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그들의 분노
치유 마도사들이 달라붙어서 루시진을 치료하는 동안 아시테르 군영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하야트의 전사, 그리고 다른 군사들의 전멸.
그것도 하루도 안 되어 벌어진 일이었다.
“대체 얼마나 세다는 거야?”
“하야트님과 루시진님이 당할 정도라는 건가…….”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데…….”
“흐음…….”
앉아 있는 지휘관들의 표정도 덩달아 좋지 않았다.
하야트가 전사하고 루시진이 처참한 몰골로 돌아온 것은 정말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아시테르는 아군의 사기를 위해 이 소식을 애써 묻었다.
로얄나이츠가 두 명이나 당했다는 소식이 멀리 퍼지기라도 하면 분명 병사들의 사기에도 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발 빠르게 대처한 것이다.
카이드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로얄나이츠 둘로는 길을 열 수준도 안 된다는 건가?”
“머리에 뿔이 돋아나 있는 마수라면… 마수들의 왕일 거다.”
“그걸 대장이 어떻게 알아?”
“과거 아버지께서 알려주셨다.”
꿈이라는 단어만 뺐다.
하지만 아시테르는 분명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알려주기 위해 그 장면을 보여준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자신과 계약한 수호신일 수도 있다.
뭐가 어찌 되었건 위리놈의 존재는 아시테르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놈이 벌써부터 이렇게 나설 줄은 예상치 못했다.
“어쩌면 놈도 나의 존재를 눈치챈 걸까…….”
위리놈은 루시진을 일부러 살려 보냈을지 모른다.
이쪽에 보내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였다.
자신의 영역에 발을 들이려면 조금 더 확실하게, 완전하게 준비를 갖추고 오라고.
혹은 도발일 수도 있다.
“이렇게 갚아주는 건가.”
놈도 이곳에서 많은 수하를 잃었다.
개중에는 아끼는 수하가 있을 수 있다.
아니, 사실 그렇게 생각을 할지도 의문이긴 했다.
마수들 사이에 그런 생각들이 오갈 거란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장기말을 함부로 훼손시켰다는 쪽으로 생각하는 게 더 일리가 있었다.
“마수들의 왕이 저곳에 있다는 말이로군요.”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르노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하야트는 카일라이드와 함께 오랫동안 르노어와 함께 지내온 막역한 친우였다.
사실 이번에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한 것도 르노어였다.
‘자네 말이 맞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야말로 기사의 최고 명예 아니겠나.’
하야트가 르노어와 함께 로얄나이츠로 돌아오던 때 했던 말이었다.
그는 본인이 말해오던 최고의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르노어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검제님.”
“말씀하십시오 르노어님.”
“제게 친우의 시체를 수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르노어의 말에 카일라이드가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그 말은 결국 르노어가 군사들을 이끌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아시테르도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기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시에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의 오랜 친구가 마수들의 땅에 홀로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르노어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다.
높낮이가 없으니 더더욱 차갑고 메말라 있는 것처럼 들렸다.
무서울 정도의 감정 컨트롤이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분노하고 있을 것임에도, 자신의 감정을 함부로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잔잔한 호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시테르는 알고 있다.
저 잔잔한 호수에 누군가 작은 조약돌 하나를 던지기만 해도 커다란 파문이 일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물결은 금방 몸집을 불려 커다란 파도로 불어날 것이다.
종국에는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는 해일로도 변할 터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아시테르는 선뜻 허락할 수 없었다.
르노어는 너무나 소중한 전력이었다.
그와 카일라이드가 이곳에 있어야 아시테르도 안심하고 언노운 기사단과 함께 안으로 진입할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르노어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가 목숨을 잃기라도 하면 그것만큼이나 커다란 손해는 없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르노어의 눈빛은 결연했다.
아시테르의 고민이 길어지는 듯 하자 르노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마음이신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약속드리겠습니다.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 아닌, 친우를 데리고 오는 것이니… 무리하지 않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그곳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니… 그러나 그냥 보낼 순 없고 카이드와 함께 가십시오.”
아시테르가 카이드를 바라보았다.
은근하게 바라고 있던 카이드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무서운 영감쟁이는 내가 지켜주도록 하지.”
“그럼 저도 함께 가도 괜찮겠습니까, 검제님.”
르노어의 옆에 있던 카일라이드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가 나선 것은 정말로 의외였기에 아시테르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감정적으로 굴어서 죄송합니다만 저도 르노어를 혼자 보낼 순 없을 것 같습니다. 함께 친우를 데리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카일라이드의 말에 다른 로얄나이츠들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하야트와 카일라이드, 루시진, 르노어 이 네 사람의 우정은 그들 또한 잘 알고 있다.
거기다 르노어와 카일라이드는 평소 이렇게 나서는 인물들도 아니었다.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르노어님과 카일라이드님이 함께 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두 분은 오래전부터 영혼의 단짝이셨으니… 이번에도 함께 가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이곳은 저희들이 더 열심히 지키겠습니다. 검제님.”
로얄나이츠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바람에 상황이 이상해지긴 했지만, 애초에 아시테르도 카일라이드에게 르노어와 함께 가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카일라이드가 먼저 함께 가겠다 말했으니 오히려 좋은 셈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아주 제대로 된 선봉대를 꾸리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아시테르가 바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아직은 그럴 수 없었다.
당장 이곳 전장에서도 그가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았다.
거기다 아시테르가 곧장 들어가겠다고 말한들 로얄나이츠들이 순순히 허락할 리 없었다.
그러니 일단은 동료들을 믿는 수밖에 없다.
“그럼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고 오늘은 이만 휴식을 취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아시테르가 짧게 말을 마쳤다.
그가 먼저 일어나고 로얄나이츠와 언노운 기사단이 함께 일어섰다.
먼발치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헬라이번도 생각이 많아진 눈치였다.
“마수들의 힘이 그 정도였나…….”
첼룬 왕국군과 함께 벌써 한 개의 군단을 멋지게 물리친 헬라이번이건만, 마냥 기뻐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휴식을 취하자는 말이 무색하리만치 게이트는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했고, 새로운 마수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웨스트 왕국군은 이것을 두 번째 물결이라고 표현했다.
첫 번째 물결이 망자들의 군단이었다면 두 번째 물결은 그야말로 괴수종들이었다.
특이하게 생긴 괴물들이 게이트 밖으로 대거 튀어나왔다.
놈들을 이끌고 있는 마수 또한 생김새가 특이했다.
머리는 드래곤과 닮아 있었고 꼬리 끝에는 바실리스크의 머리가 달려 있었다.
몸체는 인간과 비슷하면서도 온몸엔 단단한 비늘이 자리해 있었다.
등 뒤로 뻗어난 두 개의 뿔에선 각각 불길과 전격을 쏟아내고 있었다.
템페리에스가 붉은 두 눈동자로 인간들을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니 그 안에 마기가 뭉치기 시작했다.
“피해라!”
“놈이 공격을 시작한다!”
템페리에스의 아가리에서 광선처럼 마기가 뻗어 나왔다.
이어 놈은 단단하고 강한 발톱으로 주변 인간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두 개의 뿔에서 나가는 불길과 전격이 마도사들을 공격했다.
“크와아아아아아아!”
놈이 커다란 포효를 터트렸다.
그때 템페리에스를 향해 걸어가는 이가 있었다.
검을 든 사내는 템페리에스가 있는 지척에 이르렀다.
눈앞에 있는 가소로운 인간을 향해 템페리에스가 곧바로 마기를 쏴버렸다.
콰아아앙!!!
그러나 인간은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마기를 튕겨내버렸다.
뒤이어 그의 검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템페리에스는 그 검을 막기 위해 발톱을 휘둘렀다.
헌데 무언가 이상하다.
검과 발톱이 부딪히면 커다란 소리가 나야 한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떤 느낌도 없다.
이에 템페리에스가 의아함을 느끼는 순간, 그의 발톱이 순식간에 잘려나갔다.
“콰아아아!”
분노한 템페리에스가 곧바로 인간을 쫓았다.
어느새 가까이에 온 인간이 검을 휘둘렀다.
마력이 물결치듯 템페리에스의 몸을 거슬러 올라갔다.
푸른 빛이 발하는 순간 단단한 템페리에스의 비늘이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았다.
놀란 템페리에스가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눈앞의 인간은 무감정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상대하면서도 저런 눈빛을 보이는 자는 태어나 처음이었다.
결코 참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괴수종들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템페리에스였다.
위리놈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괴수종의 왕으로서 이럴 때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야만 했다.
템페리에스가 두 눈을 빛내며 마기를 끌어올렸다.
그러나 한발 먼저 파고든 르노어가 검을 휘둘렀다.
부드러운 선이 생겨나고 템페리에스의 가슴팍에 커다란 상처가 생겼다.
핏물이 사방으로 튀고 르노어가 다시 검을 올려쳤다.
파콰아앙!!!
오러 블레이드가 빛을 발하자 템페리에스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단단한 비늘은 겉과 속이 따로 있다.
그런데 이번 일격으로 속 비늘도 완전히 제 기능을 잃고 말았다.
“죽어라.”
르노어가 수평으로 검을 휘둘렀다.
공간이 갈라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엄청난 일격이었다.
그 일격을 버티지 못한 템페리에스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나름 괴수종의 왕이라 불리며 급부상하기 시작한 템페리에스의 허무한 최후였다.
“자네… 검에 평정심을 잃었군…….”
카일라이드가 르노어의 곁에서 말했다.
검신에 묻은 핏물을 털어낸 르노어가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러는 자네도 평소답지 못하군.”
르노어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커다란 구덩이들이 시야에 확 들어왔다.
치솟는 불길들과 솟아나 있는 거대한 바위들.
그곳에 수많은 마수들이 죽어 있었다.
모두 카일라이드가 만들어놓은 광경이었다.
“후후. 늘그막에 이런 감정이 들 줄은 몰랐는데… 다시 젊어진 기분이야.”
“그런가. 하지만 나는 못내 아쉬운 감정이 드는군.”
“어째서?”
“조금 더 마음껏 분할 수 없다는 게 말이야.”
르노어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에 카일라이드도 동의했다.
그들이 더 젊고 짊어진 것들이 많지 않았더라면 분명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당장 게이트 안으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이번에 검제께 실례를 저질렀군.”
“늙어서 얼굴에 철판 한 번 깔고 들이댄 것 아니겠나. 검제께서도 우리들의 마음을 십분 헤아렸으니 이런 무모한 부탁도 들어주신 거겠지.”
카일라이드의 말에 르노어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안에 무엇이 있든 그는 하야트의 시신을 수습해 올 생각이었다.
“마수들의 왕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하여도.”
르노어의 전신에서 은은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카일라이드가 르노어를 말려주었겠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카일라이드 또한 흉흉한 안광을 빛내며 게이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