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화 웨스트 왕국의 사자
이스트 왕국에 일어난 일은 사우스 왕국까지도 빠르게 전해졌다.
과거 사우스 왕국이 벌였던 일보다 훨씬 더 참혹한 막을 내렸다.
일주일 사이에 수 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었다.
그들 대부분은 사우스 왕국 군사들이었다.
사우스 왕국은 이 같은 일에 침통함을 금치 못했다.
거기다 트럼프 중 두 명이 이스트 왕국에 붙잡혀 있어 더더욱 상황은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사우스 왕국의 국왕 코모스 디오는 작금의 상황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난데 없이 시작된 노스 왕국과 웨스트 왕국이 자국을 견제하기 시작했고, 이스트 왕국에서는 폭도들이 들고 일어나 독립을 외치고 있었다.
이 사건 때문에 수많은 자국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왕이시여… 바이헤른과 하이트레이스는 왕국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들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의 목숨만은 구해야 합니다.”
“누가 그걸 모르느냐. 안 그래도 웨스트 왕국 놈들이 국경에 있어 신경 쓰여 죽겠는데, 트럼프라는 작자들이 이런 시국에 적들의 손에 붙잡혀!? 과거 트럼프들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코모스 디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때일수록 롤스로체카와 제이스쿠스의 빈자리가 아쉬웠다.
그나마 제이스쿠스는 부상을 딛고 잠시나마 복귀해 전선에 나가주었지만 롤스로체카는 돌아올 수 없는 사내였다.
“쯧… 네이트워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나?”
“현재 웨스트 왕국 군사들과 대치중입니다.”
“전쟁은 벌어져선 안된다. 지금 대규모 전쟁마저 벌어진다면 우리 왕국은 더없이 힘들어질 거다.”
“예.”
코모스 디오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는 바였다.
쿵!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코모스 디오의 아들 파르하딘이 주먹을 내리쳤다.
“노스 왕국이 병신 같은 것들…! 지금 이런 때일수록 웨스트 왕국을 견제해야지 어째서 우리를 견제한단 말이냐……!”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노스 왕국이 갑자기 우리를 견제할 이유가…….”
“우리가 이스트 왕국을 점령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동안은 따로 견제할 필요가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질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 왕국과 노스 왕국의 국경이 맞닿게 되었으니까요.”
“물론 그것도 이제는 지난 일이 되어버렸지…….”
회의장의 분위기는 도저히 밝아지질 않았다.
코모스 디오는 이스트 왕국만 생각하면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끈질긴 이스트 왕국 놈들… 결국 마지막까지 속에 칼을 갈고 있었구나!”
“제가 그래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거기 있는 귀족 놈들을 모두 베어버려야 한다고.”
“그랬으면 이스트 왕국 전체가 들고 일어났을 겁니다. 왕자님.”
“쯧. 어차피 우리는 거기 땅에 있는 자원이 필요한 거잖아? 그깟 이스트 왕국 짐승들이 몇 명 죽는다고 누가 신경이나 쓸까.”
“닥쳐라 파르하딘. 경솔하구나.”
코모스 디오가 파르하딘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서운 얼굴인데 노기까지 띄고 있어 더더욱 살벌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파르하딘도 내심 불만이 많았지만 코모스 디오의 기분이 좋지 않아보였기에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덜컥!
그때 문이 열리고 안으로 누군가 들어섰다.
“왕이시여.”
그는 코모스 디오를 향해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무슨 일이냐.”
“웨스트 왕국에서 사자를 보내왔습니다.”
“흐음… 그래. 이쯤 되면 올 타이밍이라 생각했다. 저 심보 고약한 놈들이 이번엔 무슨 속셈인지 어디 한 번 들어나보자꾸나.”
코모스 디오의 허락이 떨어지자 웨스트 왕국의 사자가 안으로 입장했다.
이곳으로 들어온 사내는 부리부리한 눈매의 중년인이었다.
굳게 다문 입술 위로 강인한 눈빛은 주변을 한 번 쑥 훑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의 태도에 사우스 왕국 귀족들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나 몇몇 이들은 저 중년인을 알아보고 이내 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저, 저저… 저자는…….”
“아니 저자가 어째서 이곳까지…….”
“말도 안 돼! 저 사내는 사자로 올만한 자가 아니질 않소?”
귀족들의 놀라는 목소리가 여기저기 울려퍼졌다.
그러건 말건 중년인은 국왕인 코모스 디오의 앞에 섰다.
“국왕님을 뵙습니다.”
중년인이 국왕을 향해 예를 차렸다.
절도 있으면서도 힘있는 움직임에 코모스 디오도 눈앞에 있는 사내가 결코 예사 인물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대가 누군지 물어보고 싶군.”
“저는 그저 국왕 폐하의 뜻을 전하러 온 사자일 뿐입니다.”
“그러지말고 그대의 이름을 내게 말하라.”
코모스 디오의 말에 중년인, 르노어가 고개를 들었다.
“필부의 이름은 르노어라고 합니다.”
르노어라는 이름에 이제껏 눈치채지 못했던 귀족들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웨스트 왕국의 거대한 기둥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오다니!
귀족들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질만한 사건이었다.
르노어야 말로 웨스트 왕국 국왕인 헤렌달의 진정한 검이라 불리는 사내였다.
그가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헤렌달이 전하려는 뜻이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라는 얘기이기도 했다.
“르노어라… 명성이 자자한 웨스트 왕국의 진정한 검을 이곳에서 보게 되다니, 영광이로군.”
르노어라는 이름을 듣고 보니 눈앞의 사내가 잘 벼려진 검과 같아 보였다.
조금만 잘못 건드리면 살갗이 베여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르노어가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이제 그 칭호는 제게 걸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그대의 명성이 대륙 전체에 퍼져 있는데 누가 그것을 대신한다는 말인가?”
“제 위에 또 한 명의 주군이 있습니다.”
르노어의 말이 코모스 디오와 귀족들에게 묵직함을 안겨주었다.
그들도 이미 소식을 전해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천하의 로얄나이츠를 통솔하는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을……!
로얄나이츠의 힘이 한데 모이고 웨스트 왕국의 걱정거리였던 첼룬 왕국마저 그들과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
마녀숲에서 이들을 견제하기에도 이제는 벅찬 수준이었다.
새로운 검제가 마녀숲을 건드리지 않는 한 마녀여왕도 또다시 자신의 수명을 깎아내면서까지 그를 죽이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웨스트 왕국을 제대로 견제하려면 노스 왕국과 사우스 왕국, 마녀숲이 다시 한 번 뭉쳐야만 했다.
허나 이제와 그것을 실행하기엔 때가 너무나 늦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군… 그래서, 지금은 누구의 뜻을 전하러 온 것인가? 단순히 검제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이렇게 찾아오진 않았을 텐데.”
“국왕 폐하와 검제님의 뜻을 전하러 왔습니다.”
“흐음… 얘기해보게.”
“현재 우리 대륙은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대륙이 위험에 빠져 있다?”
코모스 디오가 한쪽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반면 르노어는 엄청난 말을 내뱉어 놓고도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지금은 모든 전쟁을 멈추고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군. 대륙이 위험하다는 뜻은 뭐고 힘을 합쳐야 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마녀숲 어딘가에 어비스 던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르노어의 입에서 던전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자 몇몇 귀족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반면 다른 귀족들은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짓기도 했다.
“고작 던전 때문에?”
“후후… 웨스트 왕국의 힘이 생각보다 약한 것 아닙니까? 겨우 던전 때문에 다른 왕국에 도움을 요청하고.”
“헛소리. 단순한 던전이라면 저 최강의 검사가 이곳까지 찾아왔겠나.”
“그도 그렇지. 좀 더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동안 안으로 아일리시와 제이스쿠스가 들어왔다.
르노어를 확인한 제이스쿠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정말로 왔군…….”
“오랜만이로구만. 제이스쿠스.”
“당신이랑은 그다지 웃는 얼굴 맞대고 얘기하고 싶진 않은데 말이야.”
르노어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제이스쿠스는 오랜 상처가 욱씬거리는 느낌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네.”
“당연한 말을.”
“그리고… 자넨 우리 검제님과도 지독한 악연으로 얽혀 있더구먼.”
“검제?”
제이스쿠스의 반응에 르노어도 조금은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아직 모르고 있는가? 검제님이 누구신지.”
“네놈들의 검제 따위 관심 없다.”
“관심을 두어야 할 걸세. 검제님의 명령에 따라서 우리 로얄나이츠는 전원이 움직일 수도 있으니까.”
르노어가 한층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진심이 담겨 있는 차분하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당신들의 국왕이 허락할 것 같은가?”
“뭘 모르는군. 검제님의 곁에는 린 공주님이 계시네. 그분의 얘기라면 국왕 폐하께서도 한 수 접어주신단 말일세.”
“…그 말은 검제란 자와 린 공주가?”
“연인 사이일세. 혼인도 치르실테지.”
르노어의 말을 다른 귀족들도 꽤나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검제의 정체에 대해서는 워낙 비밀에 부쳐져 있어 알아내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런데 르노어의 입에서 검제에 대한 말이 나오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문득 이상함을 느낀 제이스쿠스가 인상을 구겼다.
“그런데 검제란 자가 우리 왕국을 노릴 이유가 있나?”
“있지. 그것도 아주 차고 넘치네.”
“흐음, 이상하군. 우리는 웨스트 왕국과 이렇다 할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웨스트 왕국 사람이 아니다. 검제님께선.”
“……?”
“이스트 왕국에서 왔고, 검제님의 어머니께선 이곳 사우스 왕국에서 죽음을 맞이하셨지.”
르노어의 말에 제이스쿠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이어 몇몇 귀족들도 기함을 토하고 말았다.
너무 놀라 호흡이 가빠진 이들도 있었다.
“설마… 검제라는 자가 아시테르라는 이름을 쓰고 있나?”
르노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답에 코모스 디오도 놀라고 말았다.
“마녀의 아들이 살아 있었나…….”
“이런 제길! 그럼 무조건 우리 왕국으로 쳐들어오겠다는 말이 아닌가!”
“맞아! 그 자가 참을 리가 없잖나!”
“우리 왕국에 선전포고를 하러 온 것인가!?”
“아아아… 그 자가 살아 있었다니…….”
귀족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아일리시도 덩달아 굳은 표정이 되었다.
제이스쿠스가 그녀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너도 알고 있었나? 아일리시.”
“네.”
“지난 번 회군과 관련이 있겠군.”
아일리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추려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
제이스쿠스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었나…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셈이지? 정말로 웨스트 왕국은 우리 왕국과 전쟁을 펼칠 생각인가?”
“자네는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듣지 못했지. 그게 아닐세. 우리는 사우스 왕국에 도움을 요청하러 온 걸세.”
“천하의 웨스트 왕국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우리 힘만으로는 막아낼 수 없을 걸세.”
르노어의 표정을 읽은 코모스 디오가 입을 열었다.
“그 어비스 던전이라는 곳이 그렇게나 위험한 곳인가?”
“어비스 7던전 자체는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 검제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문이 굉장히 위험하다고 하더군요.”
“문?”
“예. 그동안 던전에서 튀어나왔던 마수들이 그 문을 통해 쏟아져 나올 거란 얘기였습니다.”
“그럼 단순한 던전 브레이크가 아닌가?”
르노어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내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검제께선 그 문은 마수들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