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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380화 (380/424)

380화 공주의 행렬

별로 길지도 않은 조촐한 행렬이었다.

아니 이것은 행렬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허름한 마차 하나와 수행인 3명.

그중 한 명은 마차를 몰았고 다른 한 명은 길을 안내했으며, 남은 한 명만이 온전히 마차 안의 주인을 섬기는 인물이었다.

“얼마 만에 이스트 왕국 땅을 밟는 걸까요?”

“그러게. 정말 오래 걸렸어…….”

“기분은 어떠세요?”

“좋아. 좋은데… 한편으로는 기분이 너무 이상해.”

눈가에 세월의 주름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 마르체니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토록 오고 싶어 했는데 막상 이곳으로 오니 두렵기만 하다.

이곳은 과연 자신의 조국 땅이라 말할 수 있을까.

과연 자신이 이곳으로 와도 되는 걸까.

오만가지의 생각들이 마르체니의 머릿속을 헝클어버렸다.

그래도 한 가지 그녀가 꼭 이곳에 와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게벨 아저씨…….”

오랜 세월동안 그녀를 보살펴준 유일한 보호자.

마르체니 그녀에겐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가 바로 게벨이었다.

그런 게벨의 죽음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조차 한때는 견디기 어려웠다.

스스로 목숨을 끊자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습게도 아시테르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도망치지 말고 삶에 맞서 싸우라는 것.

아시테르의 목소리가 늘 그런 말들을 전해왔다.

실제로 아시테르가 이런 말을 해줄지 모르겠지만, 그가 만약 자신을 봤다면 이런 말들을 해왔을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마르체니는 괴로움 속에서도 악착같이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사우스 왕국에서 감옥과도 같은 생활을 이어갔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어왔다.

그렇게 어떻게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르고 있을 때, 마침내 사우스 왕국 왕성에서 말을 전해왔다.

이스트 왕국으로 갈 수 있다는 소식이었다.

남편은 이미 마르체니에게서 관심을 거둔지 오래였다.

처음부터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결혼을 한 사이이니 이렇다 할 정도 들이지 않았다.

마르체니 또한 그게 편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마르체니 본인이 남편의 모든 것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나 싶지만 그럼에도 후회는 없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10년을 사느니 사랑하는 사람과 단 열흘이라도 함께 보내고 싶다는 게 마르체니의 평소 생각이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지나가는데, 익숙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스트 왕국에서만 자라는 나무들이네요.”

울창하게 뻗은 나무를 보며 마르체니는 괜히 기분이 상기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이내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조금이라도 들뜨면 게벨이나 제 9기사단의 사람들이 몰려와 자신을 꾸짖을 것 같았다.

마르체니의 얼굴을 살핀 시녀, 모르핀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처럼 돌아온 고향땅이잖아요. 조금 더 좋아하는 내색을 보이셔도 되요. 어차피 여기는 우리밖에 없잖아요 아가씨.”

“그건 그런데…….”

그럼에도 기분이 내키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반가움과 슬픔, 즐거움과 어색함이 공존하는 가운데 마르체니가 탄 마차는 속절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그때 마차를 몰고 있던 말들이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워워!”

마부가 손으로 말들을 달래주며 진정시켰다.

모르핀이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무슨 일 있나요?”

“어, 그게… 앞에 기사들이 보입니다.”

“기사들이요? 어딘가로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가보네요. 지금 이스트 왕국도 한창 바쁠 시기니까요.”

모르핀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르체니도 일국의 공주였다.

아무리 밉보였다고 해도 사우스 왕국은 마르체니 공주를 너무나 푸대접했다.

마르체니 말로는 괴롭히거나 천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라 했지만 그래도 모르핀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덕분에 이번 행렬도 조촐하기 짝이 없다.

아니, 애초에 이것을 행렬이라 말할 수 있을까.

심지어 이스트 왕국 쪽에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사우스 왕국이 마르체니 공주를 보내기로 했다면 당연히 이스트 왕국 측에도 알렸을진데, 이스트 왕국에선 그 누구도 보내주지 않았다.

“진짜 사람들 참 너무하다니까. 이 마차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고, 그렇다고 편안하게 갈 수 있도록 돈을 넉넉하게 쥐어준 것도 아니고……!”

“나는 괜찮아 모르핀. 그것보다 무사히 이곳으로 온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해.”

“아휴 참…….”

모르핀은 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 있는 마르체니를 바라볼 때면 정말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어쩌겠는가.

자신이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일은 고작 수발을 더욱 지극정성으로 드는 것밖엔 없었다.

그 와중에도 마르체니는 남편에게서 받는 조그마한 돈도 어려운 난민들에게 나눔을 하니…….

“속이 없어도 너무 속이 없으시다니까!”

답답함에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이 순간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이에 마르체니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묻는 눈치였다.

이에 모르핀이 황급히 손을 입에 가져가는 시늉을 했다.

“아니 그게…….”

“혹시 나한테 한 말이야?”

“예? 아니 그게 아니라요…….”

“하긴, 그렇게 말해도 할 말 없긴 하네…….”

그때 바깥에서 다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어, 공주님?”

“무슨 일인가요? 혹시 쉬었다가 가려는 건가요?”

“아뇨 그게 아니라… 기사님들이 지금 저희들의 앞에 멈춰섰습니다.”

“기사들이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놀란 마르체니가 마차 바깥으로 허겁지겁 나왔다.

혹시나 그들에게 오해를 샀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에도 마차에 박힌 문양 때문에 사우스 왕국 사람으로 오인 받은 적이 몇 번 있다.

“제가 해결할게요.”

마르체니가 품안에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오래된 배지를 꺼냈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실례합니다. 혹시 마르체니 공주님 되십니까?”

“네? 그걸 어떻게…….”

“이미 출발하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해서 부랴부랴 달려왔습니다.”

“아…….”

“저희들이 이제부터 공주님을 모시겠습니다.”

“저를요?”

마르체니가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스트 왕국의 기사들이 자신을 왜 온 것일까.

그러다 문득 이것이 호의가 아닌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아니요… 저는 괜찮을 것 같아요. 혼자 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만 그럴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역시나 싶은 마음에 마르체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기사의 다음 말은 마르체니의 예상을 빗나간 말이었다.

“제 주군께서 마르체니 공주님을 아주 극진히 모셔오라는 명령을 전했습니다.”

“그게 누군데요?”

“가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기사가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그리곤 뒤편에 있는 다른 마차를 가리켰다.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준비한 마차로 움직이겠습니까?”

“네? 그러기엔…….”

“마르체니 공주님을 위해 일부러 마련한 마차입니다. 이 낡은 것보다 훨씬 더 편하고 좋을 겁니다.”

마르체니는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쉽게 감이 잡히질 않았던 것이다.

그때 모르핀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망설일 게 뭐 있어요, 공주님! 이스트 왕국에서 공주님을 모셔오려고 기사님들을 보내주었나봐요!”

“아…….”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떠올렸지만 현실일 리 없다 스스로 부정하던 말이었다.

그러나 기사는 그것을 다시 한 번 더 부정하려는 듯 마르체니를 마차로 안내했다.

그들이 마련해준 마차는 사우스 왕국에서 준 마차와 비교하기조차 미안할 정도로 고급이었다.

안에 의자는 편안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이었고 등받이도 전처럼 딱딱한 것이 아닌 폭신함이 있었다.

거기다 탁자 위에 좋은 향으로 가득한 꽃이 놓아져 있었고 출출할 때 먹을 수 있는 간식도 준비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사우스 왕국의 마차보다 훨씬 더 넓어 움직이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기사들은 마르체니를 배려해 마차 안에 모르핀과 마르체니 두 사람만 탈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곤 마차를 중심으로 기사들이 말을 타고 행렬을 만들어주었다.

대도시를 지나갈 때도 선두에 선 기사가 말했다.

“비키시오! 마르체니 공주님의 행렬이오!”

공주라는 말에 평민들과 천민들이 일단은 길부터 비켜섰다.

그러다 마르체니라는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마르체니 공주님? 설마… 사우스 왕국으로 보내졌던 그 마르체니 공주님이 돌아오신 건가?”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맞는 것 같은데? 마르체니 공주님이 돌아오신 것 같아!”

“사우스 왕국 가서 내내 고생만 하셨을 텐데… 이제야 돌아오셨구나…….”

“고생하긴 뭘 고생해? 가서 편안하게 살…….”

“암 것도 모르면 말이라도 씨부리지 말아라. 망한 왕국의 공주를 누가 좋아했겠나? 거기다 마르체니 공주님이 무슨 이유로 사우스 왕국에 갔는지 몰라?”

“콱 그냥!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내뱉어도 되는 줄 아네.”

행렬이 지나가는 동안 평민들과 천민들이 수많은 얘기들을 해댔다.

바깥으로 보이는 인파에 모르핀이 화들짝 놀랐다.

“살마들이 많이 보이는데요?”

“대도시를 지나가는 중이니까.”

“그래도 이건 너무 많은 것 아닌가요? 이 정도면 제가 봤을 때 이 사람들 모두 공주님을 보러 온 것 같아요.”

“그럴 리가… 오히려 내가 여길 지나가는 게 이곳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마르체니 공주 또한 이곳의 왕족이었다.

핏줄이 반만 섞여 있다 해도 왕족은 왕족.

그녀가 지나가는 만큼 근처의 평민들은 하던 일도 그만두고 예를 차려야 했다.

마르체니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평민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던 차였다.

그러나 모르핀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곳으로 모여든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밝았다.

개중에는 슬픈 표정을 보이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을 사용해 준 것인지 마차 안에서는 바깥의 사람들이 무어라 말하는지 들을 수 없었다.

“대체 우리들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걸까요.”

모르핀이 바깥의 사람들을 보며 홀로 중얼거렸다.

반면 마르체니는 차마 사람들을 마주할 용기가 나질 않아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준비된 따뜻한 차만 마셔댈 뿐이었다.

그런 마르체니의 속도 모르고 공주의 행렬이 지나간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르체니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도 자신들처럼 역사의 피해자였다.

상황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으며 모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로 흘러가는 듯 보였었다.

마르체니는 이스트 왕국을 위해 기꺼이 자신이 나서는 것을 택했다.

그녀가 떠나기 전까지도 사람들은 마르체니가 사우스 왕국으로 향하는 것을 슬퍼했다.

그녀는 여느 왕족답지 않게 평민들과 천민들을 가장 가까이서 챙긴 사람이었다.

거기다 소외된 이들까지도 마르체니는 외면하지 않았다.

그런 마르체니의 행동들 덕분에 여전히 그녀는 평민들과 천민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다.

그것을 증명하듯 마르체니 공주의 행렬이 길어질수록, 소문을 듣고 그녀를 보러 오는 인파도 많아졌다.

더욱 신기하고 대단했던 것은 그 많은 인파가 모였음에도 불구 마르체니의 행렬을 방해하진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저 먼발치서 공주의 귀환을 환영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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