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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384화 (384/424)

384화 소원

정상회의는 생각보다 훨씬 더 길어졌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대화가 각 왕국이 원하는 지점까지 도달했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처음 시행된 정상회의였던 만큼,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컸다.

더군다나 이 정상회의에 이례적으로 마녀여왕과 이종족의 왕이 함께 했다.

“아이야. 네가 정말 큰 일을 해냈구나.”

“별말씀을요.”

“아니다. 인간들의 왕이라는 자들을 이렇게 한곳에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네 덕분이다.”

마녀여왕이 눈앞에 있는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아시테르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했던 일이다.

이는 모두가 동의하는 바였다.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다면 연회라도 열었을 거다.”

“네.”

답하는 아시테르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 또한 마녀여왕과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각국의 왕들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다.”

“과연 네 분 모두 약조를 지켜주실지…….”

“다른 곳은 몰라도 이스트 왕국과 사우스 왕국은 힘들 테지.”

마녀여왕은 정상회의 때 계속해서 이스트 왕국 국왕과 사우스 왕국 국왕의 얼굴을 살폈다.

사우스 왕국의 국왕이 마지막에 마도공학 무기를 제공하겠다며 파격적인 말을 했었고, 이스트 왕국은 자국의 모든 마법기사단을 동원하겠다는 말을 해왔다.

과연 그들이 약조한 바를 지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당장 이스트 왕국만 해도 마법기사단을 모두 보내오면 치안에 문제가 생긴다.

사우스 왕국 또한 마도공학 무기는 그들의 핵심 전력 중 하나였다.

그것을 개발하기 위해 수년간 노력해 왔는데, 그것들을 각 나라에 제공하면 그 기술을 빼앗길 위험이 존재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도공학 무기를 제공하겠다는 말을 해왔다.

“그래도 믿어보는 수밖엔 없습니다.”

“그래… 그보다,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이렇게 너를 불렀다.”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솔직하게 말해다오. 비체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비체의 이름이 나오자 아시테르의 표정도 덩달아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얼마 전 위리놈이 나오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묘한 불길함에 휩싸여 있었다.

그 불길함은 마녀숲에 도착했을 때 더욱 강해졌다.

이곳은 어비스 던전과 가까운 곳이라 마녀숲에 머물면 무언가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 늘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느낌이 ‘툭’ 하고 끊긴 기분이었다.

이 때문에 아시테르는 당장이라도 어비스 게이트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섣불리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만약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마수들이라면 준비를 갖추기도 전에 놈들이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꼴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마 어비스 던전에서 홀로 봉인을 지키고 있을 겁니다.”

“그곳을 홀로 지키고 있단 말이냐?”

“예.”

“만약 그곳의 문이 열리게 된다면… 수도 없이 많은 마수들이 쏟아져 나올 텐데…….”

“…할아버지께서 선택하신 일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시테르는 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비체가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

죽은 비체의 몸을 마수들이 가만두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아시테르는 모든 일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때 곁에 서 있던 에스파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비스 던전이 그렇게 나오기 힘든 곳이라면 그냥 둬도 마수들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것 아냐?”

그러자 아시테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비스 던전을 지키는 신수가 죽거나 던전에서 수용할 수 있는 마수들의 수를 넘어설 때, 어비스 던전은 자연스럽게 게이트를 열어 안에 있던 마수들을 바깥으로 내보낼 거야.”

“그럼 그때 게이트가 열린다는 말이야?”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마수들 중에 던전 게이트를 열 수 있는 녀석도 있을 수 있겠지.”

아시테르의 말에 모두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당장은 아니라는 점이 조금은 안심이었다.

“일단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해라.”

마녀여왕은 이례적으로 아시테르와 그의 일행들은 마녀숲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다른 군사들은 모두 마녀숲 바깥에 주둔해야 했다.

마녀여왕이 아시테르와 일행들을 특별히 배려해주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세아츠리스가 원하지 않았더라면 너희들에게 따로 내어줄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시테르가 가볍게 목례를 취하며 예를 갖췄다.

세아츠리스가 직접 아시테르가 쉴 곳을 안내해 주었다.

“이곳에서 쉬면 될 것 같아. 나머지 다른 팀원들도 각자 숙소로 안내해줬어.”

“고마워 세아츠리스.”

“고맙긴 뭘.”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고마웠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아시테르 오빠가 내 목숨을 구해주었잖아. 마녀는 생명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아.”

“후후후. 그러고 보면 그때가 가장 마음 편하긴 했어. 그렇지?”

아시테르의 말에 세아츠리스가 피식 웃었다.

아시테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의외였다.

“이제와 과거로 돌아가고 싶기라도 한 거야?”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마법이 있다면 부탁하고 싶을 정도야.”

“굳이? 그렇게까지 과거로 돌아갈 필요가 있어? 지금도 오빠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잖아.”

“맞아.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란 장담은 못하지. 거기다 그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수많은 인연들을 만났고. 그런데… 그냥 보고 싶어.”

“보고 싶다니… 아…….”

세아츠리스는 뒤늦게야 아시테르가 말하는 이가 누군지 알았다.

“어머니도 보고 싶고, 아버지도 보고 싶어… 할아버지도 계속 곁에 있었으면 좋겠고. 알아. 이런 생각이 나약하고 어리다는 걸.”

“그게 왜 나약하고 어려? 인간이라면 당연한 생각이잖아. 오히려 그런 마음 덕분에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 아냐? 우리 마녀들은 오히려 그런 것들이 없잖아.”

세아츠리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세아츠리스는 언제나 아시테르에게만큼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아시테르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이런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기쁘네.”

“뭐가?”

“이런 나약한 모습. 아무한테나 보여주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내가 이제 오빠가 기댈 수 있을 만큼 좋은 마녀가 되었다는 얘기니까.”

“나는 언제나 너에게 기대고 있었는데?”

아시테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세아츠리스도 따라 웃었다.

그녀가 섬섬옥수 같은 손을 가져가 아시테르의 손을 맞잡았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힘들거나 쉬고 싶을 때 언제든 말해. 내 숲에서 쉬게 해줄게. 알겠지?”

“고마워 세아츠리스.”

세아츠리스야말로 그녀의 성향과 똑 닮은 마법을 사용했다.

그녀의 가시는 적들에게는 무자비할 만큼 잔인했다.

하지만 아군을 보호하는데 있어선 너무나 듬직한 수준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아시테르를 위해 가시덤불로 이루어진 보금자리를 만들어줄 수 있다.

아시테르는 힘들고 지칠 때 그곳에 들어가 휴식을 취할 수 있고, 그럴 때면 세아츠리스가 보금자리의 문을 닫아 아시테르가 온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세아츠리스가 아시테르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는 언제든 두 팔 벌리고 환영하니까. 힘들면 찾아와요.”

“고마워.”

“제가 더 위로해주고 싶지만 지금은 저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세아츠리스가 살포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린이었다.

아시테르가 새삼스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늦지 않았지?”

“당연하지.”

“근데 세아츠리스랑 뭐하고 있었던 거야?”

“그냥…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어.”

린이 슬쩍 세아츠리스를 바라보았다.

세아츠리스가 방긋 웃었다.

“고마워, 세아츠리스.”

“뭐가요?”

“내가 없을 때 아시테르의 곁을 지켜줘서.”

“후후. 뭘요. 언니라서 오빠를 안 뺏는 거예요.”

“알아. 나도 너라서 안심하는 거거든.”

두 여인이 시선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이는 질투나 시샘 같은 것이 아닌, 다른 종류의 무언의 대화였다.

세아츠리스가 이만 자리를 비켜주고 아시테르와 린만 남게 되었다.

“갔던 일은 잘 해결되었어?”

“응. 이제 남은 문제는 딱 하나 뿐이야.”

“좋네. 하나만 신경 쓰면 돼서.”

“그래서, 우리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면 그 이후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너랑 함께 살 생각이야.”

“그건 당연한 거고.”

린의 답에 오히려 아시테르가 두 눈을 깜빡였다.

린이 아름다운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왜? 내가 너무 뻔뻔한 것 같아?”

“세월이 많이 흐르긴 흘렀구나. 너도 이렇게 성격이 변하다니…….”

“다 네 영향이지.”

“아니야.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보다 마수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그때는 뭘 하면서 살아가고 싶어? 아직 그것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어.”

“글쎄… 지금까지는 내가 원하는 대로 네가 맞춰서 살아주었으니 이번에는 내 차례가 아닐까.”

아시테르의 말에 린이 빙그레 웃었다.

그녀의 눈웃음에 아시테르는 새삼 반하고 있었다.

“그럼 잘 됐네! 그렇지 않아도 노스 왕국에 그렇게나 아름다운 곳이 많다고 하더라고?”

“노스 왕국에? 그렇지. 거기는 자연을 중시하는 나라잖아. 정령들과 함께 살아가는 나라이기도 하고.”

“그래서 신기하고 예쁜 장소도 많다고 하니까 우선은 그곳에 가보고 싶어.”

“좋지좋지.”

“그리고 나선 이스트 왕국의 명소들도 가볼 생각이야.”

“이스트 왕국에?”

“지난번에 들었는데 이스트 왕국의 항구도시 중에 예쁜 곳이 많다며? 음식도 맛있다고 하던데.”

린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아시테르는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보고 싶은 곳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네.”

“당연하지! 그동안 내가 얼마나 웨스트 왕국에 갇혀 살았는데.”

“응? 양심이 있는 거야?”

아시테르의 말에 린이 괜히 헛기침을 해댔다.

사실 아시테르를 만난 것도 웨스트 왕국이 아닌 이스트 왕국에서였다.

그때도 린은 웨스트 왕국이 갑갑하다며 바깥으로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아무튼! 네 말대로 나는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으니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둬.”

“웨스트 왕국에는 머물지 않는 거야?”

“당연하지! 그러기 싫어서 조금 전에 왕위 계승을 포기하고 오는 길이야.”

린의 말에 아시테르가 순간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았다.

웨스트 왕국이 국왕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크게 사고 한 건 치고 오는 길이란 뜻이었다.

그래도 아시테르는 린의 뜻을 존중해주었다.

“잘했어.”

“그치?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너의 검제 직위도 반납하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건 그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직위가 아니더라고.”

“왜? 내가 하기 싫다면 하기 싫은 것 아닐까.”

“그게 그렇게 쉬울 것 같아? 그랬으면 나도 진즉에 공주 때려쳤지.”

“후후후. 그것도 그렇네.”

린이 아시테르의 목을 양팔로 감았다.

그리곤 지그시 아시테르와 시선을 마주했다.

“알겠지? 우리 꼭 살아남아서 전쟁에서 승리해내는 거야. 그래야 내 소원도 들어줄 것 아니야.”

“네 소원이 뭔데?”

“아시테르 너와 세계여행을 다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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