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화 진정한 여왕
“네가 뭘 도와줄 수 있다는 말이지?”
“내가 잠시나마 저 영혼체를 물리적으로 만들 수 있다.”
“영혼체를 물리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그래. 이를테면 인형과 영혼을 동화시키는 거지.”
“그럼 그 인형을 부수면 저 여자도 죽는 것이냐?”
마녀여왕의 물음에 레큐니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입가에 손을 가져가 웃음을 가렸다.
“어리석은 얘기를 하는구나. 인형은 단지 그릇일 뿐이다.”
“…그럼 저 여자의 영혼을 인형에 모두 담을 수 있다는 말이로구나.”
“그렇다. 그 이후에는 페로세르핀의 영혼을 공격하면 된다.”
레큐니아의 말에 마녀여왕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제야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내게 영혼의 저주를 걸라는 말이로구나.”
“바로 그렇다.”
“우습군. 내게 그것을 당당하게 요구하다니.”
“나는 그저 방법을 알려주는 것뿐이니라.”
레큐니아는 비릿한 조소를 흘리고 있었다.
마녀여왕을 살짝 흔들 생각이었는데 그녀의 얼굴을 보아하니 정말로 고민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슬쩍 선택에 도움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레큐니아가 그녀의 힘으로 페로세르핀의 공격들을 모조리 막아내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녀의 피가 파도처럼 번지며 다른 마수들까지 학살해버렸다.
넘실거리는 핏물에 삼켜진 마수들이 숨을 거둔 채로 바닥을 뒹굴었다.
마녀여왕만큼이나 강렬한 마법들이었다.
레큐니아의 마법을 지켜보던 인간들과 마녀들이 동시에 감탄했다.
핏물을 이용하는 마법들이라 지켜보기에 께름칙하긴 하지만 위력만큼은 대단했다.
페로세르핀도 레큐니아의 존재를 서서히 신경쓰기 시작했다.
―감히 나서지 마라 밤의 여왕.
“미안하지만 나는 애초부터 이쪽에 서기로 해서 말이다. 같은 밤하늘 아래 여왕이 두 명일 수는 없잖느냐?”
칠흑빛 운무와 붉은 혈기가 부딪혔다.
핏물과 마기가 뒤섞이는 와중에 마녀여왕도 잠시 힘을 회복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 전투가 치러지는 가운데 다행히도 인간들의 힘이 마수들보다 우세하고 있었다.
많은 군사들이 참전한 만큼 이들은 모두 대단한 저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 이 전장만 잘 넘기면 되었다.
마녀여왕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레큐니아의 말대로 마녀여왕에게는 영혼체인 페로세르핀을 직접적으로 공격할 방법이 있었다.
다만 그 마법은 자신의 수명을 대가로 한다.
아마 그것 때문에 레큐니아도 마녀여왕에게 그 마법을 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레큐니아가 자신의 일족들을 이끌고 마수들과 싸우고 있지만, 그녀 또한 마수종 중 하나였다.
배신을 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레큐니아와 그녀의 일족들은 마녀를 증오한다.
이 전투가 끝나고 나서도 마녀들의 안전이 보장되어야만 한다.
그게 마녀여왕이 자신의 위치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었다.
마녀여왕의 고민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갔다.
콰트로마저 두 명이나 당한 지금, 자신이 아니면 마녀들을 지켜줄 인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었다.
“여왕님.”
그때 퀴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녀여왕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
“여왕님께서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후후후. 네게는 숨길 수 없느냐?”
“밤의 일족이 하는 말입니다.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소서.”
“그래… 나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나 또한 이제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그에 반해 저 마수는 힘을 더해가고 있는 중이다.”
마녀여왕의 시선이 페로세프린에게 머물렀다.
마기가 공기 중에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페로세르핀의 힘도 커지고 있었다.
지금이야 레큐니아가 막상막하를 이루며 막아내고 있지만 곧 힘의 격차는 벌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레큐니아의 말에도 설득력이 더해진다. 레큐니아가 자신의 힘을 써서 피의 저주를 걸면, 분명 페로세르핀의 영혼 모두가 인형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때 내가 마녀의 저주를 거는 거다.”
“하지만 이번에 또 여왕님께서 저주 마법을 사용하시면 수명이…….”
“솔직하게 말해 그것은 상관없다. 어차피 태어난 것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니. 그 시기를 조금 앞당기는 것뿐이야.”
마녀여왕이 퀴노를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이에 퀴노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때 마녀여왕의 시선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 나의 뒤가 너무나 걱정이었는데… 퀴노. 네게 부탁 한 가지 해도 되겠느냐?”
“말씀하십시오, 여왕님.”
“부디 너는 이 전투에서 살아남아 세아츠리스가 나의 뒤를 이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면 한다.”
“세아츠리스가요……?”
“그래.”
퀴노는 조금 전부터 마녀여왕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체 무엇을 보고 있기에 그녀의 시선이 한참이나 머물러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고개를 돌린 퀴노가 이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곳으로 다가오는 커다란 골렘이 있었다.
골렘은 마수들의 집중 공격을 받으면서도 우직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놈이 휘두르는 주먹에 십수 마리의 마수들이 허공을 날았다.
뒤이어 골렘이 빛을 발하니 여기저기 마력탄이 쏟아져나갔다.
“여왕님 저건…….”
“기간티아다.”
“하지만 기간티아는 아주 오래전에 없어진 수호신 병기가 아닙니까?”
“지금 눈앞에 있질 않느냐.”
마녀여왕의 시선에 기간티아 위에 올라타 있는 세아츠리스와 린이 보였다.
결국 두 사람이 기간티아를 데리고 오는데 성공했다.
그 말은 세아츠리스에게 마녀여왕의 자격이 있다는 말이었다.
“대대로 여왕의 명령에만 따랐던 것이 바로 기간티아다. 세아츠리스가 녀석을 움직이고 있다면… 다음 여왕은 역시나 세아츠리스였다는 말이지.”
마녀여왕이 옅게 웃었다.
기간티아가 고대병기로 불리는 이유, 그것은 바로 세계수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골렘이었기 때문이다.
세계수는 자신의 꽃에서 태어나는 마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기간티아를 내주었다.
기간티아는 오직 세계수의 인정을 받은 마녀여왕의 명령에만 움직인다.
“어쩌면 세아츠리스는 오래전부터 숲의 인정을 받았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더욱 마녀여왕도 세아츠리스에게 마음이 갔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기간티아가 우뚝 서서 자신의 힘을 제대로 과시하고 있었다.
그 위에 있는 린과 세아츠리스도 활약하기 시작했다.
세아츠리스의 마법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린의 치유 마법도 지금 이 순간 빛을 발하고 있었다.
“후후. 저 두 명의 여인이 모두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건가… 지나치리만치 운이 좋은 사내로구나. 과연 비체가 자신의 손자라 부를만한 인물이라는 건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보인 마녀여왕이 레큐니아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레큐니아가 입을 열었다.
“고민이 길었구나. 덕분에 벌써 많은 힘을 소모했다.”
“나를 위해 그 힘을 썼으니… 지독하리만치 싫었겠구나.”
“솔직히 말해 내 스스로가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느니라.”
“그럴 것 없다. 내 너의 뜻에 따라줄 테니.”
마녀여왕의 말에 레큐니아가 붉은 입술을 한껏 말아올렸다.
잔뜩 흥분한 레큐니아가 혀를 낼름거리며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정말이냐?”
“그래.”
“아하하하! 좋다. 그럼 이제 저 짜증나는 마수년을 죽여볼까.”
레큐니아가 광소하며 그녀의 힘을 폭발시켰다.
촤르륵―――!!!
기다란 손톱이 레큐니아의 팔뚝을 그었다.
뚝뚝 떨어지는 핏물이 대지 위에 번지기 시작했다.
황홀경에 빠진 레큐니아가 자신의 몸을 감싸 안았다.
화르르르륵―――!!!
커다란 날개가 펼쳐지고 곳곳에서 일어난 핏물이 소름끼치는 광경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붉은 물결이 넘실거리며 커다란 장막을 만들어내었다.
칠흑빛 마기로 인간들을 도륙내고 있던 페로세르핀이 고개를 들었다.
붉은 장막에게서 묘한 위화감이 들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장난이냐.
“글쎄. 어떤 장난일까.”
레큐니아가 손짓하자 붉은 기운들이 페로세르핀을 에워쌌다.
피의 장막이 그녀를 감싸고 대지를 뚫고 시뻘건 인형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페로세르핀이 자신의 마기로 그것들을 막아내려 했다.
그러나 칠흑빛 마기는 피의 장막 안에서 뭉치지 못했다.
페로세르핀이 얼굴을 구겼다.
그 순간 붉은 인형이 커다란 입을 벌리며 페로세르핀을 삼켰다.
그와 동시에 칠흑빛 기운들이 붉은 장막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콰라라랑!
쿠우우웅!!! 키이이이잉―――!!!
페로세르핀이 붉은 인형 안에서 격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해골 형상을 한 검붉은 운무들이 붉은 인형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쿨럭!
레큐니아의 코와 입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녀의 두 팔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굉장하구나… 이것이 마수 여왕의 힘이더냐…….”
레큐니아는 억지로 손아귀를 움켜쥐려 했다.
핏물이 붉은 인형에 덕지덕지 붙었다.
그럼에도 칠흑빛 마기가 인형 밖으로 새어나오려 했다.
“오만한 여왕아. 어림… 없느니라……!”
붉은 장막이 마침내 붉은 인형을 감싸 안았다.
계속해서 나오던 칠흑빛 마기가 더 이상 바깥으로 새어나오지 못했다.
레큐니아가 자신의 가슴팍을 그어 핏물을 한 움큼 쏟아냈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마녀여왕.”
“충분했다.”
쿠우웅! 쿠우우웅!!!
쩌저저적―――!!! 쩌저저저저정―――!!!
마녀여왕의 주변으로 십수 개의 나무못들이 박혔다.
가시덤불이 그녀를 중심으로 마법진을 그렸다.
평소와는 다른, 푸른 기운을 띄면서도 거무스름한 빛깔의 마력이 마법진을 빛냈다.
마녀가 사용하는 사이한 마법에 대기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뒤이어 잿빛 운무가 번지고 검은 형체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커다란 낫을 등진 악마가 마녀여왕을 바라보며 웃었다.
“다시 보는구나.”
악마를 본 마녀여왕이 웃었다.
그녀의 마력이 가리키는 곳은 하나였다.
악마가 커다란 낫을 들어 올렸다.
거래는 성립되었다.
악마의 속삭임이 마녀여왕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키히히히히히히―――!!!
소름끼치는 웃음소리와 함께 커다란 낫이 마녀여왕을 베고 지나갔다.
핏물도 튀지 않았고, 몸이 잘려나가지도 않았다.
마녀여왕은 우두커니 서서 페로세르핀이 갇혀 있는 붉은 인형 쪽을 바라보았다.
“끝이다.”
쿠구구구구구궁―――!!!
드르르릉―
계속해서 요동치던 붉은 인형이 잠잠해졌다.
그것을 가까스로 봉인해놓던 레큐니아도 팔의 경련이 멈추었다.
핏물이 멈추자마자 레큐니아의 혈색이 조금 돌아왔다.
“아하하… 끼야아하하하하하!”
그녀가 돌연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피의 장막이 걷히고 붉은 인형이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그 안에 갇혀 있던 칠흑빛 마기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레큐니아의 시선이 마녀여왕에게로 향했다.
마녀여왕은 마법진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레큐니아가 웃음을 멈추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움직이는데도 마녀여왕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었다.
희멀건해진 눈동자를 보며 레큐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수명을 다 써야 했던 거로구나.”
“…….”
마녀여왕에게서 답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 마녀여왕이 대답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레큐니아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늑대인간들이 모조리 죽어가고 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레큐니아가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최고로 황홀한 밤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