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닝고르의 최후 (1)
닝고르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거대한 설인이 단순히 멈추었을 뿐인데 순간 적막이 감돌 정도였다.
이는 그만큼이나 닝고르가 이 전장을 주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법기사들이 숨을 죽이고 닝고르를 지켜보았다.
전쟁에서 적장이 쓰러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기 있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닝고르의 상태를 지켜본 것이다.
이는 마수들도 마찬가지.
녀석들 또한 본능적으로 닝고르의 상태부터 살폈다.
슈와아아아!
닝고르의 주변에서 한파가 몰아닥쳤다.
차가운 한기에 기사들의 표정이 잔뜩 굳었다.
초점이 없던 닝고르의 눈동자가 돌아왔다.
후우우웅!
놈이 두 팔을 번쩍 치켜올렸다.
“놈을 막아라!”
“피해!”
날카로운 외침이 들림과 동시에 닝고르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녀석이 땅을 내리찍자 대지의 파편이 날아가 인간들을 공격했다.
뒤이어 닝고르가 시선을 돌렸다.
그가 찾는 것은 자신에게 전격 마법을 날린 인간이었다.
“가만두지 않겠다.”
뒷목이 저릿해질 정도로 묵직한 충격이었다.
분노한 닝고르의 시선이 결국 알렌시아에게로 향했다.
슈콰아아아아앙―――!!!
퍼버버벙!!!
뒤를 이은 인간들의 공격이 닝고르를 타격했다.
하지만 닝고르는 가장 먼저 알렌시아를 노리는데 주력했다.
조금 전 공격으로 미루어 보아 저 인간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무기이기도 했다.
그러니 결코 가만히 공격을 가할 수 있도록 둘 수 없었다.
“저쪽을 노려라.”
닝고르의 명령에 마수들이 방향을 틀었다.
커다란 몽둥이를 든 털북숭이 괴물들이 앞장섰다.
놈들은 날아오는 마법들을 몽둥이로 쳐냈다.
뒤이어 몸을 일으킨 불길이 놈들을 휘감았다.
“쿠와아아아!”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놈들은 멈추지 않았다.
“단장님을 지켜라!”
“놈들이 단장님을 노린다!”
마수들의 방향을 읽은 일섬 마법기사단이 발 빠르게 대응했다.
동시다발적으로 날아간 마법들이 털북숭이 마수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쿠와아아아!”
크게 포효한 털복숭이 괴물이 가장 먼저 앞에 있는 마법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이 몸을 한껏 펴니 숨겨져 있던 탄탄한 근육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것이 털북숭이 마수와 마주한 마법기사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가까이 오니 털복숭이 마수들도 2미터는 넘을 정도의 크기를 자랑했다.
놈들은 두껍고도 단단한 몽둥이로 마법기사들의 머리를 후려쳤다.
수박이 깨지듯 부서지는 동료들의 머리를 보며 마법기사들의 얼굴이 자연스레 사색으로 물들었다.
마법에 당하면 움츠러드는 기색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녀석들은 두려움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마냥 계속해서 달려들기만 했다.
뭉둥이가 움직일 때마다 둔탁한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인간들의 한 가운데에서 털북숭이 마수들은 마법기사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뭣들하고 있는 거냐!? 정신 차려라! 놈들이 마음껏 활개치도록 두지 마!”
제법 경험이 많아 노련함을 갖고 있는 선임 마법기사들이 소리쳤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마법기사들이 놈들을 향해 공격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들은 온전히 눈앞의 마수들에게만 집중할 수 없었다.
하늘 위로 불어닥친 서리바람이 그들을 괴롭혔다.
닝고르의 공격이 다시금 시작된 것이다.
초대형 마수가 날뛰기 시작하니 세상이 격변하는 것마냥 착각이 들었다.
쿠와아아앙―――!!!
콰과과광! 콰르르릉!!!
닝고르는 자신의 분노를 대변하듯 계속해서 인간들을 공격했다.
얼음 서리를 막기 위해 베리어라도 두르면 여지없이 닝고르의 주먹이 날아왔다.
묵직한 충격과 함께 베리어가 깨져버리면 하늘 위에 도사리고 있던 얼음 파편들이 이곳으로 떨어졌다.
투두두두둑!!! 쩌저정!!!
촤라락!!!
날카로운 얼음 파편들이 인간들의 몸에 그대로 박혔다.
투명하던 얼음들 위로 핏물이 튀고 또 튀어 붉게 물들어갔다.
히스링과 칸 뒤늦게 합류한 다른 마법기사단장들이 닝고르를 향해 합격을 펼쳤다.
거대한 암석이 날아와 닝고르의 두 다리를 공격했고, 파도처럼 밀려든 마력이 닝고르를 덮쳤다.
뒤이어 거대한 검들이 닝고르의 몸에 박히는 듯 보였다.
“후와아아아아아!”
닝고르는 금세 포효를 터트리며 날아오는 마법들에 대항했다.
그러나 단장급들의 마법은 확실히 달랐다.
닝고르의 피부 여기저기 상처가 생기기 시작하고 놈도 핏물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털복숭이 마수들에 이어 새로운 마수들이 또다시 게이트 밖으로 빠져나왔다.
강한 한기를 내뿜는, 긴 생머리에 여인의 몸을 한 마수들이 거울을 들고 마법기사들 앞에 섰다.
그들의 거울을 본 인간들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버리고 말았다.
마수들은 사이한 웃음을 터트리며 인간들의 사이로 걸어 나갔다.
거기다 나뭇가지처럼 생긴 수정을 이마에 박은 마수들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쳐버리겠군! 대체 얼마나 더 많은 마수들이 저 안에 있는 거냐!?”
“말도 안 되는… 이건 그냥 재앙이 아닌가.”
“저 커다란 괴물 자식도 지금 단장님들의 마법을 몇 번이나 견디는 건지 모르겠어…….”
“아아…….”
전장에 암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호기로운 기세를 보이던 마법기사들의 얼굴에도 서서히 좌절과 절망이 밀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도록 튀어나오는 마수들의 존재가 이들을 허탈하게 만들고 있었다.
거기다 홀로 단장들을 상대하는 저 초대형 마수는 도무지 쓰러질 생각을 안 했다.
“포기하지마라!”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다!”
“우리는 이길 수 있다! 그러니 좌절하지 말라!”
그런 분위기를 읽어낸 단장들이 돌연 크게 외쳐댔다.
그들이 사기를 북돋아 올리자 다시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아주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사기가 오른 군사들이 마수들을 상대로 분투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문제는 저놈인데…….”
사실 상황이 나아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대로 가면 오히려 이스트 왕국 군사들이 서서히 밀려날 판이다.
벌써 수많은 기사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대지를 뒹굴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수들은 끊임없이 게이트를 통해 쏟아져나온다.
“일단은 저놈이라도 먼저 죽여야 전쟁의 실마리가 보이겠군.”
“맞습니다. 일단은 저 괴물부터입니다.”
칸과 히스링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엔달라프 단장의 팔이 저만치 날아갔다.
닝고르의 공격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크으으윽!”
팔 한쪽을 잃은 엔달라프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끔찍한 고통에 이어 서리조각들이 몸을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바로 치유하겠습니다!”
뒤편에 있던 치유 마도사가 달려와 소리쳤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엔달라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가까스로 유지되던 균형이었는데 역시나 자신이 빠지다 보니 전력에 공백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비켜라… 나는…….”
엔달라프가 다시 몸을 일으켜 마법을 시전하려는 때, 닝고르의 주먹이 창파울로의 앞까지 치달았다.
“크아아아!”
창파울로가 마법을 일으켜 놈의 공격을 막아냈다.
거대한 벽을 몇 겹이나 쌓았건만 닝고르의 공격은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파고들었다.
콰르르릉―――!!!
결국 커다란 주먹이 창파울로를 때렸다.
엄청난 충격이 창파울로 단장을 그 자리에서 튕겨내버렸다.
종잇장처럼 날아간 창파울로가 허공에서 몇 바퀴나 돌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광경을 본 마법기사들도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핏물이 대지를 흥건하게 적셨다.
경련을 일으키던 창파울로의 주먹이 서서히 펴졌다.
“단장님!”
“창파울로!”
“창파울로님!”
여기저기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재빠르게 달려온 무그레날로가 이를 악물었다.
온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창파울로는 더이상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으아아아!”
무그레날로가 포효하듯 소리쳤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기만 할 뿐이다.
싸늘한 주검이 된 창파울로 앞에서 무그레날로가 닭똥 같은 눈물을 훔쳤다.
“너를 잊지 않겠다.”
그가 창파울로의 허리춤에 있던 작은 주머니를 뜯어냈다.
주머니엔 행운의 부적이라며 갖고 다니던 단안경이 들어 있었다.
단안경은 깨져 있었다.
무그레날로가 이 단안경을 품속에 넣었다.
슈와아아아아―――!!!
“무그레날로 단장님!”
“위험합니다!”
“피하십시오!”
닝고르는 슬퍼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놈은 곧바로 공격을 이어갔다.
창파울로도, 무그레날로도 결국 닝고르에겐 죽여야 할 인간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때문에 놈은 인간들을 죽이는데 충실했다.
“죽여버리겠다!”
분노한 무그레날로가 총력을 다해 공격을 퍼부었다.
무그레날로와 창파울로 단장이 친밀했던 사이임을 마법기사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분노를 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무그레날로가 만들어낸 어둠의 칼날이 닝고르의 몸 여기저기를 베고 지나갔다.
순간 각성이라도 한 것인지 작은 상처밖에 내지 못하던 무그레날로의 공격이 생각보다 커다란 상처를 내고 있었다.
놀란 닝고르가 무그레날로를 확실하게 죽이려 들었다.
그러나 이를 가만히 두고 볼 히스링과 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나서며 닝고르를 막았다.
콰과과곽! 휘우웅―――!!!
눈앞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마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검이 닝고르의 등을 베어버렸다.
닝고르가 비명을 토해내며 분노했다.
놈이 날뛰기 시작하자 또다시 얼음송곳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상황이 더욱 힘들어지려는 때 허공에 작은 게이트가 열렸다.
이를 본 히스링이 두 눈을 부릅떴다.
“큰일이로군…….”
작은 게이트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은 적어도 저 눈앞에 있는 초대형 마수급이었다.
여기서 저런 마수가 한 마리라도 더 튀어나왔다간 정말로 낭패였다.
이곳에서 모두 전멸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히스링뿐만 아니라 칸도 공간의 균열을 알아차렸다.
“제길……!”
이번에는 대체 어떤 마수가 튀어나올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때 게이트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기다란 장발이 굉장히 눈에 띄었다.
새하얀 검을 들고 있던 사내가 곧바로 닝고르 쪽으로 몸을 날렸다.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며 닝고르가 처음으로 표정에 변화를 보였다.
“네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거냐!”
닝고르가 두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후우우웅―――!!!
놈의 커다란 주먹이 사내를 노렸다.
그러자 사내가 대지를 박차며 검을 휘둘렀다.
새하얀 빛이었다.
검신에서 만들어지는 새하얀 빛이 반월 모양으로 감기기 시작했다.
촤라라라라락!
달빛을 머금은 검이 닝고르의 팔을 깊게 베고 지나갔다.
이를 본 많은 마법기사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나 칸은 사내가 선보이는 위력적인 검술에 눈가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저게 무슨…….”
“일단은 저 괴물과 싸우는 것을 보니 당장 우리들과 싸울 일은 없어 보여.”
“갑자기 나타났는데 대체 누구일까요?”
“혹시나 적은 아닐지…….”
단장들이 한마디씩 하는데 히스링과 아그리나는 전혀 다른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아그리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맞나?”
“나도 믿을 수가 없군…….”
“저 녀석… 언제 저렇게…….”
“…….”
히스링과 아그리나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내의 전투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