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화 진조의 뱀파이어
빛이 잘 들지 않는 어둑한 길을 계속해서 걸었다.
이카루스가 4층에서 이곳으로 통하는 문을 열 수 있다는 것은 나중에 안 정보였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카이드가 먼저 창에 손을 가져갔다.
“뭐야? 이 기분 나쁜 곳은…….”
주변으로 사이한 기운이 넘쳐났다.
흑마도사들이 사용하는 마력과 비슷한 느낌.
물론 마기를 사용하는 카이드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카이드가 느끼기에도 뭔가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그때 이곳으로 다가오는 강한 존재감에 카이드가 눈을 빛냈다.
“네가 불러내려는 존재가 바로 저거야?”
“응.”
아시테르도 이곳으로 다가오는 존재를 느꼈다.
허리선까지 늘어진 백금발에 새하얀 피부, 날카로운 눈매에 선명한 이목구비를 가진 여인이었다.
눈에 띄게 붉은 도톰한 입술이 움직였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나요?”
“저는 잘 지냈습니다. 이렇게 먼저 찾아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여인, 레큐니아가 공손한 태도로 아시테르를 맞이했다.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라 아시테르가 의아함을 드러내었다.
“그때처럼 말씀을 편하게 하셔도…….”
“그럴 순 없을 것 같네요.”
레큐니아는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과거 아시테르의 몸엔 마력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의 몸에 마치 신이 깃들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강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거기다 이 힘은 레큐니아로서도 감히 어떻게 해볼 수 있을 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때도 범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대체 어떤 수호신의 힘을 받으셨길래…….”
“창공의 신입니다.”
“아아…! 역시 그랬군요.”
레큐니아가 아시테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진조의 뱀파이어 플레이아스 레큐니아가 발도르 왕국의 왕을 뵙습니다.”
“네?”
“고대 신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예로부터 발도르 왕국의 왕족밖에는 없었습니다. 당신의 몸 안에 창공 신의 힘이 깃들어 있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당신은 발도르 왕국의 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발도르 왕국의 왕이라고요?”
멸망해버린 비체 할아버지의 왕국.
그곳의 왕이라 불리는 느낌은 아시테르에게 묘한 순간을 전해주었다.
레큐니아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곳에 찾아오신 것은 역시 제 도움이 필요해서겠죠?”
“네. 그리고 이렇게 뵈니 정말 잘 찾아왔다는 느낌이 드네요.”
아시테르는 주변에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들에 주목했다.
마도사나 투사들과는 또 다르다.
그렇다고 아시테르나 유미르처럼 영기를 다루는 이들도 아니었다.
“맞아요. 잘 찾아오셨습니다. 아시테르님이라면 저와 제 휘하 천 명의 뱀파이어들이 함께할 것입니다.”
레큐니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붉은 눈동자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곁으로 박쥐와 뱀도 몰려들었다.
“와… 이건 또 뭐람…….”
카이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나같이 창백해 보이는 인상들이었다.
꼭 어디 아픈 이들 같은데 외모는 또 수려한 이들로 가득했다.
“레큐니아님께서 말씀하신 종족의 은인이십니까.”
반백머리의 중년인이 이곳으로 다가와 물었다.
날카로운 인상에 연미복을 입은 그가 아시테르의 손을 붙잡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 이름은 쿨라드로게스입니다. 레큐니아님께서 따르는 분이라면 저 또한 따르겠습니다.”
“오랫동안 제 곁을 지켜온 수하입니다.”
레큐니아가 쿨라드로게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시테르가 쿨라드로게스를 살폈다.
레큐니아만큼은 아니지만 쿨라드로게스 또한 강인한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고맙습니다.”
“아아… 이리도 다정하실 수가… 실례지만 피를 한 방울만 빌려도 되겠습니까?”
“예? 네에… 그렇게 하시죠.”
아시테르가 허락하자마자 쿨라드로게스가 아시테르의 손등에 손톱을 그었다.
그러자 그의 붉은 핏방울이 올라왔다.
핏방울에 손을 가져간 쿨라드로게스가 주언을 외기 시작했다.
슈와아아아―――!!!
검붉은 날개가 순간 쿨라드로게스의 뒤편으로 뻗어 나왔다.
악마의 날개라기보다, 커다란 박쥐의 날개 같은 모습이었다.
“이로써 피의 종속은 맺어졌습니다.”
“피의 종속?”
“뱀파이어들의 충성의 맹세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제 쿨라드로게스를 통해서 얼마든지 제게 연락을 취할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렇군요.”
아시테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레큐니아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아, 이제 본격적인 얘기를 해볼까요. 제 도움이 필요할 정도면 평범한 일은 아닌가보죠?”
“네. 맞습니다.”
이카루스는 어느새 레큐니아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레큐니아가 그런 이카루스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발도르 왕국과 우리 뱀파이어는 혈맹 관계에요. 거기다 당신은 우리 일족의 은인이기도 하니 말씀만 하세요.”
“사실 함께 싸워줬으면 하는 상대가 있습니다.”
“인간인가요? 아니면 마녀인가요?”
마녀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는 레큐니아의 목소리에 은근한 살의가 담겨있었다.
뱀파이어들을 이곳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바로 마녀 올리비아였기 때문.
그러나 아시테르는 고개를 저었다.
“둘 다 아닙니다.”
“그럼 누구죠?”
“마수입니다.”
“마수라… 혹시 아포칼립스의 문이 열리기라도 했나요?”
“그걸 어떻게…….”
“일반적인 던전의 마수들이라면 굳이 저를 찾아오지도 않았겠죠. 발도르 왕국이 오래전부터 어비스 던전의 아포칼립스 문을 지켜왔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고요. 마침내 그 문의 봉인이 깨지려나 보군요.”
“사실… 비체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그 봉인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봉인도 오래 가진 못할 겁니다.”
아시테르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비체 할아버지를 떠올리니 착잡하기만 했다.
“그렇군요… 결국 비체님께서 그런 선택을 하셨군요. 그분답네요.”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말씀을. 다만 저희는 밤의 일족이자 인간들과 마녀들에겐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예요. 그렇기 때문에 정면에서 도와드릴 순 없을 것 같군요.”
“괜찮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힘을 빌려주시는 거라면…….”
“후후후. 말 그대로예요. 우리는 밤의 일족. 모든 역사는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죠. 그러니 어둠 아래 싸우겠습니다.”
레큐니아가 고혹적인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몽환적인 목소리에 저 고혹적인 미소까지…….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단번에 그녀에게 홀렸을 터다.
그때 무언가 생각난 듯 아시테르가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 골렘은 여전히 저곳에 있나요?”
“올리비아의 골렘 말인가요? 그렇죠. 우리는 저 흉물을 쳐다보는 것조차 싫어합니다.”
“그렇군요. 그렇지 않아도 그곳에 있던 고서가 생각났거든요.”
“당신은 그것을 읽지 못할 거예요. 그 고서에 적힌 것은 룬어라 불리는 마녀들의 고대어거든요.”
“마녀들의 고대어요?”
“대대로 마녀 여왕들만이 아는 글자에요. 아마 지금의 마녀여왕이 아니면…….”
“그런가요?”
아시테르가 반색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마녀여왕과 함께 떠오른 사람이 있기 때문.
“저 골렘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엄청난 전력이 될 겁니다. 하지만 저건 마녀들만이 다룰 수 있는 고대 병기에요.”
“네. 그래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시테르의 표정을 읽은 레큐니아가 피식 웃었다.
무언가 생각이 있는 모양인데 마녀들과는 다시 얽히기 싫어 굳이 묻진 않았다.
레큐니아와의 대화를 끝마치고 아시테르는 곧장 골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거대한 골렘이 주먹을 내지른 상태로 멈춰있다.
그러고 보니 과거 알렌시아와 함께 이 골렘을 상대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정말 죽는 줄만 알았는데…….”
그 어떤 마법도 통하지 않는 골렘이었다.
화염 마법을 사용하니 온몸에 화염을 두르고 공격해왔고, 알렌시아의 전격마법으로는 작은 흠집을 내는 게 고작이었다.
빛을 잃은 골렘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은 어딘가 장엄하기까지 했다.
카이드도 그런 골렘에 호기심이 들렸는지 창을 들고 가까이로 다가갔다.
“이건 대체 뭘까?”
“나도 잘 모르겠어. 수호 골렘이라고 부르긴 했는데.”
“수호 골렘?”
“이곳을 지키는 골렘 같았거든.”
“흐음… 근데 단순한 골렘이라 하기에는 뭔가 이상한데?”
“고대 병기라고 불리기도 했으니…….”
“그 정도로 강한가?”
“엄청 강하더라. 솔직히 이 골렘이 중간에 멈추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생을 마감할 뻔했어.”
통통.
카이드가 골렘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차가운 한기가 손가락을 통해 전해졌다.
“지금은? 지금도 이 골렘한테 질 것 같아?”
“글쎄. 그때와 나는 아주 다르니까. 내 검이 이 골렘을 벨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크흐흐. 내 창도 가능할 것 같은데. 한번 실험해보고 싶기도 하고.”
카이드가 창을 움켜쥐며 말했다.
그러나 아시테르가 곧바로 그를 말렸다.
“안 돼.”
“알아알아. 그냥 기분 나는 대로 해본 말이야. 이 골렘까지 데리고 전쟁을 치르려고 하는 거지?”
“맞아.”
“벌써부터 설레네.”
“뭐가 설레?”
“엄청나게 강한 마수들이 대거 튀어나온 다는 말 아니야. 그놈들을 쓰러트릴 생각에 신나.”
아시테르가 순간 멍한 표정으로 카이드를 바라보았다.
하기사 애초부터 카이드는 인류에 대한 별다른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보다는 자신이 강해지는 것에 더욱더 중점을 두는 편이었다.
아마 강해질 수 있다면 인간이든 마녀든 이용해먹을 녀석이었다.
“너는 그렇게 강해지려는 이유가 뭐야?”
“몰라. 그냥 본능적인 거라 생각해.”
“본능?”
“응. 태어나서 먹고 자고 싸고 하잖아? 나도 똑같아. 태어났기 때문에 강해지고 싶은 거야.”
“그랬구나……?”
나름대로 대답이 되었던 탓에 아시테르도 저도 모르게 납득하고 있었다.
카이드는 그냥 뭔가 그래보였다.
무언가를 위해서가 아닌, 그저 순수하게 강한 힘을 추구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는 대장은 왜 강해지려고 한 거지?”
“지키고 싶어서.”
“뭘?”
“소중한 많은 것들을.”
“쯧… 하여간 이해가 안 돼. 그런 건 다 대장이 강해지는데 걸림돌이 된다니까? 지금도 봐봐. 다른 녀석들 다 강해지라고 뒤치다꺼리 하다가 대장 성장만 멈췄잖아. 내가 봤을 때 더 강해질 수도 있겠구만.”
카이드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볼멘소리로 말했다.
아시테르도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됐고. 이제 가자.”
그때 봤던 고서를 챙겨든 아시테르가 이만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자 카이드가 뒤통수에 깍지를 끼며 입맛을 다셨다.
“저 돌덩어리는 안 가져가?”
“지금은 움직일 수 없어.”
“그래?”
“아마 세아츠리스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세아츠리스가? 그 마녀는 왜?”
“저 골렘을 다뤘던 올리비아도 마녀였다잖아. 차기 마녀여왕으로 꼽히는 세아츠리스라면 충분히 저 골렘을 움직일 수 있을 거야.”
“이야, 부럽네 그 여자. 대장한테 선물도 받고.”
“이게 선물인가?”
“그럼 선물이지. 이렇게 강한 무기를 쥐어주는데.”
카이드의 말에 아시테르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식으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오히려 세아츠리스에게 다른 숙제를 넘기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었다.
“아무튼 빨리빨리 움직이자. 이제 슬슬 그 여자도 이스트 왕국에 도착할 것 아냐.”
“아, 그렇겠네.”
그러고 보니 벌써 그럴 시간이 되었다.
4층까지 오는데 2일이 걸렸으니 나갈 때도 그 정도쯤 걸릴 테다.
그때면 사우스 왕국에서 출발한 마르체니도 수도에 도착할 기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