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던전에서 왔습니다 (1)
아시테르는 이른 아침부터 나갈 준비를 했다.
그의 곁에는 린이 함께였다.
“오늘이지?”
“응.”
“가서 잘 얘기하고 와.”
“같이 가는 것 아니었어?”
“그러고 싶지만 나는 수도로 돌아가봐야 할 것 같아.”
린의 말에 아시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린이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긴 했다.
“그래. 이곳엔 르노어님이나 다른 사람들도 있으니까. 나는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당신 걱정을 왜 해? 분명 잘 얘기할 텐데.”
린이 아시테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두 사람은 아침부터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
한참을 키스하던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이어 두 손을 맞잡은 아시테르와 린이 밖으로 나섰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로얄나이츠와 기사들이 아시테르에게 예를 차렸다.
“오셨습니까.”
“바로 가도록 할까요.”
“예. 말을 준비해놨습니다.”
“공주님이 타고가실 마차도 따로 준비해 놨습니다.”
르노어가 아시테르를 안내하고 하야트가 린을 안내해주었다.
린과 아시테르는 떠나기 전까지도 서로를 바라보며 애틋한 눈인사를 나누었다.
린이 먼저 떠나는 것을 본 후에야 아시테르도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의 눈빛은 사랑을 나누고 있는 남자의 눈이 아닌 군주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시테르를 선두로 웨스트 왕국의 군사들이 움직였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사우스 왕국과 웨스트 왕국이 맞닿아 있는 중립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사우스 왕국 국왕과 아시테르가 만나기로 한 것이다.
“이번 일에 사우스 왕국 국왕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
“맞습니다. 제이스쿠스가 나올 줄 알았는데…….”
“후후. 제이스쿠스는 대화의 상대로 좋은 격은 아니지. 검제님과 좋은 인연으로 얽힌 이는 아니니까.”
“그렇다고 차기 국왕인 파르하딘을 내보내기엔 너무나 경험이 적고.”
“차라리 사우스 왕국 국왕이 나와 주는 게 이쪽으로서도 좋을 거다.”
하야트의 말에 다른 로얄나이츠들이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코모스 디오는 야망이 있으면서도 이성적 판단을 유지하려 애쓰는 인물이었다.
이스트 왕국과 전쟁을 펼칠 때에도 사우스 왕국이 불리하거나 손해가 많다면 과감하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시테르의 어머니인 아레나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이스트 왕국에 별다른 보복을 가하지 않은 것도 결국 그런 차원에서 판단한 일이었다.
코모스 디오는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이스트 왕국에 떠넘기는 것이 아닌 자국이 책임지고 보상해주는 방식을 택했다.
덕분에 사우스 왕국뿐 아니라 이스트 왕국의 민심까지 챙길 수 있었다.
이외에도 그는 이스트 왕국과 사우스 왕국 사이를 완만하게 조율하며 두 곳을 한 번에 이끄는 놀라운 리더십을 보였다.
그러니만큼 코모스 디오가 나와 준다면 아시테르와 긍정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아시테르가 중립지역에 도착하고, 맞은편에서도 왕의 행렬이 보였다.
아시테르가 먼저 말에서 내렸다.
본인은 한 나라의 기사였지만, 눈앞에 있는 이는 일국의 왕이었다.
일부러 저자세를 취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일국의 왕이니만큼 예는 차려주어야 했다.
헌데 사우스 왕국의 왕, 코모스 디오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말에 탄 채로 아시테르를 내려다보았다.
“그대가 검제인가?”
“예. 그렇습니다.”
아시테르가 코모스 디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반갑구나. 내가 바로 사우스 왕국의 국왕이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코모스 디오가 아시테르를 찬찬히 살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젊은 친구였다.
거기다 예상외로 평범한 모습이었다.
좀 더 험악하게 생겼거나 날카롭게 생긴, 그런 인상을 생각했었다.
헌데 부드러운 인상의 사내가 서있으니 조금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했다.
코모스 디오의 태도를 보며 로얄나이츠들은 은근하게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코모스 디오가 분명 사우스 왕국의 국왕인 것은 맞지만, 이쪽도 웨스트 왕국의 검제였다.
“국왕님만큼이나 대단하고 존경받는 존재가 바로 검제님이신데…….”
거기다 이대로라면 아시테르는 차기 국왕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 아시테르를 앞에 두고 저런 태도라니.
코모스 디오도 그런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이만 말에서 내렸다.
어차피 첫인사에서 그가 원하는 바는 이루었다.
자신은 내려다보고 아시테르는 올려다보는 것.
그 장면을 연출한 것만 해도 시사하는 바는 크다.
“인사는 이쯤하고 자리해보도록 할까.”
“예.”
아시테르가 회의장 안으로 코모스 디오를 안내했다.
코모스 디오도 아시테르의 안내를 받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임시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의장의 내부는 심플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커다란 원탁을 두고 아시테르와 코모스 디오가 마주 앉았다.
코모스 디오가 주변을 살폈다.
아시테르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언노운 기사단이, 왼쪽으로는 로얄나이츠가 앉아 있었다.
코모스 디오의 양옆에는 트럼프와 공작가의 가주들이 앉았다.
“자아, 다른 얘기들은 집어넣고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우리 왕국의 훌륭한 인재들을 다시 돌려보내주었으면 좋겠군.”
“트럼프 두 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들뿐만 아니라 붙잡혀 있는 우리 왕국의 국민들 모두가 소중한 인재들이네. 부디 무사히 우리 왕국으로 보내주었으면 좋겠어.”
말을 이어가던 코모스 디오가 이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스트 왕국에 붙잡혀 있는 기사들의 얘기를 웨스트 왕국의 검제에게 하고 있는,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던 것이다.
“나참… 검제께선 굉장히 바쁘게 지내셨더군… 이스트 왕국의 일에도 그토록 긴밀하게 관여를 하고.”
“그야, 저 또한 이스트 왕국의 마법기사였으니까요.”
“흐음… 얘기는 대충 들었네만, 그대의 나라는 그대를 버린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자네도 웨스트 왕국으로 도망… 아니 향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시테르가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령 이스트 왕국이 저를 버렸다고 해도 저는 이스트 왕국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나참, 눈물겨운 충정이로군… 이스트 왕국의 왕실이 자네에게 그토록 잘해주었나?”
“아니요. 저는 이스트 왕국 자체를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그곳에서 보고 배운 경험 모든 것들이 소중하거든요.”
“그랬군.”
“붙잡힌 사람들은 모두 무사히 사우스 왕국에 보내질 겁니다. 이스트 왕국 또한 그들의 목숨을 모두 취할 생각은 없을 테니까요.”
아시테르의 말에 코모스 디오가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자신이 무어라 해도 사실은 아시테르 쪽이 대화의 우위에 있었다.
그가 가진 패가 너무나도 많았던 것이다.
‘어쩌면 나의 행동이 알량한 자존심을 챙기려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군…….’
상대는 자신의 최소한의 위신을 지켜주려 한 걸지도 모른다.
허허로운 웃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아시테르는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철저히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배려하고 있던 것이다.
“고맙군… 그렇다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사우스 왕국도 이번 전쟁에 도움을 주었으면 합니다.”
“그때 말했던 그것 말인가?”
“예.”
“하지만 쉽게 이해할 수가 없군. 웨스트 왕국쯤 되는 강국이 던전 브레이크 하나 못 막는단 말인가?”
“웨스트 왕국의 힘만으로는 막아내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래. 정확히는 ‘모른다’지. 그 말은 결국 던전 안에서 얼마나 많은 마수들이 쏟아져나올지 모른다는 얘기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우리 왕국의 군사들을 어떻게 믿고 보내주지?”
코모스 디오가 낮은 어조로 말했다.
아시테르도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이스트 왕국을 습격했던 마수를 기억하십니까?”
“수도에 나타났다는 그 괴물 말인가?”
“예.”
“기억하지. 그 마수를 죽이는 과정에서 테르세우스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전사했던 것도…….”
“맞습니다. 그런 괴물들이 얼마나 더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그 녀석보다 더욱 강한 마수들도 존재한다는 겁니다.”
“더욱 강한 마수가 존재한다……?”
“예. 어비스 던전에서 놈들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세상은 파멸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시테르의 말에 코모스 디오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세상에 출현했던 마수도 엄청난 괴물이었던 것으로 들었다.
그런 괴물이 사우스 왕국이 아닌 이스트 왕국에 나타났다는 것이 천운이라 생각했던 나날도 있었다.
“그런 마수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라…….”
“판단에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지만, 이미 노스 왕국과 이스트 왕국도 함께 싸워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노스 왕국과 이스트 왕국이?”
코모스 디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이스트 왕국은 그렇다 쳐도 노스 왕국의 파쿠황까지 움직여줄 줄은 몰랐다.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마녀숲도 함께일 겁니다.”
“…? 그대는…….”
갑자기 입을 연 세아츠리스를 코모스 디오가 쳐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의 존재가 은근하게 신경 쓰이던 차였다.
이곳으로 오기 들어오기 전 제이스쿠스가 이곳에 마녀가 있다는 말을 했는데 그게 아마 저 여인인 듯싶었다.
“마녀숲도 함께일 거라니… 확신할 수 있는 말인가?”
“물론이에요.”
“그대가 어떻게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거지? 마녀여왕의 뜻은…….”
“여기 있는 세아츠리스는 마녀숲의 콰트로입니다.”
“콰트로라……?”
코모스 디오도 콰트로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었다.
그의 시선이 세아츠리스에게 머물렀다.
“정말 콰트로인가?”
“맞아요.”
“마녀여왕은 뭐라고 하던가?”
“여왕님 또한 이상 기류를 읽고 있으셨어요. 그 때문에 예정보다 훨씬 더 빠르게 잠에서 깨셨습니다.”
“흐음…….”
“이미 여왕님과 여기 있는 검제님의 만남은 준비되고 있습니다. 만약 여기서 사우스 왕국이 물러난다면, 이 대륙에서는 유일하게 사우스 왕국만 참전하지 않는 셈이 되겠군요.”
세아츠리스가 넌지시 던지듯 말했다.
제이스쿠스나 다른 트럼프들이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그 말은 즉 대륙의 주적으로 몰릴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혹시 발도르 왕국을 아십니까?”
그때 아시테르가 코모스 디오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에 코모스 디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발도르라면… 200년 전쯤 멸망한 국가가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멸망한 국가의 얘기는 왜 꺼내는 거지?”
“그 어비스 던전이라는 곳이 바로 발도르 왕국이 대대로 지켜오던 던전이었습니다.”
“마수들이 튀어나오는 던전을 지켰다는 건가?”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마수들이 튀어나올 수 있는 그 문을 오랫동안 봉인해왔던 겁니다.”
전혀 몰랐던 사실에 코모스 디오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때 곁에서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파르하딘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거지!?”
“…제가 바로 그 던전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사우스 왕국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충격 먹은 표정을 보였다.
어비스 던전에서 왔다니…….
코모스 디오가 다른 이들의 얼굴을 읽었다.
놀라는 이가 없는 것을 보니, 저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던전에서 왔다는 말이 사실인가?”
“예. 저는 어비스 던전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허어… 던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니…….”
코모스 디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