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화 자유령
아비규환으로 변했던 수도의 낮은 해가 저물어가며 어느덧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커다란 대로 양옆으로 손과 발이 묶인 사우스 왕국 군사들이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그 수가 상당하다.
그들 사이로 이스트 왕국의 군사들이 지나다녔다.
사우스 왕국 군사들이 필사의 항쟁을 벌였지만 결국 그들은 패배하고 말았다.
이스트 왕국 마법기사단이 모이고 혁명군까지 가담하면서 크게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남은 지휘관들이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벌어보기 위해 고군분투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들 모두 목숨을 잃으며 결국 지휘체계마저 잃었다.
그렇게 남겨진 사우스 왕국 군사들은 끝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 그들에게 더욱 절망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다이아 군대가 웨스트 왕국군에 패배했다는 소식입니다.”
“다이아 군대가?”
“예. 그들이 이곳으로 올 가능성은 없어졌습니다.”
“헌데 노스 왕국이 아닌 웨스트 왕국군에 패배했다?”
“저도 그 점이 놀라웠는데… 알고 보니 그 전투에 로얄나이츠가 무려 네 명이나 참전했다고 합니다.”
“호오… 아무리 로얄나이츠라고 해도 다이아 군대 또한 일국을 대표하는 강군인데…….”
“그 중에는 서쪽의 거인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야트가?”
보고를 듣고 있던 히스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야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는 히스링도 직접 겪어봐서 잘 알고 있다.
“거기다 그곳에 언노운 마법기사단도 있다는 후문입니다.”
“그랬군…….”
히스링은 아시테르의 움직임에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사실상 이 일 모두 아시테르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군가는 몇 년을 고심했는데, 아시테르는 마치 너무나 간단하게 일을 해결해버리고 있었다.
“아니지. 해결까지는 아닌가… 어쩌면 이스트 왕국은 이제부터가 시작인지도 모르니…….”
사우스 왕국이 물러갔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이제는 지켜야 할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이야말로 왕국 내부의 썩은 상처를 도려내야 할 차례다.
그대로 두면 이것은 또다시 곪아 터지고 말 것이다.
히스링이 왕성을 바라보았다.
“아그리나.”
“왜 그러지?”
“네가 생각하기엔 어떠냐?”
“뭐가?”
“이 시대에 왕이 꼭 필요하다 생각하나?”
“글쎄.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따로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군.”
“그렇지… 왕이란 무엇인가?”
“히스링. 너답지 않게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이가 들어보니 조금씩 그런 생각이 들더군. 왕이라는 존재 자체가 어쩌면 이 나라를 썩어 들어가게 하는 것은 아닐까.”
“오르카이우스에게 감화된 것인가?”
“후후. 그 사람은 그저 자신의 욕심을 감췄을 뿐이야.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내가 왕이 되고자 함이 아니야. 정말로 이 나라에 왕이 필요 없다면, 왕이라는 존재를 없애고 싶을 뿐이다.”
히스링의 말에 아그리나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듣기에 따라서 이 말은 실로 엄청난 발언이 될지 모른다.
“히스링…….”
“그냥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었네.”
히스링이 아그리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 아그리나는 알아차릴 겨를이 없었다.
“두 분 단장님께 인사드립니다.”
그들이 있는 곳으로 부드러운 인상의 사내가 찾아왔다.
그가 누군지 대번에 알아본 히스링이 반갑게 인사했다.
“테오도라로군.”
“이렇게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외세를 몰아내는 일이라면 당연히 함께 해야지.”
“남은 사우스 왕국군도 패퇴하고 있습니다. 수도는 이제야 안정을 되찾았고, 이쪽의 소식을 들은 국민들이 함께 일어나주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나…….”
“예. 지방의 군사들도 들고 일어나 사우스 왕국군을 몰아내고 있습니다.”
“사우스 왕국 측에서는?”
“대응하지 못할 겁니다. 놀랍게도 사우스 왕국은 현재 웨스트 왕국과 대치중입니다.”
테오도라의 말 대로였다.
현재 사우스 왕국은 국경 근처에 배치되어 있는 웨스트 왕국 군사들 때문에 촌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이스트 왕국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웨스트 왕국의 대군이 밀고 들어올 판에 이스트 왕국이 눈에 들어올 틈이 없었던 것이다.
다이아 군대를 제외한 남은 트럼프 군대도 이쪽에 주력 배치된 상황이었다.
“잘됐군.”
“이대로 상황이 흘러가면 우리들의 승리로 끝날 것입니다.”
“그렇겠지. 그리고 남은 것은 이 나라가 이제 어떻게 나아갈지를 의논하는 거다.”
히스링 단장이 힘 있는 눈으로 왕성을 돌아보았다.
* * *
한편 수도 밖을 빠져나온 사우스 왕국 군사들은 부리나케 내달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면 되는 거냐!?”
“이쪽으로 쭉 가면 돼!”
“일단은 포시몰리까지만 가면 된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그들의 앞으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에 사우스 왕국 군사들이 자리에 멈춰 섰다.
“너희들은 누구냐!?”
이스트 왕국 군사들이라기엔 그 차림새가 매우 이상했다.
거기다 건들거리는 몸짓과 얼굴 여기저기 보이는 악세사리들.
아무리 봐도 이스트 왕국 쪽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를 보고 안심한 사우스 왕국 군사들이 곧 험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비켜라. 감히 우리들의 앞을 가로막으려 하다니.”
“뭐? 비켜? 비키라고? 캬하하하!”
얼굴이 상처로 가득한 사내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그의 희번뜩한 시선이 눈앞의 사내에게로 꽂혔다.
“너희가 무게 잡으면 뭐 어쩔 건데?”
사내의 손짓에 여기저기 더 많은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모두 무기를 들고 무장을 한 상태였다.
사우스 왕국 군사들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평범한 화적떼나 강도들이었다면 무장한 자신들을 보고 애초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터다.
그때 얼굴에 상처로 가득한 사내, 킬리안이 앞으로 나섰다.
“됐고. 가진 거나 다 내놔라.”
“뭐?”
“너희가 갖고 있는 것들, 입고 있는 것들, 들고 있는 것들 다 내놓으라고.”
사우스 왕국 군사들은 순간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들이 아무리 패잔병이라 해도 이런 도적떼에게 당할 수준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건방진 새끼가!”
뒤편에 있던 기사 한 명이 검을 들고 뛰쳐나갔다.
그러자 킬리안이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죽어라!”
휘웅!
카아앙! 촤라락!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기사의 몸이 옆으로 스르륵 쓰러지더니 곧 바닥이 피로 흥건해졌다.
킬리안의 검을 본 사우스 왕국 군사들이 긴장한 낯빛으로 바뀌었다.
“평범한 도적들이 아니다……!”
“뭐야, 방금… 어떻게 한 거야?”
“제길. 이스트 왕국은 뭐 이따위인 거냐 대체…….”
그들의 앞에 선 킬리안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가 오늘 기분이 아주 드러워. 왜 인줄 아나?”
“……?”
“내가 태어난 곳이 이스트 왕국이거든. 나름 연 끊고 살긴 했는데 그게 또 내가 태어난 땅이 딴 놈들한테 짓밟혔다고 하니까 기분이 상당히 드럽더라고?”
킬리안이 진득한 살기를 드러내며 눈앞의 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킬리안의 수하들도 살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차피 너희는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할 거다.”
킬리안의 명령에 수하들이 뛰쳐나갔다.
괴성을 질러대는 그들의 돌격에 사우스 왕국 군사들도 응전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그들의 뒤에는 언제 쫓아올지 모르는 이스트 왕국 군사들이 있었다.
그러니만큼 마음이 급해진 사우스 왕국 군사들은 본래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해보지도 못했다.
물론 그들이 실력 발휘를 제대로 했다 하더라도 킬리안과 그의 수하들은 이기지 못했을 터다.
실제로 사우스 왕국 군사들은 킬리안과 그의 수하들을 상대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우리가 이렇게 형편없이 깨지다니…….”
“뭘 말이 안 돼? 너희랑 우리랑은 살아온 환경이 달라 임마.”
장난스럽게 웃던 청년이 기사의 목을 그대로 그어버렸다.
살아남은 사우스 왕국 군사들은 지금 이 상황이 쉽게 납득이 되질 않았다.
그들은 팔다리가 포박된 채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킬리안이 그들을 살펴보다 나직하게 말했다.
“모두 죽여 그냥. 꼴 보기가 싫다.”
“네이!”
“알겠숨다!”
킬리안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수하들이 움직였다.
살려달라는 비명소리가 계속 울려 퍼졌지만 킬리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있는 곳으로 수하들이 달려왔다.
“이게 얼마 만에 떨어진 자유령인데, 그냥 이렇게만 있을 겁니까?”
“사우스 왕국군 한정이잖냐.”
“그러니까 한탕 챙겨야죠!”
“크흐흐. 그건 또 맞아. 챙길 건 다 챙겨라.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나머지 녀석들한테도 전해. 이스트 왕국 사람들은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
“키야, 대장 나라 사람들이라고 챙기는 겁니까?”
“뭔 개소리야. 건드리면 우리가 죽어. 주인의 엄명이다.”
“아이고… 그럼 또 건드렸다간 큰일 나겠네.”
킬리안의 말에 수하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벨제부트의 주인인 아시테르도 공포였지만 그 형을 집행하는 카이드는 그야말로 사신이나 다름없다.
거기다 카이드 밑에 있는 지파장들도 아시테르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따랐다.
덕분에 벨제부트가 좀 살만한 장소로 바뀌긴 했지만 옛날을 못 잊은 이들도 많다.
“그런 면에서 지금 녀석들의 욕망도 꽤 해소되고 있겠는 걸.”
킬리안은 그나마 이스트 왕국에서 기사로 있던 인물이었다.
모함을 당해 파면당하고 쫓기는 신세가 되긴 했지만 그는 나름대로의 기사도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녀석들은 아니다.
벨제부트만큼 거친 녀석들이 살아가는 곳은 없다.
지금까지는 카이드와 지파장들의 공포 정치로 유지되었지만 녀석들의 불만은 당연히 어떤 식으로든 샐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일시적으로나마 약탈이나 모든 행동들이 허용되었다.
사우스 왕국군 한정이라는 꼬리표가 붙긴 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녀석들은 대상은 신경쓰지 않는다.
그저 그 행위를 즐기는 녀석들이 더 많은 것이다.
“뭐, 상관없겠지. 그나저나… 사우스 왕국놈들도 지금은 지옥이겠는 걸.”
킬리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벨제부트의 험악하고도 집요한 놈들이 붙기 시작했으니, 자기 같았으면 차라리 이스트 왕국군에 쫓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킬리안은 수하들을 이끌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오 킬리안 여기 있었나!?”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란니발님, 오셨습니까.”
“어땠어? 수확이 좀 있었나?”
“보시다시피.”
킬리안이 뒤편의 수확물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에 란니발이 웃었다.
“잘 들어. 이건 경쟁이다. 알겠어? 다른 녀석들보다 무조건! 더 많은 것들을 쟁취해야 돼. 오케이!?”
“알겠습니다.”
킬리안이 이내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렇다.
지파장들은 역시나 이 상황을 단순히 즐길 거리로만 여기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곳이었으니 새삼 놀랍지도 않긴 하다.
하지만 어딘가 쓸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특히나 테이르한더네한테는 지면 안 된다! 알겠나!?”
“예!”
“예!”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일주일이 넘는 기간 동안 벨제부트 사람들은 사우스 왕국군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이것은 놀랍게도 이스트 왕국이 사우스 왕국을 쫓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상자를 만들어내었다.
벨제부트의 활약을 전해들은 카이드가 피식 웃었다.
“아유, 귀여운 녀석들.”
“야, 뭐가 귀엽냐? 그 자식들이…….”
“어허… 말투가 삐딱하다?”
“죄를 짓고 도망친 놈들 투성이잖아? 벨제부트엔.”
“그래서?”
“그래서는 뭐 그래서야. 나는 싫다 그딴 놈들.”
자비토의 말에 카이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찮아. 싫어해도 돼. 우리도 너 같은 샌님은 싫어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