로 싸울 테니 말이다.
생각을 마친 베거이트가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움직였다.
* * *
쿠르르릉--!!!
콰과과과과광!!!
여기저기 폭발이 일고 마법기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의 갑옷 위에는 뜨거운 태양이 새겨져 있었다.
“오랜만이네. 당신과 이렇게 전장에 나서는 건 말이야.”
“그렇군. 나 또한 감회가 새로워.”
“그런데… 대체 그 친구가 무슨 말을 했길래 당신이 움직이는 걸까?”
반백발의 사내 옆에 선 랑프레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사내, 히스링이 전방을 살폈다.
“별말 안했어.”
“그럴 리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며 당신을 설득하려 했지만… 당신은 꿈쩍도 하지 않았잖아?”
“후후후 그랬지.”
히스링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난 밤 다녀갔던 아시테르를 기억했다.
아시테르는 정말로 히스링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눈빛으로 말해주었다.
그 눈빛은 정말이지 아레나를 똑 닮아 있었다.
한때는 히스링도 아레나를 열렬히 사모했기에 잘 알아볼 수 있었다.
아시테르는 떠나기 전에 한 가지의 물건을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히스링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손아귀에 쥐어진 것은 바로 테르세우스의 유품이었다.
새하얀 깃털이 달린 펜.
테르세우스가 과거 자유를 꿈꾸며 직접 만든 펜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히스링이 입을 열었다.
“네가 이걸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지?”
“할아버지한테 건네받으며 들었습니다. 테르세우스님은 자신의 의지를 이어갈 수 있을 만한 사람에게 이 펜을 선물해주고 싶어 하셨다네요. 제가 감히 생각하기에 그 펜에 담긴 의지에 가장 걸맞는 사람은 바로 히스링님이십니다.”
“…….”
“저는 테르세우스님께서 그 펜에 뜻을 담으실 때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히스링님은 그 펜에 담긴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 말만을 남기고 아시테르는 떠났다.
그리고 뒤이어 칸이 히스링을 찾아왔다.
그는 히스링을 보자마자 바닥에 머리를 찍으며 사과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히스링님!”
“자네가 왜 내게 죄송하지?”
“저는 제 뜻을 관철시킨다는 이유로 아무런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병들어 썩어 들어가고 있는 데도… 아픈 상처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데도 저는 묵과했습니다.”
“으음…….”
“그래서 이제라도 뒤늦게 바로 잡으려 합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있나?”
“오랜 친구가 한밤에 다녀갔습니다. 제게 힘을 빌려 달라 말하더군요.”
“아시테르인가…….”
히스링의 말에 칸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친구도 참 바쁘군…….”
“부럽지 않습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저희는 무엇이 두려워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을까요. 반면 아시테르는 그 무언가로부터 굉장히 자유로워보였습니다. 그리고 막상 아시테르가 눈앞에 있으니 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 생각할 필요 없네.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니.”
과거를 잠시 회상했던 히스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마법기사들도 뜻을 함께 해주었다.
거기다 히스링을 지지했던 귀족들도 서슴없이 힘을 빌려주었다.
덕분에 히스링도 막힘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몇몇 왕족들과 귀족들이 자신들만이 아는 통로로 길을 열어주었고, 히스링의 아래 다시 모인 여명 마법기사단이 힘을 뭉쳤다.
거기에 더해 히스링의 곁에는 아그리나 단장과 무그레날로 단장 등 다른 마법기사단의 단장들도 함께 하고 있었다.
“칸은?”
“다른 쪽에서 치고 들어오겠다고 하더군.”
“호오… 혼자서?”
“아니지. 부부가 함께 일거다.”
히스링이 반대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쪽에서는 칸과 돌풍 마법기사단이 공격을 가해오고 있었다.
돌풍 마법기사단 옆에는 일섬 마법기사단이 함께였다.
이번 일이 썩 내키지 않는다는 몇몇 기사들은 전장을 이탈했으나, 나머지는 알렌시아의 뜻을 존중하고 함께 했다.
칸이 만들어내는 바람이 전장을 휩쓸고 그 위로 전격이 떨어졌다.
이를 본 돌풍 마법기사단과 일섬 마법기사단은 순간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과거에도 우리 둘 기사단은 연합 작전을 많이 펼쳤는데 말이야.”
“단장님들이 서로 부부이니만큼 우리들도 자연스럽게 붙어 다니게 되었잖아.”
“으흐흐흐, 이거 옛날 생각이 많이 나는데.”
“신이 절로 나는구만!!!! 다른 것보다 사우스 왕국 놈들을 죽일 생각에 말이야.”
“어후… 그런 야만스러운 말은 말아요.”
“뭐가 어떻게 되었든… 이번에는 우리가 시원하게 한 방 먹일 차례다.”
기사단원들이 저마다 신나게 떠들며 마법을 쏟아 부었다.
그들의 표정은 밝았지만 나름대로 마음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이 전장에 참여했을 터다.
다만 그 무거운 마음가짐을 감추기 위해 애써 밝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런 분위기를 파악한 칸이 입을 열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라. 우리들의 뒤에는 히스링 군단장님이 계신다.”
“오오오오!!!”
“우오오오---!!!”
“그리고 이스트 왕국 국민들도 우리와 함께다. 그러니 모두 함께 힘을 합쳐 이 땅을 더럽게 유린하던 자들을 몰아내는 거다.”
칸이 가장 선두에 섰다.
그가 두 팔을 들어 올리자 허공에 무수히 많은 바람의 칼날이 형성되었다.
파바바방!!!
콰르르릉!! 퍼버버버버버버벙---!!!!
그보다 한 발 먼저 낙뢰가 쏟아지며 전방을 초토화시켰다.
알렌시아의 마법도 그동안 꾸준한 성장을 이루어 굉장한 위력을 선보였다.
“크윽… 일섬 마법기사단도 이번 일에 가담한 것인가……!”
사우스 왕국 기사들을 이끌던 지휘관이 고통에 신음하며 소리쳤다.
알렌시아는 무심한 눈으로 그를 처단했다.
“당연하지. 일섬 마법기사단 또한 이스트 왕국의 기사단이니까.”
알렌시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새롭게 창단된 애송이 기사단이라 놀림 받았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어느덧 훌륭하게 성장한 두 기사단이 멋진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다.
히스링과 다른 마법기사단이 왕성을 중심으로 사우스 왕국 기사들을 몰아내기 시작했고, 칸과 알렌시아는 측면에서 그들을 에워쌌다.
판이 그렇게 흘러가는 동안 카이드와 자비토는 여전히 사우스 왕국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눈앞의 적들을 일거에 베어낸 카이드가 옆을 바라보았다.
“괜찮냐?”
“이 정도로는 끄떡없다.”
“오, 여기 라빈도 없는데 강한 척은 그만하지 그래?”
“후우… 솔직히 죽을 것 같다. 이건 많아도 너무 많은 것 아니냐?”
자비토가 땀을 닦아내며 앞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도 적들이 바글바글하게 몰려 있었다.
“숫자가 줄질 않네.”
“크흐… 약골은 빠져 있어라.”
“누가 누구더러 약골이래.”
“내가 너더러 약골이라 그러지 누가 그러겠냐.”
카이드가 창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전투가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났건만 카이드는 아직까지도 팔팔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그는 더더욱 투지를 불태우며 적들과 조우했다.
콰르르르르릉!!!!!
칠흑빛 마기가 일대를 휩쓸었다.
쏟아지는 마법 공격들을 보고도 카이드는 그대로 적진에 파고들었다.
그의 창이 빛을 받아 번뜩일 때마다 적들의 수가 대폭 줄어들었다.
자비토는 그것을 지켜보면서 헛웃음이 새어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
일당백?
카이드의 앞에선 그저 우스운 얘기일 뿐이다.
저들도 나름 많은 훈련을 견뎌오며 거듭 성장해온 강병들일 텐데 카이드의 앞에서는 그저 허수아비 수준에 불과했다.
자비토가 문득 주변을 살폈다.
벌써 수천 구의 시체가 주변 가득히 쌓여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꽤나 성장했군.”
카이드만이 아니라 자비토 스스로도 상당한 성장을 이루었음에 절로 감탄했다.
그는 쿡쿡 쑤시는 팔목을 돌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도 보조는 맞춰 줘야지.”
카이드와 자비토의 역할은 딱 이 정도였다.
정면에서 최대한 날뛰는 것.
카이드는 누구보다 흔쾌히 이 임무를 맡아주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카이드가 아니면 선뜻 이 미친 임무를 맡아주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아시테르는 카이드의 폭주를 우려해 자비토를 곁에 붙여주었다.
‘상황이 무르익으면 카이드와 함께 전장을 빠져나와. 나머지는 이스트 왕국 마법기사들이 마무리 해 줄 거야.’
아시테르의 말이 떠오른 자비토는 슬쩍 저만치 뒤편을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불길이 치솟고 건물이 무너지고 있었다.
“저쪽도 난리도 아니겠구만.”
그래도 걱정은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자신의 아버지인 히스링이 저 전장 한 가운데에 있었으니까.
“그보다… 그 녀석들은 잘 도착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