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그 시각 북쪽은…
중앙의 마녀숲으로 향하던 노스 왕국군도 열린 게이트들 때문에 이동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십수 개의 게이트가 공간에 균열을 일으키며 나타나더니, 그곳에서 여러 마수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정말이로군… 아시테르의 말이 사실이었어.”
이그트가 눈앞의 대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를 위시한 투사들이 다가드는 마수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노스 왕국이 끌고 온 병력은 자그마치 60만 대군이었다.
그중 높은 수련을 받은 투사들이 20만이 넘는다.
그만큼 아시테르의 말을 신뢰하고 최정예들을 끌고 온 것이었다.
“흐음… 투사장급 마수들도 보이는구나.”
노스 왕국의 국왕 파쿠황이 마수들을 살피며 말했다.
다른 왕국과 다르게 노스 왕국은 국왕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온 경우였다.
파쿠황은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출정이라는 말을 남겼다.
실제로 그는 이번 전쟁을 마지막으로 왕위를 이그트에게 넘겨줄 생각이었다.
이미 이그트는 자신만큼이나 높은 전투력을 자랑하는 투사로 거듭났다.
왕의 시련까지 통과한 이그트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이번 전쟁까지 그가 이끌려고 한 것은 온전히 책임을 지기 위해서였다.
만약 전쟁에 패하더라도 자신이 모두 끌어안을 수 있고, 승전보를 울리게 된다면 첫 출전한 이그트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거기에 더해 파쿠황 자신의 욕심도 한몫했다.
강한 자와 겨루고 싶은 열망과 더불어 왕위에서 물러나기 전, 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을 수 있을 만한 위업을 이루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전쟁에 나서는 파쿠황의 각오는 그 어느 때보다 남달랐다.
파쿠황이 신호를 보내자 대기하고 있던 투사들이 움직였다.
한쪽에서는 정령술사들이 날아드는 마수를 상대로 활약하고 있었다.
“아버지, 저길 보십시오.”
이그트가 한쪽을 가리켜 말했다.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수는 민머리에 커다란 덩치를 가진 트롤들이었다.
파쿠황이 입가에 미소를 드러내었다.
“이제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는 모양이구나.”
갑옷을 걸친 오우거들도 대거 등장했다.
그들의 가장 선두에 선 마수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곳의 선봉대 대장을 맡은 본로말이다. 인간들은 모두 예를 갖춰라.”
“나타나자마자 헛소리를 늘어놓네요.”
이그트가 곧바로 병력을 이끌고 놈에게로 달려들었다.
강한 투기를 휘감은 그가 다가오자 본로말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인간들 중에도 제법 강한 존재가 있었구나.”
본로말이 기둥처럼 생긴 특이한 무기를 들어 올렸다.
굵직한 기둥을 가볍게 후려치자 대지가 몸을 일으켰다.
쿠구구구궁―
송곳처럼 튀어오르는 대지를 사뿐히 밟은 이그트가 주먹에 투기를 모았다.
“네놈 실력은 어떤지 한번 확인해보자꾸나.”
휘콰아아앙!!!
강력한 투기가 앞으로 쏘아져나갔다.
이그트가 익힌 기술 중 하나였다.
투기가 광선처럼 쏘아져 나가는 것을 본 본로말이 무기를 들어 올렸다.
쿠우웅!!!
전해지는 울림이 상당했다.
그래도 단단한 소재로 만든 만큼 무기는 멀쩡했다.
“흐음!”
쿠과아앙!!!
이어 이그트의 주먹과 기둥이 부딪쳤다.
대기가 일렁이며 한 차례 충격파가 일었다.
이것에 휩쓸린 하급 마수들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본로말의 시선이 이그트를 한 차례 훑었다.
“터프한 놈이로군.”
“이런 일에는 참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그래도 너무 과감하게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온 것 아닌가?”
“본래 이런 일에 대장이 앞장 서줘야 수하들이 따라오게 되어 있는 법이다.”
이그트가 다시 한 번 주먹을 휘둘렀다.
거친 투기가 본로말을 잡아먹을 듯 휘몰아쳤다.
투기의 폭풍 속에서 본로말이 무기를 휘둘렀다.
조금이라도 이 거친 투기를 마기로 상쇄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공격은 이그트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겨우 이 정도냐?”
이그트가 실망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
반면 본로말은 놀란 모양이었다.
“인간들의 힘이 이 정도였나…….”
분명 다른 한쪽에선 엄청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강한 자들이 넘쳐나는 곳.
그곳에는 감히 발을 들일 생각도 하질 않았다.
게다가 어차피 그곳을 이끄는 이는 루이스올.
본신의 힘도 강력하지만 루이스올은 자신이 갖고 있는 마기를 일시에 폭발시켜버리는 최후의 한 수를 갖고 있는 녀석이었다.
만약 루이스올이 상대할 수 없는 강한 적을 만나더라도 놈이 작정하고 한바탕 커다란 폭발을 일으키면 일순간 전장은 초토화가 될 것이다.
그러면 이후 지금보다 더욱 무서운 존재가 발을 들일 것이다.
마수들의 세계에서도 그는 ‘죽음’이라 불리는 존재.
그가 있는 전장에는 굳이 서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여러 이유로 택한 전장이 바로 북쪽이었는데 놀랍게도 이곳 또한 강한 인간들이 여럿 있었다.
“재밌군… 하지만 우리 또한 이제 시작이다.”
자신을 포함한 선봉대의 대장들도 분명 강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 뒤에 있는 자들은 더더욱 강한 힘을 지닌 이들이었다.
하이드라와 같은 마신급 마수들이 곧 이곳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나는 길을 여는 역할일 뿐이다.”
가장 약한 마수들부터 최전방을 맡게 한다.
그것이 바로 위리놈의 방식이었다.
어차피 마수들의 번식력은 굉장히 뛰어나다.
특히나 하급과 최하급으로 갈수록 그들의 번식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오우거나 트롤은 그래도 중급 수준에 속하지만 외에 마수들은 그 아래 등급이었다.
때문에 본로말이 이끌고 온 군대는 다른 군대보다 그 수 자체를 달리했다.
“모두 진격하라.”
본로말의 명령에 십수 만의 마수들이 대거 뛰어들었다.
여러 게이트를 통해 바퀴벌레 떼처럼 나오는 마수들을 보며 긴장할 법도 하건만 투사들은 오히려 반대였다.
“크하하하! 끌어오르는구만!”
“나의 극의를 알 수 있는 진정한 기회가 찾아왔다!”
“과연 내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그것을 오늘 증명해낼 거다!”
“이런 미친놈들! 너희 같은 변태들과 함께라는 게 내 또 다른 즐거움이다!”
“웃지 마라! 투지 손실 온다!”
“적들을 죽이고 그 살점을 씹어먹겠다!”
투사들이 오히려 더욱 투지를 드러내며 앞으로 진격해갔다.
그들의 기세는 정령술사들도 한껏 고무되게 만들었다.
“크롸아아아!”
“캬아아오!”
“부에에에에에에―”
함께 전쟁을 치르려 소환된 정령들이 일제히 울음을 쏟아냈다.
마수들을 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정령들 또한 마찬가지.
인간이 아닌 마수를 상대하는 만큼 이번에는 상위 정령들도 인간들에게 협조적이었다.
자연을 파괴하고 생명을 무차별로 해하는 마수들은 세계의 공적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상황의 위기를 느낀 상위 정령들이 이번에 대거 소환에 응해주었다.
덕분에 깨달음의 경지를 높인 정령술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불을 다루는 샐러맨더들이 트롤에게 화염을 내뿜었다.
이어 중급 정령인 이프리트도 모습을 드러내 마수들을 공격했다.
그 속에서 땅의 정령과 물의 정령들도 모습을 드러내 마수들의 진격을 저지했다.
정령들과 마수들이 싸우는 모습도 장관이었지만 투사들과 마수들이 싸우는 광경이 정말로 대단했다.
실제로 이들의 전투를 탐색하러 온 웨스트 왕국의 기사들도 감탄을 토해내고 있었다.
“맨몸으로 싸우는 투사들이 저렇게나 강한 줄은 몰랐습니다…….”
“육체가 가장 강한 무기라고 믿는 자들이다.”
“극한으로 단련하면 무쇠도 뚫을 정도의 기운이 발산된다고 하더니… 마수들을 아주 곤죽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보이십니까?”
“굉장하구만… 왜 검제님께서 노스 왕국의 군사들을 데려오고 싶어하셨는지 쉽게 이해가 되는 장면이로군…….”
투사들은 십수 만의 마수들을 상대로도 아주 강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의 주먹에 마수들의 신체가 떨어져 나가고 피와 살점이 튀었다.
투사의 발이 마수의 머리를 걷어찼다.
그러자 마수의 머리가 힘없이 떨어져 나간다.
날카로운 이빨이 투사의 어깻죽지를 파고들었고 고통에 인상을 찌푸린 투사가 놈을 향해 팔을 뻗었다.
파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마수의 몸이 터져나갔다.
투사들은 서로에게 등을 맡기면서 눈앞의 적들을 서서히 밀어냈다.
마수들의 시체가 점점 쌓이고 그것을 밟다 넘어지는 자들도 하나둘 생겨났다.
특히나 트롤들의 피부는 미끄러워 조심하지 않으면 균형을 잃기가 쉬웠다.
그 틈을 노린 마수들이 개떼처럼 달려들기도 했다.
눈앞에서 살점을 뜯어먹는 마수들의 모습은 투사들을 더더욱 분노케 했다.
노스 왕국의 전사들은 죽어서 대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을 최고의 선물이라 여긴다.
대지의 여신에게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다음 생명을 위한 길이며, 자신들의 안식처라 말한다.
헌데 마수들은 저 더러운 이빨로 신성한 전사들의 시체를 뜯어먹고 있었다.
“감히!”
분노한 투사들이 투기를 발산하며 돌진했다.
결코 동료들의 시신을 욕되게 만들 수 없었다.
그들은 죽어 있는 동료들까지 지켜내며 마수들과 싸우고 또 싸웠다.
한편 본로말을 상대하던 이그트도 이제는 승부의 양상을 결정지었다.
처음부터 본로말은 이그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본로말이 약한 것이 아니고 성장한 이그트의 힘이 훨씬 강한 셈이었다.
그럼에도 이그트가 쉽사리 승부를 결정짓지 못했던 이유는 본로말의 능력 때문이었다.
놈은 몇 번이고 피부를 재생해 다시 회복하며 싸웠다.
그 끝이 어디인지 몰라 이그트는 계속해서 놈을 부수고 또 부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되었을까.
마침내 본로말의 몸이 회복되지 않기 시작했다.
이를 본 본로말도 이제는 삶을 포기하는 분위기였다.
“이곳 세계에 발을 들이자마자 이렇게 될 줄은 몰랐군…….”
본로말이 이그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만신창이인 자신과 다르게 이그트는 자잘한 상처밖에 없었다.
거기다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투기도 여전하다.
완벽한 패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쓰라리진 않는다.
“어차피 이제부터는 그분들의 무대일 테니.”
죽은 마수들의 시체에서 마기가 피어난다.
대기 중에 마기가 희박하면 마수들도 제약이 생긴다.
물론 마신급들은 그 제한이 덜하다.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진득한 마기의 덩어리라 말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개중에는 대기중의 마기에 영향을 받는 마신급도 존재했다.
“이제 모든 판은 다 깔아두었습니다. 그로드시여.”
하늘을 바라보던 본로말의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의 몸에 구멍을 낸 이는 다름 아닌 이그트였다.
“이제 그만 죽어라. 질긴 놈…….”
“크흐흐… 나는 시작을 알리는 자. 너희들의 종말은 이제부터일 것이다.”
피를 한움큼 뱉어낸 본로말의 눈이 회백색으로 물들었다.
녀석의 몸이 점점 딱딱해지더니 한쪽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상대가 생명이 다한 것을 확인한 이그트가 얼굴에 튄 피를 닦아내었다.
그리곤 주변부터 살폈다.
다행히 게이트를 건너온 마수들의 숫자는 대거 줄어 있었다.
십수 만의 마수들은 결국 투사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노스 왕국 군사들이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전투를 펼치는 마수 군단이니만큼, 예기치 못하게 부상을 입은 군사들도 더러 있었다.
“그래도 일단은 대승이다.”
이그트가 주먹을 꽉 쥔 오른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전장 전체를 울리는 우렁찬 함성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