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화 회의
르노어가 돌아가고 사우스 왕국 회의장은 적막만이 감돌았다.
선뜻 믿기가 어려운 말이었다.
“제이스쿠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나?”
“르노어가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가볍게 말을 꺼낼 사람으로는 안 보이더군.”
“예. 아마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웨스트 왕국에서도 르노어를 보낸 것 같습니다.”
“신분과 자격으로 말의 무게를 실었다는 말인가…….”
코모스 디오와 제이스쿠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파르하딘이 인상을 구겼다.
“설마 저들의 말을 믿겠다는 말입니까?”
“단순히 가볍게 들을 만한 얘기는 아닌 것 같구나.”
“저는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겨우 던전 하나 때문에 우리 왕국에 도움을 요청한다구요? 웨스트 왕국 같은 강한 나라가? 오히려 이쪽의 전력을 빼내려는 속셈일 겁니다. 저희들의 전력을 뺀 다음에 바로 이곳을 치려 하는 거라고요.”
파르하딘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다 생각했는지 귀족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를 뒤집은 것은 아일리시였다.
“잘 생각해보세요. 이스트 왕국에 나타났던 마수들을 잊으셨나요? 놈들의 힘은 이스트 왕국의 마법기사단마저 몰살시킬 정도로 강해요. 그렇게나 강한 마수들이 몇이나 세상 밖으로 튀어나올지 모른다잖아요.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위험…….”
“으하하하하! 아일리시님! 놈들의 손에 붙잡히더니 세뇌라도 당한 겁니까? 일국의 대장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나약한 말을 내뱉어서야!”
파르하딘이 대놓고 아일리시에게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일리시는 그런 얄팍한 도발에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로 심각하게 고민해야 될 문제라 생각합니다.”
“아니지아니지… 이건 다른 쪽으로 고민을 해봐야 됩니다. 저들이 저 던전을 막으러 갔을 때? 그때가 바로 우리들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넓게 내다 보셔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사우스 왕국만 고립될지도 모릅니다. 지금 왕국의 상황도 좋지 않으니…….”
코모스 디오 또한 아일리시의 생각에 동의하는 듯 보였다.
이스트 왕국이 다시 일어났고 웨스트 왕국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
거기다 르노어의 어조는 차분했지만,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는 얘기이기도 했다.
코모스 디오의 수심이 깊어지는 동안 웨스트 왕국 측에선 검제를 맞이하고 있었다.
르노어가 아시테르를 보며 웃었다.
“오셨습니까.”
“직접 사우스 왕국에 다녀오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위험하게 왜 그러셨습니까.”
“후후후. 제 걱정을 해주시는 겁니까?”
르노어의 부드러운 미소에 아시테르가 순간 멋쩍게 웃었다.
르노어가 어디 가서 쉽게 당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건 아시테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우스 왕국 왕실은 언제 어디서 함정을 팔지 모르는 작자들이었다.
제 아무리 르노어라고 해도 100퍼센트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었다.
르노어가 자세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이런 일에 모두 검제님께서 나서실 필요는 없습니다. 더욱이 검제님은 우리 왕국의 국격을 드높이는 존재. 검제님께서 사우스 왕국에 다녀가셨다면 저희들이 국왕 폐하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아…….”
“그리고 사우스 왕국은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우리 왕국을 위협하던 첼룬 왕국이 이제는 국교를 맺고 친구가 된 사이고, 마녀숲도 이전만큼 우리 왕국을 강하게 경계하고 있지 않습니다. 거기다 노스 왕국의 차기 국왕도 검제님과 돈독한 사이이니, 우리 왕국은 더 이상 거리낄게 없는 상황이니까요.”
르노어의 말에 다른 로얄나이츠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웨스트 왕국의 로얄나이츠가 한곳에 뭉칠 수 있게 되었다.
각자 따로 놀던 로얄나이츠가 이렇게 뜻을 모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들은 이제야말로 웨스트 왕국이 가장 최강이라는 말에 걸맞은 국가라 생각했다.
“저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말을 듣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후후. 맡겨만 주십시오. 군사들을 이끌고 가장 선두에 서서 적들의 목을 날리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우스 왕국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습니다.”
“인류의 존망이 걸린 일 앞에 사익만 챙기려 한다면 단죄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사우스 왕국은 순순히 병력을 내놓지 않을 것입니다. 화근이 되기 전에 차라리 지금 싹을 잘라놓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안 됩니다! 검제님의 말씀대로라면 그 문을 통해 엄청나게 강한 마수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올 텐데,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니 최대한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해 봐야 합니다.”
로얄나이츠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그 속에서 아시테르는 홀로 고민에 휩싸였다.
그때 하야트의 시선이 언노운 마법기사단에게로 향했다.
“검제님의 친위대분들께서도 아낌없이 의견을 주십시오.”
“예…? 하지만 저희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아서요…….”
에스파가 사양하듯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하야트가 단호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소중한 의견이 될 겁니다.”
하야트의 말에 다른 로얄나이츠들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테르도 동의하는 바였다.
“너희들의 의견도 소중해. 그러니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해주었으면 좋겠어.”
아시테르가 언노운 마법기사단 전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언노운 마법기사단 전원의 시선이 에스파에게로 몰렸다.
그가 이 마법기사단의 부단장이기도 하니 먼저 의견을 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모두의 시선을 느낀 에스파가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서 사우스 왕국에 대한 이미지는 최악입니다. 우리 이스트 왕국과 오랫동안 전쟁이 끊이질 않았던 것부터 시작해서 놈들의 손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거든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놈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데… 우습게도 복수할 대상이 없습니다. 사우스 왕국은 그야말로 실체 없는 단어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사우스 왕국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복수를 가할 수도 없고, 단순히 명령을 받고 움직인 군사들에게 복수를 할 수도 없고…….”
말끝을 흐리던 에스파가 아시테르쪽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제9기사단과 아레나님을 죽인 그놈들에게만큼은 함께 복수해주고 싶었어.”
에스파의 말에 아시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 복수는 거의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사우스 왕국의 많은 이들이 똑같이 피를 흘렸다.
잠시 말을 끊었던 에스파가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사우스 왕국에 대한 이미지는 여전히 최악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못 믿을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큰일 앞에 사소한 감정들을 내세울 만큼 이제는 어리지도 않고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부단장. 질질 끌지 말고 빨리 얘기해. 전쟁이야? 아니면 대화야?”
카이드가 코를 후비며 말에 끼어들었다.
라빈이 대신 속이 시원하다며 엄지를 척 올려들었다.
피식 웃은 에스파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래서 결론은! 저는 전쟁은 반대입니다. 대화로 해결하는 것, 그게 우리 단장의 스타일이기도 하고요.”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사우스 왕국 놈들 하는 짓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함께 싸워야 할 동료가 될지 모르는데 전쟁으로 감정부터 상하고 싶진 않아요.”
“전쟁 후에 과연 동료가 되어 전쟁을 치를 수 있을까요?”
“뭐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그냥 쓸어버리고 복종하라 하면 되잖아? 아냐?”
카이드가 인상을 와락 구기며 말했다.
이를 본 에스파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다행이다.”
“뭐가!?”
“내가 부단장이라서.”
“앙!?”
두 사람이 투닥거릴 조짐이 보이자 아시테르가 끼어들었다.
“좋아 모두의 의견은 잘 들어보았어. 나 또한 사우스 왕국과는 대화로 가장 먼저 풀어보려 해. 이제 이스트 왕국도 독립에 성공했고 우리 병력도 사우스 왕국 국경까지 와있으니, 저들도 대화를 마냥 거부하진 못할 거다.”
“이미 대화를 하겠다는 뜻은 전해왔습니다 검제님.”
르노어가 아시테르에게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말했다.
“다행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준비해보겠습니다.”
아시테르가 로얄나이츠와 언노운 기사단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린은 한발 물러서서 조용히 아시테르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이 회의에 적극적으로 끼어들어 의견을 내거나 하진 않았다.
그보단 조용히 회의의 내용을 들으며 지켜보는 것을 택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계속해서 이어지던 대화가 서서히 마무리 되어갔다.
로얄나이츠도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고 언노운 마법기사단원들도 이만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렇게 이곳에 남은 것은 아시테르와 린 둘 뿐이었다.
아시테르가 린을 돌아보며 물었다.
“피곤하진 않아?”
“내가 피곤할 게 뭐 있어. 피곤해도 당신이 더 피곤하지.”
“아냐. 나는 괜찮아.”
“그보다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야?”
“그래 보여?”
“응.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조급해보여.”
“요즘 꿈을 자주 꿔.”
꿈이라는 말에 린이 살포시 아시테르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녀가 아시테르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슨 꿈을 꾸는데?”
“아버지가… 처참한 몰골로 죽어 있는 꿈… 그리고 그 위에는 마수들이 있어…….”
“아…….”
“그것 때문에 불안함을 느끼는지도 모르겠어.”
린이 그의 손을 계속 어루만져주었다.
아시테르가 저런 표정을 보이는 것도 안쓰러운 마음이었다.
“괜찮아. 유미르님은 분명 무사할 거야. 누구보다 강한 분이라는 것 잘 알고 있잖아?”
“맞아. 아버지는 누구보다 강인하고 대단한 분이시지.”
“꿈은 그냥 꿈일 뿐이야.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래. 그렇게 생각해봐야지.”
그래도 조급한 마음은 쉽게 떨어져나가질 않았다.
아버지인 유미르도 유미르였지만, 곧 비체의 생명력도 모두 소모될 시간이었다.
비체가 쓰러지면 아포칼립스의 문도 서서히 열리기 시작할 터다.
그러기 전에 서둘러 인류의 모든 힘을 끌어 모아야만 한다.
아포칼립스의 문을 통해 세상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마수들을 모두 막아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오랫동안 인류는 전쟁으로 몸살을 앓거나, 패할 경우 마수들의 지배를 받아야만 할지 모른다.
“내 후세에 그런 세상을 물려줄 순 없어.”
조용히 혼잣말을 읊조린 아시테르가 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린이 아시테르를 안아주었다.
따뜻한 그녀의 온기가 전신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시테르도 팔을 들어 린을 안았다.
이렇게 그녀의 끌어안고 있으면 마음이 포근해진다.
그토록 자신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감정들이 한층 사그라드는 편안한 느낌.
그때 린이 아시테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더욱 강하게 안았다.
“잘 해낼 거야. 그리고 잘 해내고 있어.”
린의 손길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의 무언가가 크게 동요한 것인지 순간 아시테르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아포칼립스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마수들이 튀어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꼭 지켜낼게.”
“그 옆에 나도 있을 거니까 혼자 다 짊어지려 하지는 마.”
“응.”
“우리 같이 이겨내 보자.”
“고마워. 이렇게 같이 있어줘서.”
아시테르가 린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린이 다시 아시테르의 목을 감아 입술을 포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