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화 다섯 존재들
“지독하리만치 질긴 악연이로군.”
히스링이 눈앞에 보이는 마수들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스트 왕국 군사들이 마녀숲 근처로 오기도 전에 이미 마수들은 쏟아져나와 있었다.
던전 브레이크가 어디서 어떻게 일어났는지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며 눈앞의 마수들은 이스트 왕국 군사들에 의해 토벌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돌풍 기사단이 선두에 나서서 길을 열고 있습니다.”
“그 옆을 보조하는 창파 마법기사단과 여명 마법기사단도 순조롭게 나아가는 중입니다.”
“마수들의 숫자가 많긴 하지만 우리 군이 밀리진 않을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마법기사들이 보고를 해왔다.
히스링은 뒤편에서 적진을 살피며 전황을 끊임없이 살폈다.
뒤처지는 곳에 추가로 병력을 보내고 상성이 좋지 않은 쪽은 재빠른 명령으로 진형을 바꾸었다.
마수들의 숫자가 많긴 했지만 놈들은 그저 본능에 움직이는 녀석들일 뿐이다.
진형을 갖추고 효율적으로 전투를 치르는 이스트 왕국군을 넘어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군다나 이스트 왕국군은 그동안 갖은 고초를 겪으며 노련한 강군으로 자라 있었다.
특히나 이스트 왕국을 대표하는 마법기사단의 위용은 그 명성을 다 보여주는 듯했다.
“서둘러서 적진 깊숙한 곳까지 가야 한다.”
히스링의 말에 다른 단장들도 동의했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마수들을 저지하지 못한다면 결국 이곳 마수들의 수가 넘쳐 다른 전장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게 아니면 이스트 왕국 군사들의 부담이 더 커질 터다.
히스링 단장이 옆에 있던 알렌시아에게 명령을 내렸다.
“알렌시아 단장. 일섬 마법기사단을 데리고 당장 우회로로 진격하게.”
“알겠습니다.”
“그곳을 통해 선두의 칸 단장과 합류한 뒤 마수들을 에워싸 모두 섬멸하는 걸세.”
“네.”
명령을 받은 알렌시아가 곧바로 움직였다.
대기하고 있던 일섬 마법기사단이 알렌시아를 따라 움직였다.
테오도라가 히스링 곁에 붙었다.
“군단장님. 저 또한 가문의 군사들을 이끌고 나서겠습니다.”
“가주께서는 조금 기다려주십시오.”
“하지만 지금 이 기세로 몰아붙여 단번에 돌파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 말씀에는 동의하지만 벌써부터 가주의 군대가 움직이는 것은 좋지 않아 보입니다. 지금은 우리 마법기사단을 믿고 신뢰해주십시오.”
히스링의 태도는 단호했다.
때문에 테오도라도 더는 무어라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곳 전장을 책임지는 총 책임자는 어쨌거나 히스링이었다.
그가 신분 같은 걸로 어설프게 군단장의 자리에 오른 사람도 아니고 수많은 전장과 경험을 쌓고 군단장의 자리까지 올라선 사람이었다.
그러니만큼 테오도라도 히스링의 판단을 존중하고 물러난 것이다.
히스링의 눈동자는 쉬지 않았다.
전장을 빠르게 살피던 그가 뒤편에 있던 아그리나를 불렀다.
아그리나 단장이 히스링의 부름에 앞으로 나왔다.
“아그리나 단장. 높은 수준의 마수가 나타났다.”
아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히스링과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진득하고 강한 마기가 한쪽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할 수 있겠지?”
“물론.”
“부탁하겠네.”
“그럼 가보도록 하지.”
오랫동안 함께 전장을 누벼온 만큼 따로 많은 말들을 나눌 필요가 없었다.
이미 아그리나는 히스링의 눈빛만 봐도 그가 무엇을 원하고,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있었다.
진즉에 준비를 마친 아그리나가 들장미 마법기사단을 이끌고 서쪽으로 움직였다.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마기가 가까이 갈수록 더욱 진해졌다.
아그리나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마법기사들이 놈의 손에 당한 뒤였다.
“흐음…….”
분명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건만 피부는 나무처럼 주름지고 딱딱한 모습이었다.
거기다 손끝도 나뭇가지처럼 길었는데, 마수는 저 손끝을 인간들의 몸에 꽂고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별 같지도 않은…….”
아그리나가 당장 마력을 끌어올렸다.
후우웅!
콰과과강!!!
날카로운 채찍과 같은 마력이 날아가 나뭇가지들을 베어버렸다.
눈앞의 마수도 아그리나가 심상치 않은 실력자임을 알아보았다.
“나를 방해하지 말거라.”
마수의 전신에서 뻗어 나온 나뭇가지들이 바닥에 꽂혔다.
대지가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그 속에서 굵은 나뭇가지들이 튀어나왔다.
이를 본 아그리나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사방으로 휘둘러진 채찍들이 여기저기 뻗어 나가는 나뭇가지들을 베어버렸다.
“흐음.”
마수가 아그리나를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저 여자를 처치하지 않는 한, 원하는 대로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다 마수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오는군.”
자신과 함께 이곳을 맡은 마신급 마수.
그가 나타나자 대지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일순간 대기가 차가워지고 맨바닥에 얼음들이 솟구쳐 올라왔다.
“후우우우우우.”
기다란 털로 얼굴이 뒤덮인 거구가 게이트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를 본 히스링의 두 눈이 커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
거대한 설인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히스링을 내려다보았다.
“인간…….”
후우우우웅―――!!!
거대한 팔을 드는 것만으로도 차가운 바람이 상승한다.
설인이 거대한 팔로 대지를 내리찍었다.
콰드드드득―――!!!
대지에 얼음 송곳이 일어나며 주변 군사들을 꿰뚫었다.
“쿠워어어어!”
설인이 포효하자 얼음 서리가 강한 바람이 되어 쏟아져 나갔다.
드래곤의 브레스를 닮은 것 같아 보이지만 조금은 다르다.
쩌저적―――!!!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들이 그 자리에 얼어 붙어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동상이 된 동료들을 보며 마법기사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모두 비켜!”
어느새 설인 가까이로 온 테오도라가 불길을 일으켰다.
뜨거운 불길이 설인의 서리바람에 맞섰다.
뒤이어 히스링의 마법이 설인의 몸을 격했다.
쿠우웅!
몸이 뒤로 밀려나버릴만큼 강한 충격이었다.
설인의 시선이 히스링에게로 향했다.
“네놈. 아프다.”
설인이 손을 들어 히스링에게로 휘둘렀다.
그러자 수많은 얼음 조각들이 히스링을 덮쳤다.
차라라랑―――!!!
히스링이 마법으로 그것들을 모두 부숴버렸다.
바로 앞에 고고히 서 있는 히스링을 보며 설인이 웃었다.
이곳에서 처음 만난 강자였다.
저쪽, 불을 만들어내는 인간도 거슬렸지만 일단은 눈앞에 있는 녀석부터다.
“크아아아아!”
설인이 거칠게 포효하자 또다시 얼음서리가 대지를 덮었다.
뒤이어 설인의 주먹이 히스링을 노렸다.
얼음 폭풍이 몰아닥치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콰아아아아아―――!!!
엄청난 풍압과 함께 얼음서리가 빗발쳐 히스링의 피부에서 자잘한 상처가 생겼다.
마법으로 막아냈음에도 그것을 뚫고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나의 일격을 막아내는 거냐.”
설인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다시 한번 포효했다.
그러자 그의 뒤를 잇는 마수들이 대거 등장했다.
그들을 보며 마법기사들도 덩달아 긴장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마수들과는 무언가 사뭇 달랐다.
“나는 극한 지대를 다스리는 왕 닝고르. 내 앞에 모두가 무릎을 꿇을 것이다.”
설인이 자신을 소개하며 크게 외쳤다.
그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마수들이 대지를 박찼다.
마법기사들이 마법을 캐스팅해 이쪽으로 공격을 쏟아부었다.
설인만큼이나 두꺼운 털을 온몸에 두른 털북숭이들이 마법을 맨몸으로 받아냈다.
뒤이어 은빛 털의 늑대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인간들의 목을 물어뜯었다.
날카로운 발톱과 송곳니는 갑옷마저도 쉽게 꿰뚫어버리고 말았다.
“제기랄… 이래선 지난번 그때와 똑같질 않나!”
“어째서 마수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강한 거냐……!”
아직 수도를 습격했던 하이드라의 악몽을 모두 잊지 못했다.
갑자기 나타나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초거대 마수.
솔직히 말해 눈앞에 있는 닝고르도 하이드라를 떠올리게 할 만큼 강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녀석이 숨을 쉴 때마다 주변 대기가 얼어붙어 얼음이 떨어지는 것조차 솔직히 말해 기괴한 광경이었다.
그래도 지금 당장 닝고르는 히스링에 집중하고 있었다.
녀석은 자신에게 가장 위협적인 공격을 가해오는 히스링을 결코 가만두지 않았다.
놈의 공격이 히스링에게로 몰렸다.
얼음 폭격이 시작되고 폭풍이 몰아치며 히스링을 압박했다.
히스링은 마력으로 그것들을 방어해내며 설인의 공격을 곧잘 받아내고 있었다.
그런 히스링이 거슬렸는지 닝고르가 더더욱 공격의 강도를 높였다.
“크으음……!”
히스링도 점점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반격은커녕 놈의 공격을 피하고 막아내는 것도 서서히 벅찰 지경이었다.
나름대로 이스트 왕국 실력자라 칭송받고 있건만 닝고르 앞에서는 히스링도 역부족이었다.
“크윽… 그동안의 성장도 놈들 앞에서는 무의미해지는 것인가……!”
나름대로 그날 이후로 꾸준히 수련을 거듭하며 성장해왔다 생각했다.
하지만 수련의 성과는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닝고르가 히스링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하이드라가 네놈들 손에 죽은 거냐?”
하이드라의 이름이 나오자 히스링과 몇몇 단장들이 반응했다.
그들의 반응을 확인한 닝고르가 소름 끼치는 미소를 보였다.
녀석의 황동빛 눈동자가 반달 모양으로 줄어들었다.
“크흐흐. 늪지의 작은 왕을 죽였다고 기고만장해하지 말거라. 이 몸은 위리놈 황제께서도 인정한 다섯 존재 중 하나니까.”
닝고르가 큼지막한 두 주먹을 하늘 높이 번쩍 들어 올렸다.
이내 녀석이 두 주먹을 강하게 내리치자 대지가 격변하고 있었다.
지형마저 바꾸려 드는 닝고르의 강함에 히스링은 물론 다른 단장들도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단장… 우리가 저 괴물을 이길 수는 있는 겁니까?”
“쉽게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저런 괴물놈을 죽이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이건… 말이 안됩니다. 그야말로 재앙 아닙니까?”
마수 세계의 절대 지배자 위리놈.
그가 인정한 다섯 존재 중 하나 닝고르의 힘은 너무나 막강했다.
심지어 닝고르를 따르는 수많은 마수들도 만만치 않은 존재들이었다.
결국 히스링에 이어 테오도라, 칸까지 전투에 합류했다.
그럼에도 닝고르는 전혀 밀리지 않고 세 사람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칼바람이 몸을 베고 뜨거운 불길이 치솟아도 닝고르는 우직하게 나아가며 그들을 공격했다.
“……!”
닝고르를 상대하는데 특히나 힘겨워했던 것은 바로 테오도라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닝고르의 주변은 마력으로 불길을 일으키기가 어려웠다.
이 때문에 그는 불길로 닝고르의 공격을 방어해주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동안 칸과 히스링이 닝고르를 공격했다.
그러나 어찌나 단단한 맷집을 지녔는지 닝고르는 꿈쩍도 하질 않고 있었다.
“제기랄…….”
“놈에게도 분명 약점은 있을 것이다.”
칸과 히스링이 끊임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만약 닝고르가 어딘가를 방어하려 들거나 조금이라도 다른 반응을 보이는 곳이 있다면 그 부분을 공략할 생각이었다.
그때 닝고르의 위로 암운(暗雲)이 생겨났다.
“저건…….”
그것을 먼저 알아본 칸이 양옆을 살폈다.
역시나 알렌시아가 한쪽에서 마력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알렌시아는 전격 마법을 사용하는 마도사였다.
거기다 그녀의 마법은 이중에서 손꼽히는 위력을 자랑하는 수준이었다.
“제가 시선을 끌겠습니다.”
혹시나 놈이 눈치를 챌까 싶어 칸이 더욱 요란하게 마법을 사용했다.
여기저기 칼바람이 몰아치고 소용돌이 치는 바람들이 닝고르를 괴롭혔다.
콰아앙!!!
커다란 박수로 그것들을 모두 파훼시켜버린 닝고르가 크게 소리쳤다.
“이런 하찮은 수로는 이몸을 쓰러트리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 암운에서 전격이 떨어지며 닝고르를 내리찍었다.
콰르르르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