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화 의지 (2)
놀란 아시테르는 신수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후우웅―――!!!
강한 바람이 날아와 주변의 마수들을 날려버렸다.
아시테르가 그것을 견뎌내며 눈을 치켜떴다.
신수는 배리어 안에서 무언가를 보호하고 있었다.
내려놓은 날개가 무언가를 감싸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아시테르가 안쪽으로 단숨에 뛰어들었다.
신수가 아시테르를 확인했다.
녀석이 시선을 돌렸다.
후콰아앙―――!!!
날아간 얼음 파편이 다가오는 마수들의 몸에 박혔다.
그 사이 신수가 날개를 활짝 펴 배리어를 열어주었다.
그 안으로 들어선 아시테르의 몸이 순간 굳어버리고 말았다.
“아아…….”
신수의 날개 밑에 누군가 있었다.
아시테르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할아버지…….”
비체의 몸이 차가운 바닥 위에 눕혀져 있었다.
숨을 거둔 그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
다행히도 비체의 시신은 많이 훼손되지 않았다.
몇몇 상처들이 보이긴 했지만 다른 이들처럼 보기에 끔찍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막상 비체의 시신을 확인하니 아시테르의 가슴 속 무언가가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네가 할아버지를 지켜주었구나…….”
아시테르가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신수도 마침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비스 던전을 수호하는 신수였다.
감당할 수 없는 마수들이 아포칼립스 문밖으로 나올 때마다 비체를 도와준 존재라고도 들었다.
그래서 비체는 늘 마음속으로 신수에게 감사를 표했다.
심지어 던전에서 아시테르가 태어날 때도 신수가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다.
“너에게는 늘 도움만 받네…….”
신수의 가호 아래 아시테르는 어비스 던전에서 어렵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어머니인 아레나는 신수의 축복을 받아 더욱 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그것으로 아레나는 아시테르와 가족을 지켜주었다.
마찬가지로 유미르와 비체 또한 문틈으로 튀어나오는 마수들을 막아내며 어비스 던전의 평화를 지켰다.
문득 그때를 떠올리니 하염없이 그리워지는 기분이었다.
“사실은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때가 아니었으려나.”
“키루우우우우―”
신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가 마치 아시테르를 위로해주는 듯했다.
“어쨌든 할아버지를 지켜줘서 너무나 고맙다. 이제는 내가 모셔갈게.”
아시테르가 손으로 신수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신수가 날개를 활짝 펼쳐 들었다.
그러자 신수와 아시테르를 보호하고 있던 배리어가 사라졌다.
아시테르가 신수를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이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수도 많이 지쳐있는 모습이었다.
녀석의 날개에서 늘 환하게 빛나던 마력도 어느덧 희미해져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널 지켜줄게.”
아시테르가 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이어 그가 검을 휘두르자 일순간 공간이 뒤틀렸다.
그곳에 있던 마수들의 몸이 찌그러지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냈다.
신수를 노리기 위해 달려드는 마수들을 향해 아시테르가 검을 휘둘렀다.
부드럽게 나아가는 듯하면서도 현란한 검이었다.
여기저기 보이는 검의 잔상들은 모두 실초가 되어 마수들의 몸을 꿰뚫었다.
대지를 딛고 앞으로 나간 아시테르가 이를 악물었다.
‘검의 움직임은 짧고 간결하게.’
지나치게 많은 움직임을 넣으면 검이 나가기도 전에 상대방은 검로를 눈치챌 것이다.
최소한의 검로로 적의 숨통을 끊는다.
이어지는 검은 부드럽게 나아간다.
느릿하게 나아가는 것 같으면서도 그 안에 담겨 있는 힘은 태산을 밀어버릴 정도의 거력이었다.
아시테르가 호흡을 내뱉으며 검을 내지르자 강력한 기운이 마수들을 쓸어버렸다.
발을 회전시킨 그가 자연스럽게 검을 횡으로 베었다.
빠르게 나아간 검신이 달려들던 마수들을 베어버렸다.
그가 펼치고 있는 검술 모두가 비체에게 배운 것들이었다.
아시테르가 생각하기로 비체의 검술은 누구보다 뛰어나다.
아마 그가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었더라면 아버지 유미르처럼 이런 마수들에게는 쉽게 당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었다.
“할아버지의 검술은 최강입니다.”
아시테르가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검신의 떨림이 멈추었을 때 검신 끝에서 맺힌 오러가 화려한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비체가 다수의 마수들을 상대로 자주 썼던 검술이었다.
아시테르는 그때의 비체가 되어 검으로 주변 마수들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검을 쥐고 회수하는 그 모습까지도 비체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시테르는 다시 호흡을 갈무리하고 발을 내디뎠다.
거대한 마수가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녀석을 보자마자 아시테르가 땅을 박찼다.
파앙!!!
슈카아아아아앙―――!!!
한줄기 선이 되어버린 아시테르가 단숨에 놈의 가슴팍을 꿰뚫고 지나갔다.
비체가 우두머리급 마수들을 상대할 때 즐겨 사용했던 검술이었다.
아시테르는 이후로도 비체를 추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체의 검술을 계속해서 선보였다.
마수들 사이로 검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검제 그 자체였다.
“와아아아아!”
“검제님 만세!”
“우오오오오오오오오!”
아시테르의 전투를 지켜본 기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언노운 기사단도 그런 아시테르를 보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시테르는 한동안 비체의 곁에 머물며 검술을 펼쳤다.
그가 죽인 마수들의 시체가 또다시 산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움직이던 아시테르가 검을 멈추었을 때, 더 이상 그의 주변에 살아 숨쉬는 마수는 없었다.
신수는 그런 아시테르의 모든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크우우우우우우―――!
녀석의 몸에서 강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신수가 마침내 힘찬 날갯짓으로 공중에 떠올랐다.
아시테르가 그런 신수를 올려다보았다.
“함께 싸워주는 거냐.”
크루우우우―――!!!
아시테르의 말에 대답해주듯, 신수가 크게 울음소리를 내었다.
녀석이 힘차게 날갯짓을 시작하자 형형색색의 마력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사이 아시테르는 비체의 시신을 수습했다.
주변에 그 어떤 마수도 존재하지 않았다.
언노운 기사단이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분은…….”
“나의 할아버지셔.”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애써 담담해지려는 듯한 표정으로 아시테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뭐……?”
“할아버지?”
“너의 할아버지라면, 그 엄청나게 강한 분이시라던…….”
“테르세우스님보다 더 강한 분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나저나…….”
언노운 기사단원들은 어느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시테르의 곁에 모여들었다.
아시테르에게 할아버지가 어떠한 존재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머뭇거리던 라빈이 먼저 다가와 말했다.
“괜찮은 거야?”
“괜찮을 리가. …괜찮으려고 노력해봐야지.”
아시테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들고 있는 비체의 몸이 가벼워도 너무나 가벼웠다.
“주군…….”
“제기랄… 역시 마수들은 싸그리 죽여야 한다니까.”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감히 스승님의 할아버지를……!”
“진짜 싹 다 죽여버릴게, 형.”
언노운 기사단이 함께 슬퍼해주며 분노해주었다.
그 모습에 아시테르가 옅은 미소를 보였다.
지금은 자신을 위로하기에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고맙다 다들.”
“좀더 슬퍼해도 됩니다.”
“맞아. 너무 감추려 하지 않아도 돼. 지금은 우리들끼리 있는데 뭐 어때?”
“마수들도 잠깐 상황을 지켜보는 듯하고요.”
그들의 말에 아시테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가족과 동료들을 잃었을 거야. 세상이 나에게만 친절할 순 없지.”
아시테르가 비체의 몸을 끌어안았다.
온기가 모두 빠져나가 차갑디 차가운 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체의 따스한 손길이 자신을 어루만져주는 느낌이었다.
잘하고 있다고, 조금 더 힘내라고.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비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모든 걸 끝내고 다시 모시러 갈게요.”
아시테르가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리부터 대기하고 있던 수하들이 비체의 몸을 넘겨받았다.
그런 수하들을 향해 카이드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겠지만 조심히 모셔라. 우리 대장님의 할아버님이시다.”
카이드의 말에 수하들의 표정도 순간 변했다.
그러다 가장 앞에 있던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들이 사라지고 아시테르가 잠시 숨을 고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비스 던전의 하늘은 본래 어둡고 컴컴하다.
그런데 무슨 수를 쓴 건지 지금은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다시 가볼까. 마지막 싸움을 위해.”
아시테르가 이내 몸을 돌렸다.
자신을 끊임없이 불러들이는 이 기운을 향해 나아갈 시간이었다.
언노운 기사단이 그런 아시테르를 중심으로 모였다.
“까짓꺼 한번 부딪혀 봅시다!”
“이제 진짜 마지막 싸움인 건가!?”
“와 길다 길어.”
“이번에 돌아가면 술이나 실컷 마셔야지. 술이 너무나 땡깁니다, 술이!”
“야, 그러다 너 애인도 안 생겨. 적당히 마셔.”
“너나 잘해라 반키라스!”
“난 이미 있다.”
반키라스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아시테르조차 순간 놀란 눈치였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반키라스가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뭡니까 그 반응들은?”
“아니 그냥 의외여서…….”
“맞아. 너는 여자한테는 관심 없는 줄 알았거든.”
“크하하하! 다 컸네 다 컸어! 연애도 하고.”
즐겁게 떠들고 있는 듯 하지만 아무도 데미리우스와 에스파, 에이브릴을 찾지 않았다.
특히나 데미리우스에 대한 얘기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도 꺼내지 않았다.
모두가 은연중에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아시테르가 주변에 있는 기사단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 살아남아.”
“당연하지!”
“뭐 그런 당연한 말을.”
“살아남아서 스승님이 결혼하는 모습을 볼 겁니다!”
“나는 그 앞에서 춤이나 추련다.”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언노운 기사단 앞으로 또다시 마수들이 나타났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언노운 기사단은 각자의 위치로 흩어지며 마수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최전방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로얄나이츠들도 투지를 불태웠다.
콰르르르릉―――!!!
아시테르가 마수들을 베어 넘기며 발라크를 찾았다.
놈은 아직까지도 몸을 숨긴 채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언제 나타날 생각인 거냐.”
상대와의 실력 차이를 가늠하고,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이기 위해 때를 기다리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시테르와 언노운 기사단이 아무리 거칠게 나아가도 발라크는 여전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뒤편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위리놈이 손짓했다.
“가라. 가서 인간들에게 지옥을 보여주고 오거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고 마침내 위리놈의 정예 마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르탄에 가둬두었던 위험한 놈들은 여전히 인간들의 뒤에서 마음껏 날뛰어주고 있었다.
거기다 거듭된 전투로 지친 인간들이 양옆으로 점점 밀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들을 이끌고 있는 아시테르도 이 같은 사실을 모르진 않을 터.
그런데도 아시테르는 계속해서 이쪽으로 밀고 들어오고만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것이냐.”
위리놈이 그런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어 마수 중 하나가 다가와 그에게 알렸다.
“아드레말레이크님이 보냈습니다.”
“얘기해라.”
“인간들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래.”
위리놈이 다시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이제 어떻게 할 테냐.”