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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382화 (382/424)

382화 귀족 회의

아시테르가 검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얘기가 돌면서 많은 이들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나 프로메테 가문을 잡는데 앞장섰던 귀족들은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들이야말로 프로메테 가문이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데 첫 걸음을 떼게 만든 장본인들이었다.

아시테르가 이것을 알면 그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냥 아시테르가 그들을 가만두었기 때문인데, 사실 따로 나설 필요도 없었다.

크리울로스도 만만치 않지만 아시테르가 생각하기에 테오도라 또한 만만치 않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테오도라가 가주직에 올랐으니 알아서 잘 해결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었다.

‘그럴만한 능력자이기도 하고.’

아시테르가 테오도라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그러자 테오도라도 그를 보며 웃었다.

“어쨌든 이렇게 자리해주어서 다시 한 번 고맙다.”

“크흠!”

한 차례 헛기침을 한 히스링이 마침내 운을 뗐다.

그가 처음 꺼낸 안건은 사우스 왕국에 관한 일이었다.

이스트 왕국 땅에서 자국민들을 괴롭히다 붙잡힌 이들은 물론, 그들을 도와준 인물들도 그에 합당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왕국을 위해 용감히 싸워준 이들에게는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렇소. 일단 벌에 관한 것 말인데. 평민들이 귀족의 작위를 받으면 귀족이 되듯, 귀족이 그 작위를 빼앗기면 다시 평민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나.”

히스링의 말에 몇몇 귀족들이 헛기침을 해댔다.

그 말은 결국 사우스 왕국을 도운 귀족들의 작위를 빼앗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입니다.”

귀족들 중 제법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계속 말해보라는 듯 히스링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각기 다른 사정으로 사우스 왕국을 도운 이들이 있을 겁니다. 여기 있는 도르네무스만 해도 자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우스 왕국을 도왔습니다. 이런 사정을 갖고 있는 귀족들이 한둘이 아닐 진데, 그들 모두의 작위를 빼앗는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굴러가겠습니까?”

“맞습니다. 귀족들이 대거 평민 신분으로 전락해버리면 영지도 제대로 안 돌아갈 것입니다.”

“국정도 마찬가지지요.”

“무엇보다 다른 귀족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귀족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무언의 동의를 표했다.

이를 지켜보던 아시테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히스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소.”

그의 말에 귀족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그러자 히스링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분명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 사우스 왕국과 끝까지 싸운 자들도 있을 진데, 그들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니겠소? 누구는 가족들과 나의 후대에 멋지고 아름다운 나라를 물려주겠다고 열심히 싸웠는데… 누구는 자기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적국과 손을 잡았다고 하니… 거기다 더 슬픈 사실이 뭔지 아시오?”

히스링이 귀족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들은 히스링이 다음으로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숨죽이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상 현재 이스트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인물은 히스링이었다.

그의 입 밖으로 어떤 말들이 튀어나오느냐에 따라 왕국의 많은 것들이 바뀔 터다.

“이미 당신들은 당신들의 입으로 대부분의 귀족들이 작위를 빼앗길 것이라 말하고 있소. 이게 정말 슬픈 사실이 아니면 뭐겠소.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많은 귀족들이 나서서 싸웠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하나 묻고 싶소. 그럼 그대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귀족으로서의 권리를 누려온 것이오? 이런 상황일 때 나라를 위해 조금 더 앞장서고 조금 더 노력해달라는 의미에서 그런 혜택을 누린 것이 아닌가? 단순히 핏줄이 귀족 핏줄이었다?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피는 누구나 붉어. 다 똑같은 피를 갖고 있다는 말이오…! 결국 그저 의미부여나 하는 장난질로 귀족 놀이를 하려든 놈들이 많았다는 거지.”

잠시 말을 쉰 히스링이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귀족들은 상당한 마력을 갖고 태어난다는 얘기도 있던데… 글쎄. 내가 보기에는 천민이나 평민 출신 중에서도 상당한 마력을 갖고 태어나는 이들이 많소. 그들은 그저 마력을 보존하고 더 늘려가는 방법을 몰랐을 뿐이오. 심지어 그 좋은 재능을 갖고 썩히는 자들도 존재하지. 실제로 이번 사태를 통해 나 역시도 한 가지 크게 깨달은 것이 있소. 귀족들 못지않게 평민들, 천민들도 훌륭한 전투를 치를 수 있다는 것이었지. 그렇듯 목숨을 내걸고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 이들에게 국가가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소?”

히스링의 차가운 시선이 귀족들을 살폈다.

마치 그들에게 잘못을 따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많은 귀족들은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국가보다는 그저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했던 귀족들이 상당했던 터다.

히스링도 이제야 테르세우스가 만들고자 하는 나라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신분에 상관없이 재능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히스링은 그 생각에 반신반의 하고 있었다.

취지는 좋지만 평민이나 천민들에게 굳이 그런 기회를 주기 위해 국가가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그보다는 더 재능 있는 이들에게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 이제 생각이 달라졌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기회를 붙잡는 것은 순전히 그들의 몫으로 남겨야 한다.

다만 기회를 붙잡고 올라온 이들은 국가가 나서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실력도 중요하지만 올바른 인식과 생각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은 시간이었소.”

실력이 좋으면 뭣 하겠는가.

적들의 손을 붙잡고 아군의 등에 칼을 꽂으면 없느니만 못하다.

그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히스링은 마저 얘기를 이어갔다.

한 번씩 불만을 내비치던 귀족들도 이제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들어주어야만 했다.

그렇게 여러 얘기들이 오가고, 마침내 히스링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이스트 왕국을 재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웨스트 왕국의 ‘검제’님이 와계신 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오.”

귀족들과 마법기사들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히스링은 테오도라와 같은 가죽들이나 마법기사들에게는 의견을 구해도 아시테르에게는 따로 의견을 구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치 아시테르는 더 이상 이스트 왕국에 관여할 수 없음을 보이는 것 같았다.

아시테르도 굳이 이들의 얘기에 참견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그저 히스링과 다른 이들의 얘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을 뿐이다.

그랬던 히스링이 이제는 아시테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쏠렸다.

“사실 아시테르 검제님은 이곳에 괜히 와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힘을 빌리고자 하오.”

“우리들의 힘을 빌리다니… 사우스 왕국과 다시 한 번 전쟁이라도 벌이려는 겁니까?”

“하지만 우리 왕국은 이제야 겨우 독립을 했습니다. 아직 갖춰야 할 것들이 많은데…….”

“내부 사정도 다 수습하지 못한 마당에 우리가 누굴 돕겠습니까.”

귀족들의 말에 히스링이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우스 왕국과의 전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오. 그보다 좀 더 커다란 문제지.”

나머지를 설명해달라는 듯 그가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그때서야 아시테르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을 시작으로 아시테르는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어비스 던전과 아포칼립스 문에 대해 들었을 때는 많은 이들이 신기해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는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말… 그때 봤던 그 마수급이 또 튀어나올 수 있다는 말이냐?”

“응. 그보다 더욱 강한 마수도 있을 거야.”

“…미치겠군.”

몇몇 귀족들과 마법기사들이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수도를 한바탕 휘저어 놓았던 마수가 또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다니.

그것이야말로 재앙인 일이었다.

그나마 사우스 왕국은 인간들이기 때문에 말이라도 통하지만 마수들은 그저 인간을 죽이고 잡아먹을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힘을 빌리려는 겁니다. 이번에는 인류가 한곳에 뭉쳐 싸워야 합니다.”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과연 다른 왕국에서도 선뜻 병력을 내어주려 할까?”

알렌시아가 조금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말했다.

그러나 아시테르는 강한 자신감을 내비췄다.

“웨스트 왕국과 마녀숲은 대부분의 병력을 어비스 던전에 두기로 했어. 이는 노스 왕국도 마찬가지야. 노스 왕국은 이미 투사들을 이끌고 어비스 던전 근처로 향하고 있다.”

“어비스 던전이라는 곳이 그렇게나 큰가?”

“네. 엄청나게 커다란 곳입니다.”

“흐음…….”

“그리고 사우스 왕국도 이번 전쟁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사우스 왕국이……?”

“그 조건으로 붙잡았던 트럼프 군대를 보내준 거로군.”

“맞습니다.”

아시테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도 어비스 던전에서 튀어나올 마수들과 싸울 훌륭한 전력이었다.

그러니만큼 최대한 보존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 또한 이 문제로 논의해야 할 것이네.”

히스링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스트 왕국이야말로 현재 가장 도움을 주기 어려운 나라에 속한다.

반란군 발할라 사건에 이어 수도를 습격한 마수, 마지막으로 사우스 왕국과의 전쟁까지.

여러모로 국력이 쇠퇴한 지금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럼에도 아시테르가 내민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시테르였기 때문에.

그가 이스트 왕국에 미친 영향은 그만큼이나 막대했다.

거기다 아시테르가 말하는 인류에는 당연하게도 이스트 왕국이 포함되어 있다.

히스링이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 자리를 비켜줄 수 있겠나. 나머지는 우리들끼리 얘기를 나눠보겠네.”

“알겠습니다.”

아시테르는 예를 한 번 차리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숙소로 돌아온 아시테르는 조용히 침대에 누웠다.

고단했던 하루를 마무리하며 두 눈을 감았다.

이스트 왕국이 참전하지 않을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다만 이스트 왕국에서 얼마나 많은 병력을 보내줄지는 솔직히 가늠이 되질 않았다.

마냥 많은 병력을 바라기엔 이스트 왕국도 굉장히 힘든 사정임을 아시테르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런 상황 속에서 이스트 왕국에 도움을 구하는 아시테르 또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비체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포칼립스 문에서 나오는 마수들의 수는 족히 200만을 넘길 것이다.

거기다 그들을 이끄는 마수들의 군주.

녀석과의 싸움도 굉장히 힘들 것이다.

근래 아시테르의 꿈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이마에 굵직한 뿔이 양쪽으로 돋아나 있는 백금발의 사내.

뒤로는 불길한 검붉은 날개가 크게 뻗어 있었다.

‘잘 보아두어라. 저자가 바로 위리놈이다.’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려왔다.

위리놈.

과거 비체에게 들은 적이 있다.

마수들의 왕이라 불리는 존재.

그의 붉은 눈동자가 아시테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이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새하얀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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