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화 의지 (1)
데미리우스가 죽었다.
이성을 잃은 에스파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 들린 활에서 수십 개의 화살이 날아갔다.
마수들의 몸이 꿰뚫리고 또 꿰뚫렸다.
그럼에도 에스파는 멈추지 않았다.
돌연 모습을 나타낸 마수가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아앙!!!
캉!!!
검을 막아낸 것은 에이브릴의 사슬이었다.
“정신차려, 에스파!”
데미리우스와 아시테르, 에스파, 라빈의 우정은 에이브릴도 잘 알고 있다.
아카데미 때부터 이어져 온 우정에 세월이 더해지면서 더욱더 끈끈해져 있었다.
그런 데미리우스가 죽었으니 에스파가 이성을 잃을 만했다.
하지만 이런 전쟁터에서 이성을 잃으면 제일 먼저 노려지기 십상이다.
“에스파! 정신 차려야 한다고!”
에이브릴은 계속해서 폭주하는 에스파를 말렸다.
그러나 에스파의 귓가에는 에이브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데미리우스의 몸에 구멍을 낸 고목처럼 생긴 마수를 노렸다.
날아가던 화살이 수십 다발로 나뉘며 놈을 노렸다.
고목처럼 생긴 마수가 기다란 팔을 이용해 화살을 모두 쳐냈다.
나뭇잎 속에 가려진 놈의 눈동자가 에이브릴을 살폈다.
이성을 잃고 날뛰는 에스파보다 옆에서 그를 보조해주는 에이브릴의 존재가 더욱 신경쓰였던 것이다.
놈은 은밀하고도 신속하게 에이브릴을 노렸다.
콰아아앙―――!!!
그러나 길게 뻗어 나가던 마수의 팔이 막혀버렸다.
“두 번이나 당해주진 않는다.”
놈의 공격을 막아낸 것은 제라피너스였다.
로얄나이츠이면서도 어쌔신 출신이었던 그가 이렇게 전장에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사실 드물었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그가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에스파님.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흥분을 가라앉혀야 합니다.”
제라피너스가 날뛰고 있는 에스파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에스파는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화살을 날려대었다.
보다 못한 제라피너스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정신차려야 합니다. 이러다 데미리우스님뿐만 아니라 에이브릴님도 잃게 됩니다.”
에이브릴의 이름이 나오자 에스파가 마침내 그를 돌아보았다.
표정을 보니 조금 진정된 듯 했다.
제라피너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은 살아남은 사람들부터 챙겨야 할 때입니다. 에스파님도 숱한 전장을 겪어보셔서 잘 알고 계시질 않습니까!”
제라피너스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죽은 사람들에 대해 마냥 슬퍼하고 분노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에스파의 시선이 에이브릴에게로 향했다.
그 사이 마수들의 공격이 에이브릴에게로 집중되고 있었다.
사실 에스파와 에이브릴은 무리해서 전장을 빠져나온 상태였다.
그들의 공백을 다른 이들이 메꿔주고 있었고, 후방마저도 아비규환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맞아요… 죄송합니다. 제가 못난 모습을 보였군요…….”
그러면서도 에스파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시선이 최전방으로 향했다.
다행히 아시테르는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그가 생각했을 때 데미리우스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면 누구보다 분노할 이는 바로 아시테르였다.
에스파가 제라피너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라피너스님.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데미리우스 형님을 게이트 너머로 옮겨주십시오. 그리고 이 사실은 최대한… 아시테르에게는 늦게 알려주세요.”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만, 검제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최대한 외면할 수 있도록 두죠.”
제라피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바로 움직여 데미리우스의 시체를 들어 올렸다.
제라피너스가 데미리우스를 데리고 뒤로 빠져나가는 동안 에스파가 다시 한 차례 숨을 골랐다.
그는 가장 먼저 활시위의 방향을 돌렸다.
에스파가 노리는 곳은 에이브릴 주변에 있는 마수들이었다.
파바바방!
퍼버버버벙! 퍼버벙!!!
화살 세례가 퍼부어지며 마수들이 죽어나갔다.
에스파는 화살을 날림과 동시에 주변 지휘관들을 찾았다.
그리곤 빠르게 전황을 살피며 명령을 내렸다.
에스파가 아시테르의 동료임을 잘 알고 있었던 기사들도 그의 명령을 곧잘 따라주었다.
갑자기 나타난 강한 마수들 때문에 지휘체계에 혼선이 생겼었는데, 에스파가 곧바로 그것을 바로잡아주기 시작한 것이다.
에스파 덕분에 한숨 돌린 에이브릴이 피식 웃었다.
“어휴… 드디어 제정신이 든 모양이네.”
에이브릴의 사슬이 다시금 움직였다.
이번에는 에스파의 움직임을 보조해주기 위함이었다.
뒤이어 마도사들이 달려와 에이브릴을 중심으로 섰다.
“저희들이 돕겠습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에이브릴님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마도사들 사이에서 에이브릴이 웃었다.
“그럼 미안하지만 부탁드릴게요!”
그렇지 않아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때마침 달려와준 마도사들 덕분에 문제는 해결이었다.
후방에서 에이브릴과 에스파, 로얄나이츠들이 힘내주고 있을 때 아시테르는 최전방에서 길을 뚫고 있었다.
그를 막아서기 위해 수많은 마수들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잠시뒤면 여지없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무섭도록 질주하는 아시테르 쪽으로 가이우스가 다가왔다.
“주군. 다른 아군이 따라오질 못하고 있습니다.”
“야 대장! 너무 급하잖아!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는 거야!?”
카이드까지 다가와 아시테르를 말리려 들었다.
아시테르 혼자 적진 한가운데까지 뚫어버렸다.
심지어 그는 수천 마리의 마수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도륙내고 있었다.
이제는 누가 인간이고 누가 마수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하아… 하아…….”
잠시 숨을 고른 아시테르가 주변을 살폈다.
붉은 가죽을 뒤집어쓴 마수들이 그를 노리고 있었다.
아시테르가 고개를 돌렸다.
한쪽에서는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굉장히 그립고도 편안한 기운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를 대놓고 도발하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건 아마도 위리놈이겠지.”
마수들의 진정한 왕이 이곳을 주시하고 있다.
놈은 직접 이곳으로 오지 않고 아시테르를 끊임없이 불러들이고 있었다.
그의 수하들을 베고 또 베며 자신의 앞까지 다가와보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그러나 아시테르는 곧바로 위리놈에게 가기보다 옆으로 방향을 꺾는 것을 택했다.
지옥도로 변한 어비스 던전 속에서 희미하게 퍼지는 이 기운이 자꾸만 신경쓰였다.
“일단은 가보자.”
아시테르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그곳에 있던 마수들의 몸이 뒤틀렸다.
뒤이어 아시테르가 움직이자 마수들의 몸이 그대로 찌그러졌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마수 하나가 아시테르를 올려다보았다.
“인간이… 어떻게 이런 힘을 가질 수 있는 거냐!”
그러나 아시테르는 대답 대신 검을 휘둘렀다.
놈의 목을 취한 아시테르가 다시 발걸음을 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움직여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마수들을 베어내야 한다.
그래야 뒤에 있는 수많은 동료들과 수하들이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저 뒤에 앉아 이곳을 구경하고 있는 위리놈의 목을 한시라도 더 빨리 베어내야만 했다.
놈이 있는 한 계속해서 마수들이 밀려들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일순간 주변의 마수들을 모두 죽여버리자, 이번엔 마수들도 주춤하는 모습이었다.
그 사이 누군가 아시테르의 곁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검제님. 보고드립니다.”
“말해라.”
“바깥의 전쟁터에서 승전보를 가져왔습니다. 마녀여왕이 죽고 마수들의 여왕도 죽었습니다. 몇몇 기사분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마수들의 전진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피해 규모는?”
“사우스 왕국의 트럼프 군대가 반절 넘게 죽었습니다. 그들을 돕기 위해 달려왔던 이스트 왕국 마법기사들도 피해가 심각한 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왕국의 군사들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보고를 하던 어쌔신이 고개를 숙였다.
사실상 이번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은 웨스트 왕국이었다.
그럼에도 웨스트 왕국 군사들은 지금도 주저없이 마수들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패하면 자신의 가족들, 친구들, 이웃주민들까지 모두 무사하지 못하리란 것을.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두려워도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용기의 바탕에는 아시테르와 로얄나이츠가 있었다.
검제와 로얄나이츠 모두가 목숨을 걸고 최전방에서 최선을 다해 싸워주고 있었다.
아무리 강한 마수가 튀어나오더라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 모습들이 군사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이는 웨스트 왕국 군사들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왕국의 군사들도 덩달아 고무되어 마수들과 전쟁을 펼치고 있었다.
덤덤하게 보고를 듣고 있던 아시테르가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휘콰아아앙!!!
촤라라라락―――!!!
은밀하게 이곳으로 다가오던 마수들의 몸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알겠다. 고생했다.”
아시테르가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부터 데미리우스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언노운 기사단원들의 마력은 멀리서도 느낄 수 있었다.
특히나 데미리우스 같은 경우는 광역 마법이 주특기이기 때문에 더더욱 잘 느껴졌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데미리우스의 마력이 아예 느껴지질 않는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확인하러 가볼수도 없었다.
“제발 다들 무사하기만을…….”
아시테르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더 가면 이 친숙한 기운이 자리잡은 장소였다.
“제가 길을 뚫겠습니다. 주군께서는 조금이라도 더 회복하십시오.”
“그래! 대장은 조금 쉬라고!”
“스승님! 제가 왔습니다!”
“아시테르형! 너무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말란 말이야.”
“아아 시끄럽고! 나부터 간다!?”
라빈이 뼈검을 들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가이우스도 육탄돌격을 하며 마수들 사이로 길을 열었다.
“야 거기!”
다같이 앞으로 나가려는데 카이드가 뒤에 있는 자비토를 불렀다.
자비토가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뭐냐?”
“이제부터 내기다!”
“무슨 내기?”
“누가더 많이 죽이나!”
“쯧, 이런 상황에서 그게 무슨…….”
“야. 이럴 때 즐길줄 알아야 그게 진정한 일류라는 거야. 알겠냐!?”
“이봐, 너 말이…….”
자비토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카이드가 냅다 튀어나가버렸다.
그가 창을 휘두르니 마수들의 몸이 사정없이 분리되었다.
잠시 인상을 찌푸리던 자비토가 이내 몸을 움직였다.
언노운 기사단이 본격적으로 길을 뚫기 시작했다.
최전방에서 마수들과 싸우고 있음에도 언노운 기사단은 전혀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들이 마수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강한 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내도 소용없었다.
발라크가 언노운 기사단을 지켜보며 턱을 쓸어내렸다.
“쉽지 않군…….”
수많은 물량으로 놈들을 공격하면 조금이라도 틈이 생길 줄 알았다.
그러나 언노운 기사단은 더욱 단단하게 뭉쳤다.
가장 앞에서 돌진하던 가이우스가 발을 멈췄다.
“주군.”
그가 뒤편에 있는 아시테르를 불렀다.
그러면서도 그의 주먹에서는 거대한 마력이 방출되고 있었다.
슈콰아아아앙―――!!!
마수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시테르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저건…….”
그곳에는 붕새가 있었다.
온갖 상처를 입은 녀석은 둥지를 이용해 마수들의 접근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것을 본 아시테르가 나지막이 말했다.
“어비스의 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