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화 회광반조
쿠구구구궁―
공동에 커다란 울림이 일었다.
그 속에 홀로 앉아 있던 비체가 서서히 눈을 떴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그가 공허한 눈빛으로 한쪽을 응시했다.
“결국 때가 온 것인가.”
오랜 세월동안 지켜온 곳이었다.
선대 때부터 지켜온 것이었건만 결국 자신이 살아 숨 쉬는 동안 이 문이 열리려 하고 있었다.
“캬야아아아아!”
비체의 위에서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시선이 위쪽으로 향했다.
“후후후. 나의 마지막을 함께 해 주려 온 것이냐.”
생명의 불씨가 서서히 꺼져가는 것을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어비스 던전의 신수가 어느새 이곳에 다가와 있었다.
녀석의 맑은 눈동자가 비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그동안 고생했다며 타이르는 듯 보였다.
“불행 속에서도 꽤나 괜찮은 삶이었다.”
비체가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태어나 숨 쉬기 시작하면서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가장 행복한 때를 꼽으라면 단연 유미르와 아레나가 이곳으로 들어온 때부터일 것이다.
아시테르가 태어났을 때는 생명의 신비를 느꼈다.
삶과 죽음은 늘 언제나 함께라 생각했는데 쑥쑥 성장해가는 아시테르를 보며 처음으로 삶과 죽음이 분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언제나 따라다니는 죽음의 그림자가 저 아이에게서만큼은 멀어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시테르뿐만이 아니었다.
자신과 함께 지내온 유미르와 아레나도 함께 행복하길 바랐다.
“허나… 역시 인생은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지?”
비체가 허공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보였다.
바깥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비체 자신도 잘 모른다.
하지만 분명 아시테르가 잘 해내고 있을 거란 믿음은 있었다.
툭.
비체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아포칼립스의 봉인을 이어가며 서서히 죽음을 맞이할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눈을 떠버리고 말았다.
“그 말은 결국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거겠지.”
비체가 전방을 응시했다.
끼기기기기기긱―――!!!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침내 아포칼립스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활짝 열린 것이 아님에도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진득한 마기는 숨을 옥죄일 수준이었다.
“캬아아아!”
“쿠워어어어!”
“쿠가가가! 쿠가가가!”
문이 열리자 안에 대기하고 있던 마수들이 하나둘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녀석들을 보자마자 비체의 눈빛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지겨운 녀석들.”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도 저놈들과 함께였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평생 혼자 짊어지려 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게 되었다.
“뒷일은 잘 부탁하마.”
쿠오오오오오오오―――!!!
비체의 전신에서 거대한 영기가 폭발하듯 흘러나왔다.
그의 안광이 폭사되며 영기 덩어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 비체의 곁에는 거대한 호랑이가 함께였다.
“함께 싸워주시는 겁니까.”
비체의 물음에 호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훠어어어엉―――!!!
호랑이가 크게 포효하자 마수들이 움찔했다.
녀석들의 시선이 비체에게로 몰렸다.
쿵!
그때 거대한 검을 든 마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녀석은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비체를 알아보았다.
“발도르의 후예인가.”
“우리들의 말을 할 줄 아는 거냐?”
“어느 정도는.”
녀석이 주변을 살폈다.
비체 말고 다른 인간들이 보이진 않았다.
“수상할 정도로 적군.”
“네놈들은 나 하나로 충분하느니라.”
“오만이 지나치구나, 인간.”
녀석이 검을 들어올렸다.
“나는 선발대의 대장을 맡은 쿠베르카다.”
“네놈 이름 따위는 관심 없다.”
“이제 관심이 생기게 될 것이다.”
쿠베르카가 거대한 검을 들어올렸다.
녀석의 명령에 마수들이 튀어나가기 시작했다.
“끼야아아!”
그때 하늘을 날던 신수가 날개를 활짝 폈다.
그러자 얼음송곳과 전격이 떨어졌다.
비체도 이것을 신호로 몸을 움직였다.
콰르르르르릉!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수십의 마수들이 죽었다.
검을 멈추지 않은 비체가 연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 사이 거대한 호랑이는 맹렬한 기세로 적진에 뛰어들어 마수들을 물어뜯었다.
마수들의 공격도 호랑이의 질긴 가죽을 뚫지 못했다.
휘콰아앙!!!
호랑이를 향해 날아오던 공격을 비체가 검으로 막았다.
쿠베르카의 일격은 생각보다 묵직했다.
“그래도 대장이라는 거냐?”
비체가 놈을 노려보았다.
가장 먼저 노려야 할 것은 역시 저놈이었다.
그러나 쿠베르카의 주변으로 많은 마수들이 밀집해 있었다.
“쉽지 않겠군.”
가장 먼저 튀어나온 녀석이 이 정도라면 저 뒤에 도사리고 있는 놈들은 더더욱 거대한 존재들일 터다.
발도르 왕국의 많은 전사들이 끊임없이 강해지고자 했던 것도, 어쩌면 저 뒤의 마수들과 전쟁을 치러야 할지 모르기에 대비를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습게도 발도르의 힘이 강해질수록 두려움을 사게 된 것은 인간이었다.
“후후…….”
저도 모르게 실소를 짓고만 비체가 다시 기운을 갈무리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이 힘은 절대로 갑자기 생긴 힘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그의 생명력과 맞바꾼 힘.
그러니 조금도 허투루 쓸 수 없으며 시간을 낭비할 수도 없다.
그때 비체가 있는 곳으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무심결에 그것을 받아든 비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발도르 왕국의 신물이었다.
그것도 영기를 담으면 이곳에 봉인된 영체들이 깨어난다.
“이게 갑자기 어디서…….”
“캬아아아!”
위에서 신수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제야 비체는 이 신물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았다.
“당신이 갖고 있었던 겁니까…….”
신수가 어떻게 이것을 갖고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작금의 상황에 그것을 따로 알 필요도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 신물이 지금 비체의 손아귀에 있다는 점이다.
비체가 곧바로 자신의 영기를 신물에 주입했다.
달칵.
자물쇠처럼 잠겨 있던 신물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콰아앙!
푸슈우우우우우―――
신물에서 흘러나온 연기 속에서 수백의 전사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비체는 곧바로 그들을 알아보았다.
“영체로 만들어진 군대…….”
임모르탈리스.
발도르 왕국 왕가에게만 허락된 불멸의 군대였다.
영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들은 소멸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공포로 각인되어 있는 존재들이었다.
황금빛 가면을 쓴 그들이 비체를 향해 예를 차렸다.
“발도르의 군사들이여…….”
비체가 다음 말을 내뱉기도 전에 그들이 진형을 갖췄다.
숨막힐 듯 전해오는 마기에 먼저 반응한 것이다.
그들은 곧장 병장기를 들고 마수들을 향해 돌진했다.
비체 또한 발도르의 마지막 군사들과 함께 싸우기 위해 뛰어들었다.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그가 목청껏 외쳤다.
“발도르의 영광을 위해!”
* * *
한편 어비스 던전 바깥의 상황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극적으로 맺어진 동맹 덕분에 각 왕국의 왕들이 한 자리에 모이고 있었다.
그들이 모이는 장소는 가장 중앙에 위치한 마녀숲이었다.
이는 마녀여왕이 허락해준 덕분도 있었다.
마녀숲에 위치한 거대한 회의장.
모두 마녀여왕이 마법으로 만들어낸 장소였다.
그리고 이곳은 오랫동안 역사에 길이 남을 장소가 되기도 했다.
마녀여왕의 주관 아래 각국의 왕들이 모였다.
네 명의 왕은 한 자리에 모여 앞으로 벌어질 미래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나 또한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느낀다. 이미 거대한 마기를 지닌 존재들이 이공간의 문을 통해 이곳으로 발을 디뎠다.”
누군가 아시테르의 말에 의문을 표하자 마녀여왕이 먼저 그 말을 증명해주었다.
그녀 역시도 언젠가부터 마녀숲에 흘러나오는 마기를 느끼고 있었다.
이 숲은 그야말로 여왕의 마력으로 가득한 곳.
이 영역에 발을 들이려는 마기를 모를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마녀여왕의 발언 덕분에 아시테르의 말에도 힘이 실렸다.
웨스트 왕국의 왕은 모든 군사력을 총동원할 것임을 밝혔고, 노스 왕국 또한 움직일 수 있는 모든 투사들을 동원할 것을 밝혔다.
나머지 사우스 왕국과 이스트 왕국도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
그때 마녀여왕이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실 이곳에 초대된 또 한 명의 왕이 있다.”
“설마… 아시테르를 부르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시테르는 웨스트 왕국의 검제이지 왕은 아니질 않습니까?”
“이곳은 각국의 정상들이 모이는 자리입니다. 아시테르는 아직 그 자격이…….”
마녀여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시테르가 아니야.”
그녀가 가리킨 곳에 있는 것은 거대한 몸집의 사내였다.
그의 머리위로 드러난 뿔이 한눈에 인간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했다.
“저 자는 누굽니까?”
“여왕님. 저 자는 인간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설마 마수인가?”
마수라는 말에 헬라이번이 그를 쳐다보았다.
헬라이번과 시선이 마주친 코모스 디오가 순간 움찔했다.
무형의 기운이 그를 압박하는 것 같았다.
그때 마녀여왕이 손짓하자 코모스 디오가 숨을 몰아쉬었다.
“이곳에 와서 함부로 마력을 다루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는데.”
“이거 실례했군.”
마녀여왕의 말에 똑같이 단답으로 대답하는 존재.
새로 나타난 헬라이번의 존재에 각국의 왕들이 눈을 빛냈다.
그래도 헬라이번의 존재에 대해 이미 알고 있고 따로 대화도 몇 번 나눠본 웨스트 왕국의 왕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마녀여왕이 헬라이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자는 첼룬 왕국의 왕이다.”
“첼룬 왕국?”
“처음 들어보는 왕국인데…….”
“그런 왕국이 있었단 말입니까?”
왕들이 이렇게 의문을 표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첼룬 왕국은 대륙 서쪽 끝에 위치한데다 따로 바깥과 교류를 하지 않았다.
웨스트 왕국조차 근래에 첼룬 왕국과 교류를 하기 시작했으니 얼마나 쇄국 정책을 펼쳤는지는 알만했다.
거기다 지리적으로도 첼룬 왕국에 발을 들이려면 무조건 웨스트 왕국을 통과해야만 했다.
지금이야 길이 만들어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웨스트 왕국을 관통한 뒤 마수들이 득실거리는 협곡까지 건너야 했으니.
다른 왕국들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만 했다.
하지만 헬라이번은 개의치 않고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첼룬 왕국의 국왕 헬라이번이다. 이곳은 나의 영원한 친구 아시테르 때문에 오게 된 거다.”
헬라이번이 가장 먼저 아시테르의 이름을 밝혔다.
여기서도 아시테르의 이름이 나오니 국왕들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여간 대륙에서 가장 바쁜 사람으로 이름을 꼽자면 분명 아시테르가 들어갈 것이다.
헬라이번은 간단하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웨스트 왕국을 제외한 다른 왕국들과 굳이 교류할 생각은 없지만 이번 전쟁만큼은 모든 노력을 다해 돕겠다는 얘기였다.
“첼룬 왕국에서는 무엇을 도와줄 수 있습니까?”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약소국이라 생각한 이스트 왕국의 국왕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헬라이번이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우리는 저런 무기와 방어구를 만들어낼 수 있다.”
드워프들이 만들어내는 병장기는 마도공학으로 만든 병장기와 또 달랐다.
이어 헬라이번이 자신들의 군사력에 대해 읊었다.
“이쪽은 다양한 종족이 모여 살아가고 있다. 그만큼 다양한 측면에서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첼룬 왕국은 우리 웨스트 왕국과 함께 움직일 겁니다.”
“흐음…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쯧. 그리고 우리 사우스 왕국의 마도공학 무기 말이오. 이번 전쟁을 위해 각국에도 나눠주도록 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