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화 닝고르의 최후 (2)
닝고르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 있는 인간들을 상대하는 데엔 솔직히 말해 문제될 것이 전혀 없었다.
제법 성가신 녀석들이 있긴 했지만 자신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는 존재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천천히, 그리고 완전하게 밀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 선두에 자신이 있는 한 인간들은 무조건 몰살시킬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 모든 것이 뒤바뀌고 있었다.
우습게도 겨우 단 하나의 인간 때문에 말이다.
“네놈은 죽었어야 했다! 어째서 살아 있는 것이냐 인간!”
격노한 닝고르가 연신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커다란 상처들뿐이었다.
인간은 닝고르의 공격을 피해내며 수려한 검술을 선보였다.
검로가 빛을 발할 때마다 같은 선상에 핏물이 튀었다.
닝고르의 팔에 순식간에 수십 개의 상처가 생겨난 것은 이 전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단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거지……?”
모두가 놀라움을 토해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러 단장이 힘을 합쳐야 겨우 상대가 가능했던 닝고르를 저 사내는 단신의 몸으로 상대해내고 있었다.
거기다 오히려 조급해 보이는 것은 닝고르였다.
“크아아아아!”
쿵쾅! 쿠구과아아아아아아앙!!!
닝고르가 대지를 여러 차례 내리찍었다.
조금이라도 사내의 움직임을 방해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변하는 지형지물마저 마치 원래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이용했다.
심지어 그의 검은 계속해서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빛은 때로는 스며들듯, 적을 감싸든 듯 다가가다가도 순식간에 내리치며 닝고르를 공격했다.
“후우우웁…….”
사내가 호흡을 길게 내뱉었다.
뒤이어 그의 주변으로 환한 아우라가 비치기 시작했다.
대기를 요동치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기운이었다.
이를 보며 히스링의 눈빛이 침잠해졌다.
“대체 무슨 삶을 살아온 거냐 유미르…….”
과거 그가 알고 있던 유미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조금은 여려 보이기도 하고 지켜주고 싶은 이미지였던 유미르가 지금은 거친 야생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부드러운 인상에 잔잔한 느낌을 주었던 외모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에 훨씬 더 터프하고 와일드한 느낌이었다.
이를 보고 놀란 것은 아그리나 역시도 마찬가지.
“그보다 유미르의 힘이 원래 저 정도였나?”
“검을 다루는 것도 놀라운데 저 괴물을 혼자 상대할 정도의 힘이라니…….”
유미르의 검에 닝고르가 처음으로 낮은 자세를 취하며 방어에 전념했다.
지금까지 어지간한 공격들은 몸으로 받아내던 녀석의 태도와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오만함에 가득 차 있던 녀석의 눈에 처음으로 긴장이라는 단어가 생겨난 듯 보였다.
놈은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유미르를 쫓았다.
“위리놈님께서 분명 네놈을 죽인 줄 알았건만…….”
“아아… 그때는 정말 지독하리만치 아팠다.”
콰드드드등―――!!!
유미르의 검이 닝고르의 등을 수직으로 베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고통에 닝고르가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돌아보았다.
어느새 유미르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그래서 어떻게 복수해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 뭐냐.”
유미르의 목소리는 닝고르의 다리 근처에서 들렸다.
그가 검을 휘둘러 닝고르의 발목을 베어버리고자 했다.
그러나 닝고르 또한 하나의 지역을 지배하는 왕이었다.
그런 그가 쉽게 당해줄 리 없었다.
새하얗게 솟아난 얼음덩어리들이 유미르의 검을 막아냈다.
뒤이어 강한 서리바람이 유미르를 밀어내려 들었다.
하지만 유미르는 그 자리에 발을 딛고 검을 들어 올렸다.
“흐아아아아아압!”
강한 기합성을 터트린 유미르가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달빛을 머금은 검이 닝고르의 발목을 베는 듯 보였다.
그러나 얼음장처럼 차가운 닝고르의 몸이 검신을 붙잡으려 들었다.
아마 다른 이들이었다면 이런 상황에 적잖이 당황했을 터다.
하지만 유미르는 이미 닝고르를 한 번 상대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검끝을 돌려버렸다.
“크아아아!”
유미르의 전신에서 엄청난 기운이 폭발하듯 나왔다.
커다란 두 주먹이 유미르의 위로 나타난 것도 그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쿠우웅!!!
결국 포기하고 검을 빼려던 유미르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를 향해 뻗어오던 두 주먹은 방향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유미르가 검을 더욱 밀어 넣었다.
핏물이 사방으로 튀고 닝고르가 결국 먼저 발을 빼냈다.
쩌저정!
어떻게 된 몸인지 닝고르의 발목 잘려나간 부위에 얼음이 이어 붙으며 빈자리를 대신했다.
뒤로 물러난 유미르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괜찮나?”
“호오! 히스링인가!?”
“그래. 오랜만이로구나 유미르.”
유미르가 히스링을 돌아보았다.
사실 유미르는 이전에 그를 본 적이 있다.
먼발치서 잠깐 봤기에 그는 아마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유미르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못 보던 사이에 많이 늙었네?”
“뭐!? 이런…….”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것 봐. 그렇게 자기 관리를 못하니까 아레나가 날 선택한 거야.”
“…알고 있었던 거냐?”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하지.”
유미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러자 히스링이 피식 웃었다.
“그러는 네놈도 많이 바뀌었다.”
히스링의 말에 유미르가 자신의 팔을 들어 알통을 만들어 보였다.
“어때? 좀 남자다워지지 않았나?”
“그나마 귀여운 구석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도 사라진 기분이다.”
“아하하하!! 이 나이에 귀여움과는 당연히 거리가 멀어졌지.”
콰아아앙―――!!!
히스링과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유미르는 닝고르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는 검으로 닝고르의 일격을 막아내며 다시 몸을 돌렸다.
“오랜만에 친우를 만나 무척이나 반갑긴 하지만… 일단은 이 자식부터 처리하고 해후를 풀던가 해야 하지 않겠나!?”
“동감이다.”
“어디 그럼 네 실력도 구경해보자!”
한껏 크게 소리친 유미르가 빠르게 움직였다.
쏜살같이 움직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히스링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자기 실력을 구경해보겠다는 말은 결국 자신을 보조해달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전에 자신이 유미르에게 자주 써먹던 말이기도 했다.
“옛날 생각이 나긴 하는군.”
히스링이 마력으로 수많은 무기들을 형성해냈다.
검과 창이 닝고르의 두 팔을 방해하고 방패가 날아오는 얼음 덩어리들을 막아냈다.
“휘유!”
히스링이 얼마나 굉장한 실력자인지는 유미르도 잘 알고 있다.
그의 라이벌이라고 하면 단연 히스링을 뽑았을 정도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전투에 대한 타고난 감각이 있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으면서도 늘 자신의 성장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인물이 바로 히스링이었다.
철저한 자기 관리를 바탕으로 성장해왔던 히스링이었던 만큼 지금까지도 그래왔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유미르가 이렇게 검을 쓰며 싸우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일 텐데도 그는 유미르가 움직이기 좋도록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거기다 마법을 다루는 컨트롤 능력이나 적재적소에 필요한 마법을 사용하는 디테일이 과거보다 훨씬 더 노련해져 있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은 유미르가 마음껏 검술을 펼쳤다.
지금까지는 수려하고 아름다운 빛을 담았다면, 이제부터는 조금 다를 것이다.
유미르의 분위기가 한층 바뀌고 그의 검이 격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빠르고 강렬한 일격이었다.
마치 폭우가 쏟아지듯 내려치는 빛줄기들을 보며 지켜보던 단장들마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 빛줄기는 모두 닝고르의 몸을 격하고 있었다.
닝고르가 고통의 포효를 울부짖었다.
그가 다시금 박수를 이용해 유미르의 검술을 파훼하려 들었다.
그러나 같은 수에 두 번씩이나 당해주진 않는다.
눈치 빠른 칸이 바람 마법을 이용해 두 손바닥 사이에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닝고르가 사용하는 마기가 한데 뭉치려다 흩어지고 말았다.
“크워어어!”
분노한 닝고르가 칸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칸이 문제가 아니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유미르가 검을 휘둘렀다.
콰과과과광―――!!!
검 끝에 넘실거리는 달빛이 닝고르의 가슴을 깊게 베고 지나갔다.
그 광경을 보며 여기저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길 수 있다.
이 문장이 그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유미르 한 명이 등장했을 뿐인데 전장의 분위기는 크게 바뀌고 있었다.
저 압도적인 강함을 보였던 닝고르를 오히려 유미르가 몰아붙이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쿠와아아! 나를 지켜라!”
닝고르가 주변 마수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마수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닝고르를 노리는 인간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저분을 지켜라!”
“모두 뭣들 하는 거냐! 움직여라!”
“여기서 승기를 잡아야 한다!”
마법기사단이 유미르의 전투를 돕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의 마법이 마수들을 막았다.
제아무리 유미르가 강하다 한들 수천, 수만 마리의 마수들을 혼자 감당해낼 수 없다.
더군다나 유미르는 닝고르가 무엇을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지난번 전투에서도 닝고르는 저런 방식으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했다.
쩌저저저저정―――!!!
역시나 대지가 얼어붙기 시작하고 닝고르의 몸을 새하얀 얼음이 감싸려 들었다.
저 얼음 안에 갇히면 닝고르도 못 움직이지만 바깥쪽의 상대도 이 견고한 얼음을 뚫을 수 없었다.
그 사이 닝고르는 자신의 상처를 모두 회복하고 주변 마수들을 이용해 마기마저 충당한다.
그렇게 되면 애써 여기까지 몰아붙인 게 허사가 되는 수준.
절대로 그렇게 둘 수 없었다.
유미르가 검을 들고 대지를 박찼다.
파바바방!!!
빛과도 같은 그의 질주는 그 어떤 마수도 감히 막아낼 수 없었다.
유미르의 시선이 닝고르에게로 고정되었다.
그가 검을 수직으로 올려쳤다.
반달 모양의 영기가 닝고르를 격했다.
쿠와아앙―――!!!
강한 폭음이 울려퍼졌다.
하지만 얼음을 깨부수기엔 역부족이다.
놈이 유미르를 보고 있다.
콰아아아앙!!!
유미르의 일격이 이어졌다.
그러자 그의 앞을 가로막은 얼음 방패가 검격을 가로막았다.
얼음 방패 뒤에 있는 닝고르가 웃는다.
마치 자신을 막을 수 있으면 막아보라는 듯.
유미르의 안광이 한순간 뿜어졌다.
검을 번쩍 들어 올리자 하늘 위로 강한 빛을 머금은 보름달이 완성되었다.
둥근 달이 빛줄기를 내뿜으며 닝고르에게로 내려앉았다.
닝고르를 감싼 얼음벽이 보름달과 부딪혔다.
쿠르르르르르릉―――!!!
콰과과과과과과강!!!
쩌저저적!
얼음이 깨지고 그것이 다시 복구되기를 반복했다.
“크아아아압!”
유미르가 일갈을 터트리며 검에 힘을 쥐었다.
타아앙!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지나치게 강한 충격을 견디지 못한 그의 검이 튕겨져나가버린 것이다.
잘려나간 검신을 보며 유미르가 두 눈을 부릅떴다.
보름달의 크기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막강한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검의 남은 부분에도 점차 균열이 일었다.
“이런…….”
낭패한 기색이 역력해질 때 히스링이 크게 소리쳤다.
“검이라면 하나 더 있다 유미르.”
히스링이 마력을 끌어올리자 유미르의 눈앞에 커다란 검이 등장했다.
히스링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검이었다.
다른 것 따윈 생각하지 않았다.
유미르가 그것을 곧바로 쥐어 잡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마력의 감각이었다.
두 손으로 검을 잡은 유미르가 힘껏 일격을 내질렀다.
콰드드드등! 쩌저정―――!!!
결국 닝고르를 보호하던 얼음이 완전히 깨져버리고 말았다.
당황한 닝고르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유미르가 그 앞에 서서 검을 들어 올렸다.
“끝이다.”
슈콰아아아아아앙!!!
유미르가 검을 내리쳤다.
히스링의 마력이 사방에 빗발쳤다.
붉은 피가 튀어 오르고 닝고르의 목에 커다란 선이 생겨났다.
스르륵―
쿠우웅!
닝고르의 얼굴이 몸과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초점을 완전히 잃은 녀석의 얼굴이 바닥을 뒹굴었다.
검을 놓은 유미르가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두 손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세상이 떠나갈 듯 우렁찬 함성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