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화 마르체니
수많은 인파를 지나 마르체니 공주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수도의 내성이었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지내온 만큼, 이곳이 그녀에게 가장 익숙한 곳이기도 했다.
그래도 누군가 꾸준히 관리를 해온 것인지 그녀가 지내던 곳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르체니님…….”
모르핀이 마르체니 공주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는 많은 감정들에 휩싸인 것인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바로 가봐야 할 곳이 있어.”
마르체니가 모르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망울이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모르핀도 마르체니가 말하는 곳이 어딘지 알 것 같았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때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르핀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마르체니님께서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대체 누가…….”
“괜찮아, 모르핀.”
마르체니는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수도 없이 그녀의 머릿속에 울렸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마침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아시테르…….”
“오랜만이네요 공주님.”
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했다.
아시테르는 세월에 익어가는 마르체니 공주의 얼굴을 살폈다.
그동안 마음 고생한 것을 대변하듯 그녀의 얼굴에 어울리지도 않는 그늘이 져 있었다.
이제는 싱그러움보다 완숙함을 보이는 마르체니의 미모를 보며 아시테르가 옅은 미소를 보였다.
“그동안 더 예뻐지셨네요?”
“거짓말 하지 마. 그럴 리가 없다는 건 내가 더 잘 아니까.”
“아니에요. 제가 가벼운 빈말로 이런 말을 던질 리 없다는 것도 잘 알고 계시지 않나요?”
그래 저 미소였다.
저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일까, 아시테르의 미소도 이전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지.”
“바로 게벨 대장과 다른 분들을 보러 가려는 거죠?”
“응. 오랫동안 찾아오지 못했으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고마워.”
아시테르와 마르체니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모르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히 눈앞에 있는 저 사내가 아시테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사우스 왕국에 있을 때 마르체니 공주가 입에 달고 다니던 이름이 바로 아시테르였다.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을 땐 마르체니도 오랫동안 방에만 틀어박혀 눈물을 흘렸었다.
그러다 아시테르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는 다행이라며 또 다른 눈물을 흘렸다.
마르체니는 아시테르를 두고 자신의 은인이라는 말을 했었다.
아시테르 덕분에 몇 번이고 목숨을 건졌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모르핀도 어느새 아시테르에게 호의적인 마음이 쌓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막상 아시테르를 보고 있으니, 마르체니 공주가 왜 그토록 아시테르를 언급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공주님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건 또 처음보네…….’
마르체니는 그동안 전혀 볼 수 없었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기다려온 만큼 모르핀은 두 사람이 만나자마자 수많은 얘기들을 나눌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외로 아시테르와 마르체니는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그보다는 뭐랄까,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아시테르가 마르체니의 곁을 지켜주는 느낌이었다.
안정을 느낀 마르체니의 얼굴이 한층 나아졌다.
그녀는 아시테르의 안내를 받아 곧바로 게벨과 다른 기사들의 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장 중앙에 있는 묘비를 보며 마르체니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아아…….”
그녀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아시테르가 천천히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아아아…….”
게벨의 묘비 앞에서 마르체니는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감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날씨도 점점 우중충해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바라보던 아시테르가 낮게 중얼거렸다.
“비가 오려나…….”
마르체니가 좀 더 게벨의 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팔을 들어 묘비를 쓸어내렸다.
묘비에 적혀 있는 글자를 하나하나 읽으며 그녀는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으아아아!”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오열하는 마르체니를 보며 모르핀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게벨이 그녀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는 모르핀도 잘 알고 있었다.
툭.
투두둑.
어깨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아시테르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느새 먹구름이 가득해 있었다.
“여기.”
카이드가 미리 들고 있던 우산을 건네주었다.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쏟아지는 빗줄기가 무수한 선을 그렸다.
아시테르는 우산을 들어 마르체니 공주 위로 가져갔다.
그녀는 비가 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동안 쌓여온 모든 것들을 쏟아내려는 듯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감정을 토해냈다.
“…….”
마르체니의 뒷모습은 금방이라도 실신해 쓰러질 것 같았다.
빗소리에 섞여 그녀의 울음은 세상 밖으로 멀리 퍼지진 못했다.
“이제 와서 죄송… 해요… 진짜 너무… 죄송해요…….”
그녀는 연신 같은 말은 반복하며 울고 또 울었다.
아시테르는 그저 마르체니의 곁을 지켜줄 뿐이었다.
그녀를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감정을 조금 추스린 마르체니가 다른 기사들에게도 인사를 남겼다.
아시테르는 말없이 그녀를 부축해주었다.
“물 있나요.”
“네? 네에…….”
대기하고 있던 모르핀이 물을 가져왔다.
아시테르가 진이 빠졌을 마르체니에게 물을 건넸다.
그러나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괜찮아.”
“그래도 목을 축이세요.”
“나는…….”
“이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벨 대장과 다른 형님들도 기분이 편치만은 않을 겁니다.”
“그치만… 나 때문에 모두가 죽은 거잖아. 내가 아니었다면…….”
“그런 생각 마십시오. 게벨 대장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다른 선배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같은 상황이 온다면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예요.”
“내가 뭐라고…….”
“뭐긴요. 우리들 모두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죠.”
아시테르가 애써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마르체니도 그런 아시테르의 미소를 보았다.
“도망치는 것 같았어.”
“네?”
“처음엔 견딜 수가 없어서 목숨을 끊고 싶었거든… 세상이 내게만 너무 가혹한 것 같아서…….”
“…….”
“근데 그때마다 아시테르 네 목소리가 들리더라.”
“제 목소리가요?”
“응.”
“제 목소리가 뭐라고 하던가요?”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그랬군요…….”
“삶의 무게가 이토록 무거운 줄 몰랐는데…….”
“잘 말했네요. 저도 똑같이 얘기했을 겁니다.”
아시테르의 말에 마르체니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다시 한 번 미소를 보였다.
“살아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래. 이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고…….”
“공주님의 책임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죄책감 따윈 가질 필요 없어요. 우리 모두 우리가 판단하고 선택한 삶이었고, 그에 따른 책임을 졌던 것뿐이에요. 나쁜 것은 우리를 속인 사우스 왕국이지 공주님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아시테르가 마르체니 공주의 어깨를 보듬어 주었다.
마르체니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졌다.
고개 숙인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말없이 아시테르의 품에 안겼다.
“잠깐만 빌려줘… 아주 잠깐이면 돼.”
아시테르는 말없이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르체니의 슬픔을 감춰주려는 듯 쏟아졌던 소나기는 어느새 그치고 서서히 맑은 햇살이 먹구름 사이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 * *
히스링을 포함한 이스트 왕국의 주요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마법기사단장들과 주요 요직에 앉은 귀족들이 한 곳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아시테르가 앉아 있었다.
“저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스트 왕국 사람인가요?”
“하지만 웨스트 왕국의 검제가 되었다는 말이 있던데요.”
“사실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저 분의 명령으로 웨스트 왕국의 로얄나이츠들이 움직였대요.”
“흐음… 그럼 역시 이스트 왕국 사람이 아닌 웨스트 왕국의 검제로서 대접해드리면 될까요.”
“근데 또 이게 참 아리송합니다… 지금은 검제여도 원래는 우리 왕국의 마법기사단 단장이었잖습니까.”
“거기다 천민이라는 소리가…….”
“그런 소리 마십시오. 아시테르님의 외가는 5대 가문인 프로메테 가문입니다.”
“크음… 어렵군요. 어렵게 되었어요.”
“심지어 몇몇 귀족들은 아시테르가 배신을 했다며 실컷 떠들고 다니질 않았습니까.”
귀족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아시테르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아시테르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히스링도 그런 아시테르를 살폈다.
그때 아시테르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갔다.
“고맙다 아시테르.”
시선을 돌리니 어느새 칸이 다가와 있었다.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아시테르도 칸의 손을 붙잡았다.
“네 덕분이다.”
“내가 한 게 뭐 있나.”
“불씨를 크게 키워주었잖아.”
“그 불씨를 살린 건 내가 아니야.”
“훗. 그래도 네게 고마운 것은 변함이 없다.”
칸이 아시테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힘이 있었다.
아시테르가 생각하기에 칸 또한 앞으로 이스트 왕국을 이끌어갈 든든한 기둥이었다.
어쩌면 그는 훗날 테르세우스나 히스링보다 더욱 뛰어난 리더가 될지 모른다.
카이드조차 칸은 그날 수도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인물 중 한 명이라 말했다.
그래봤자 흥미가 동하는 높은 수준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어쨌거나 훗날 더욱 강해질 마법기사라는 말을 했었다.
아시테르도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이어 그의 시선이 곁에 있는 알렌시아에게로 향했다.
알렌시아는 아시테르의 시선을 피했다.
아직까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 두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앞으로 이스트 왕국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늦었습니다.”
뒤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아시테르는 또다른 중요한 인물을 자신이 잊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리따운 여인과 함께 이곳으로 들어온 이는 바로 테오도라였다.
“가주님 오셨습니까.”
“프로메테 가문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귀족들의 인사를 받던 테오도라가 아시테르를 발견했다.
“왔구나, 동생.”
“형이 불렀잖아.”
“후후. 너도 빼놓을 수 없는 이스트 왕국 사람이잖아.”
“미안하지만 나는…….”
“알아. 하지만 그 뿌리는 이곳이잖아?”
테오도라의 말에 아시테르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테오도라의 말이라면 듣게 되는 이상한 힘이 있다.
그래도 한결 같이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준 테오도라에게는 늘 고마운 마음이었다.
테오도라가 아시테르의 어깨를 툭 쳤다.
그의 옆에 서있던 세밀리아가 저도 모르게 미소를 보였다.
“하여간 질투가 날 정도라니까. 아시테르가 없을 때도 늘 동생 얘기만 하니…….”
“아하하하! 이해해줘. 내 동생이 웨스트 왕국의 검제가 되었다는데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테오도라의 말에 몇몇 귀족들이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사실은 그게 이스트 왕국 귀족 사회에도 문제가 되고 있었다.
다 무너져가던 프로메테 가문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 사건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크리울로스가 가주직에서 물러나고 테오도라가 그 뒤를 잇게 되었다는 것.
테오도라는 트라이포스에 있으면서 이스트 왕국을 위해 많은 임무를 수행해냈고, 이스트 왕국이 사우스 왕국에 점령당했을 때도 혁명군을 이끌며 끝까지 싸워온 화려한 이력이 있었다.
때문에 왕국의 많은 사람들이 그가 가주직에 오른 것을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아시테르의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